대전에서 홀로 두 아들을 키우던 특허청 손영희 심사관은 재택근무 덕에 남편과 함께 서울에서 살게 돼 양육의 부담을 덜었다.
# 유연근무제 관련 토론회 현장. 한 국내 대기업의 실패 사례가 소개됐다. 정보기술(IT) 관련 대기업 계열사의 직원 A씨가 유연근무제 때문에 사표를 내고 말았다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회사가 서너 명의 여직원에게 공용 사무실을 주고 ‘자녀 돌보미’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새로운 근로 형태를 모색했지만, 결과적으로 인사고과상의 불이익을 줘 퇴사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회사는 현재 유연근무에 대한 고민을 계속하고 있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해, 학자들 사이에서 실패 요인에 대한 사례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정부가 최근 ‘유연근무제 확산 방안’을 확정 발표했다. 먼저 공공 부문에서 유연근무제를 도입한 뒤 민간으로 확산시키겠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이미 유연근무제를 실시하는 공공기관 및 민간 기업이 여럿 있다. 정부부처로는 특허청 등이 2005년부터 시범실시를 하고, 국내외 기업들도 시차출퇴근(1일 8시간 근무체제를 유지하며 출근시간을 자유롭게 조정하는 것), 재택근무 등을 도입하고 있다. 이러한 유연근무제 도입 현장을 가봤다. 결과부터 말하면 이렇다. 정부는 걸음마, 외국계 기업은 완성, 국내 기업은 유야무야(有耶無耶).
대전에 자리한 특허청은 2005년 중앙정부 부처 중 유일하게 재택근무를 도입했다. 현재 특허출원서 심사관 801명 중 10% 내외가 집이 멀거나 자녀 양육 등의 이유로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사실 심사관은 독자적으로 처리해야 할 특허심사 건수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집에서 일해도 무방하다. 내부 전산망과 해킹방지 프로그램이 깔린 컴퓨터에 지문인식기를 설치, 본인 여부를 확인받은 뒤 업무에 임하면 그만인 것. 이들에겐 인터넷망 사용료와 전화카드 등이 지급되며, 근무 중인지를 확인하는 메시지가 수시로 날아온다.
그 덕에 ‘일과 가정의 조화’를 되찾은 심사관들이 생겨났다. 대전에서 홀로 두 아들을 키우다가 재택근무에 지원한 손영희 심사관(서울 송파구)은 “서울에서 남편과 함께 아이들을 키우니 한결 몸이 편해졌다”고 말했다. 손 심사관은 “아이들을 유치원 종일반에 보내놓고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집중해서 일하면 나머지 시간은 온전히 가족과 보낼 수 있어 매우 만족한다”고 덧붙였다.
20년 가까이 ‘주말아빠’로 지내다 보니 자녀들과의 관계가 소원했다는 허조영 심사관(서울 강남구) 역시 재택근무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그는 “고3인 큰딸과는 여전히 서먹한 감이 있지만, 중3인 막내딸 혜림이와는 확실히 친해졌다”며 웃었다. 혜림 양 역시 “아빠가 집에 있어 TV를 많이 못 봐 아쉽긴 해도, 집에 들어올 때마다 아빠가 반겨줘서 좋다”고 말했다.
그러나 특허청의 ‘유연근무’ 미래가 마냥 밝기만 한 것은 아니다. 제도 도입 초기에는 인센티브를 줘서 활용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현재는 인사고과의 불이익을 우려한 나머지 “승진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들만 지원한다”는 말이 나오는 게 현실. 게다가 ‘윗선’의 의견에 따라 그 규모가 줄거나 늘기도 한다. 최근에는 재택근무자 비율을 전체 직원의 10%를 넘지 않도록 조정하는 분위기다. 그 결과 2006년 158명에 달했던 재택근무자가 2008년 77명으로 반 토막 났고, 현재(2009년 하반기)는 90여 명으로 약간 증가했다.
특허청 심사관 10% 재택근무 중
다국적 제약회사 한국릴리에서 재정 업무를 담당하는 권성철 부장에겐 개인 책상이 없다. 그래서 재택근무하다 일주일에 한두 번 출근하는 날이면 ‘공용 책상’ 중 하나를 골라 앉는다.
