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의원들이 12월31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의장석을 둘러싸고 한나라당의 예산안 처리를 규탄하고 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예산전쟁의 결과, 승자는 공화당이 아니라 클린턴이었다. 이는 클린턴이 치밀하게 여론을 관리해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든, 즉 홍보전에서 공화당을 압도한 덕분에 거머쥘 수 있었던 승리였다. 여론에서 클린턴이 앞서게 된 여러 이유 중 두 가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공화당을 이끌던 하원의장 뉴트 깅리치의 패착이다. 다른 하나는 대통령이 예산전쟁에서 발을 뺀 점이다.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클린턴과 깅리치 등은 암살된 이스라엘 총리 라빈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뒤 깅리치가 푸념을 털어놓았다. 기자들과 식사하면서 귀국할 때 대통령 전용기 안에서 클린턴에게 수모를 당했다고 말한 것이다. 자신은 전용기 뒤쪽에 앉아 25시간 동안 클린턴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한 번도 없었으며, 전용기에서 내릴 때도 후문을 이용하는 홀대를 당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런 수모 때문에라도 예산협상에서 더욱 단호히 대응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강경 일변도 美 공화당 결국 백기
언론은 이를 ‘울보 뉴트(Cry Newt)’라는 제목으로 다뤘다. 깅리치의 푸념이 징징거리는 꼴이라는 관점이었다. 백악관이 여기에 기름을 부었다. 클린턴과 깅리치가 다정히 담소를 나누는 사진을 재빨리 언론에 배포한 것이다. 졸지에 깅리치는 거짓말쟁이가 되고 말았다. 깅리치의 인기는 곤두박질쳤고, 이는 예산전쟁에서 공화당에 안 좋은 영향을 미쳤다.
“다른 사람이 옥신각신할 때 대통령이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야 합니다.”
딕 모리스가 예산전쟁과 관련해 클린턴에게 조언한 내용이다. 다시 말하면 대통령답게 행동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논리다. 보스니아 폭격과 그 결과 얻어낸 정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협정 체결, 교황의 미국 방문 등이 예산전쟁을 둘러싼 치고받기식 이전투구에서 벗어난 ‘대통령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보스니아 사태 해결에 대통령이 적극 나선 것이 결정적이었다. 여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클린턴은 보스니아에 2만명의 병력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의 파병으로 보스니아 내전은 일거에 멈춰 섰다. 이로써 미국의 지도력이 다시 입증됐다. 대통령이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한 것으로 비치는 건 당연했다. 그 결과 클린턴의 지지율은 치솟았다.
클린턴이 정부의 일부 부처가 문을 닫아야 하는 극한 대결 속에서도 예산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이 같은 치밀한 홍보전략 덕분이었다. 예산전쟁에서의 승리는 1996년 클린턴이 재선에 성공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반면 균형예산에 대한 압도적인 여론 우위만을 믿고 강경 일변도로 나간 공화당은 예산전쟁에서 백기를 들어야 했다. 또 연이은 대선 패배라는 굴욕을 감수해야 했다.
2009년 12월 대한민국에서도 예산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핵심 쟁점은 4대강 사업 예산이다. 4대강 사업에 대해서는 여론의 60~70%가 반대하고 있다. 삭감을 원하는 여론조사는 즐비하다. 그런데 4대강 사업 예산을 삭감하려는 민주당 등 야당이 예산전쟁에서 수세에 몰리면서 사실상 패배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일까. 그 해답이 바로 앞서 언급한 클린턴의 예산전쟁에 있다.
12월31일 한나라당 예산결산특위 의원들이 회의장을 본청 245호실로 긴급 변경하고 예산안을 처리하려 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진입하려는 민주당 의원들을 경위들이 막고 있다.
대한민국의 예산전쟁에서도 민주당이 미국 공화당의 우를 범했다. 4대강 사업 예산에 대한 여론의 반대가 강하다는 사실만 앞세워, 예산전쟁에서 매우 단편적이고 경직된 자세만을 보였다. 예산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여론을 잘 관리해야 하는데, 그 점에서 주의