기획재정담당관실 전대규 주무관은 아내 또한 정부부처에서 근무하는 공무원 커플. 그러나 아내가 속한 부처가 탄력근무제를 시행하지 않아 전 주무관이 초등학교 2학년 자녀의 등교를 도맡고 오전 10시에 출근한다. 경기 구리시에 사는 그는 아이를 학교에 바래다준 뒤 8시 반에 버스를 타고 서울 광화문의 사무실로 출근한다. 그는 “아내가 속한 부처도 탄력근무를 실시하면 아이를 번갈아 등교시킬 수 있을 텐데”라며 아쉬워했다.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유연근무제 도입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4월부터 재택근무를 실시하고 있는 서울 동대문구청이 대표적. 현재 자녀를 키우는 여성 직원 9명이 재택근무 중이다. 경기도 하남시에 거주하는 문화체육과 김명화 주임은 17개월째 모유수유를 하면서 구내 문화사업 추진안을 관리하고 있다. 수요일에만 구청에 출근하고 나머지는 집에서 내부 포털사이트와 e메일 등으로 문서를 주고받으며 일하기 때문에 재택근무로 인한 업무 지장을 느끼지 않는다.
지난해 6월부터 재택근무를 시작한 김 주임은 “둘째 계획이 있다”고 귀띔했다. 경제적으로 부담이 돼도 내 손으로 아이를 키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서라고. 서울 송파구청도 유연근무제 지원자를 모집했는데, 총 64명이 지원서를 냈다. 구청 측은 3월 중순부터 지원자 전원(시간제 근무 11명, 탄력근무 27명, 육아시간제 24명, 재택근무 2명)에게 유연근무를 허용할 계획이다.
한국에 진출한 외국계 기업들도 유연근무제를 적극 추진하고 있다. 정부가 걸음마 단계라면 이들은 달리는 수준이다. 그중 한 예가 1995년부터 ‘모바일 오피스’를 실천하는 한국IBM. 이 회사는 영업직 직원은 물론, 컨설팅 부서 직원들도 ‘현장 출퇴근’이 원칙이다. 사무실을 들락날락하는 시간에 고객을 만나 만족도를 높이자는 취지다. 직원들에게 책상을 하나씩 줄 필요도 없다. 한국IBM 관계자는 “결과적으로 사무실 공간을 절반 이상 줄여 연간 22억원을 절약하고 있다”고 말했다. 직원들은 인터넷이 가능한 어디에서라도 회사 전산시스템에 접속해 업무를 한다. 회사에 나올 때는 사무실 각 층에 설치된 ‘자리예약 시스템’을 통해 책상을 예약하거나 빈자리를 찾아서 사용한다.
한국릴리도 개인 책상을 공용 책상으로 바꿔나가는 작업을 계속할 계획이다. 한국릴리 관계자는 “앞으로 사업이 확장돼 직원 수도 늘릴 예정”이라며 관리직의 “재택근무 비율을 더욱 높여 건물 임대료를 절약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강화되는 사회 분위기에 부응해 탄소 배출량을 줄이겠다는 의지도 있다”고 덧붙였다. 우리나라 사무직 직원 1명이 냉난방, 전기 이용, 출퇴근 등으로 배출하는 온실가스 양은 연간 3857kg으로 추산된다. 이는 2000cc 승용차로 서울과 대전을 약 72회 왕복할 때의 온실가스 배출량과 같은 수준이다.
공용 책상 나눠 쓰며 연간 22억 절감
이 밖에 다국적 제약회사인 한국MSD와 한국베링거인겔하임, 실리콘 제조업체인 한국다우코닝, 네트워킹 솔루션 제공업체인 시스코 코리아 등 외국계 기업도 비슷한 유연근무제를 실시하고 있다. 10년째 ‘근무시간 연동제’를 실시하는 한국MSD의 대외협력부 보험약가팀 전숙영 부장은 10시에 출근한다. 전 부장은 “아침에 아이와 대화를 나눌 수 있어 마음이 편하다”며 “그 덕에 업무 효율성도 높아졌다”고 전했다.
동대문구청 문화체육과 김명화 주임은 재택근무를 하면서 양육에 자신감이 생겼다고 한다.
1994년부터 출퇴근 시간을 선택할 수 있게 된 유한킴벌리 관리직 근로자들은 오전 7시에서 10시 사이에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시간을 정해 출근한 다음 8시간 일하고 퇴근하는데, 10명 중 1명이 통상적인 출퇴근 시간(오전 9시~오후 6시) 외의 시간을 활용하고 있다. 오전 7시 반에 출근해 오후 4시 반에 퇴근하는 직원은 20명 중 1명꼴이다. 이 회사의 2009년 지속가능성 보고서 임직원 조사에 따르면 ‘우리 회사에 근무하는 것에 만족한다’는 답변이 95%에 달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유연근무제 정착이 근무 만족도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한 유한킴벌리 영업직 사원들은 전원 현장 출퇴근하기 때문에 회사 오가는 데 따른 스트레스만큼은 덜 받는다.
다른 국내 기업들이 유연근무제 도입을 시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CJ는 2002년 직원들에게 출퇴근 시간을 선택할 수 있게 하자, 오전에 사내 피트니스센터를 이용하는 직원이 폭주하기도 했다. 그러나 2년도 지나지 않아 이런 분위기는 사그라졌다. CJ 관계자는 “2003년 카드 대란으로 ‘고용불안’이 이슈화되자 출퇴근 시간이 과거처럼 하나로 통일됐다”고 전했다. CJ는 2007년부터 모성보호플렉서블타임제(임신 시기부터 출산 후 만 1년까지 출퇴근 시간을 자유롭게 조정)를 도입하고 있지만, 시차출퇴근제가 회사 전반으로 확산되진 않고 있다.
교보생명 콜센터도 상담원들이 대부분 여성이라 자체적으로 출퇴근 시간을 30분에서 1시간 정도 조정해봤지만 현재 유야무야된 상태다. 고객들이 오후 6시가 넘으면 전화를 걸어오지 않는 데다 참여자도 적어 실효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최근 ‘워크 스마트(Work Smart)’를 실천할 수 있는 근무 문화 혁신을 가속화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6월부터 부분적으로 실시하던 자율출근제도를 각 사업부의 재량하에 전체로 확대했다. 점심시간을 포함해 9시간으로 정해진 근무시간만 지키면 개인 사정과 시간 활용계획에 따라 출퇴근 시간을 선택하면 된다.”(2009년 11월 언론보도에서 발췌)
이처럼 삶의 질을 끌어올리기 위해 ‘자율출퇴근제’를 도입한 삼선전자는 현재 어떤 모습일까. 삼성전자 관계자는 “취지는 몸이 자유로워야 생각이 창의적일 수 있다는 것”이라면서도 “현재 이렇다 할 성과는 없다”고 밝혔다. “야근이 워낙 잦기 때문에 남들보다 한 시간 늦게 출근해 한 시간 늦게 퇴근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 회사 내부자의 전언. 실제로 취재 중에 만난 대기업 직원들은 시차출퇴근제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이었다.
“처음엔 우리도 그런 제도를 실시하는가 보다 싶었는데 현재는 없어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한두 달은 10시에 출근했어요. 하지만 오전 7시에 출근한 직원들도 야근하다가 똑같이 퇴근하니, 미안해서 늦게 나올 수가 있어야죠. 게다가 부서장이 일찍 나와 늦게 퇴근하는데, 누가 당당하게 늦게 나오겠습니까?”(모 전자회사 과장)
“사흘 동안 새벽 한두 시에 퇴근해 다음 날 일찍 집에 가나 싶었지만, 부장이 술 한잔 하자고 하니 또 새벽에 귀가할 수밖에요. 한 시간 일찍 출근해 한 시간 일찍 퇴근하는 것이 우리나라처럼 야근이 많은 나라에선 불가능한 일 아닐까요? 자정 넘도록 야근하는 게 다반사인데, 누가 일찍 나오려 하겠습니까.”(모 정유업체 과장)
제조업, 서비스업 종사자의 경우 임금에서 야근, 특근 등 수당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 쉽사리 유연근무를 할 수 없다. 노동시간을 줄이면 금전적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기 때문. 한 자동차업체 관계자는 “매달 100만원을 더 받기 위해 매일 2시간씩 더 일하고 주말에도 13시간씩 일한다. 수당이 임금의 40%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유연근무제를 하는 건 꿈만 같은 일”이라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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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 눈치 보이고, 인사고과 불이익 꺼림칙하고
‘해외파’는 되는데 ‘토종’은 안 되는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야근문화’가 개선되지 않는 한 시차출퇴근제를 비롯한 유연근무제가 정착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한 아동가족학과 교수는 “학창시절 야간자율학습을 하면서 늦게까지 앉아 있는 것이 효율적이란 인식을 갖게 된 탓도 있다”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노동시간이 가장 길지만 노동효율성은 가장 낮은 이유를 다시금 생각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앞서 언급한 사례처럼 인사고과상의 불이익을 우려해 유연근무제 이용을 꺼리는 경우도 있다.
반면 외국계 기업이 유연근무제에 적극적일 수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외국계 기업은 기본적으로 직무 단위로 업무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노동연구원 황수경 연구위원은 “1000명을 고용하면 1000개의 업무가 존재해 직무에 따라 임금을 주지만, 한국과 일본은 협업이 많은 데다 팀별로 일을 처리하는 경우가 많아 조직원이 개별적으로 움직이는 게 쉽지 않다”고 분석했다. 마찬가지로 다른 기업과의 파트너십 때문에도 업무 시간을 조정하기 어렵다. 업무 실적보다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업무를 처리하는 한국의 조직문화가 변하지 않는 한 유연근무제 도입은 요원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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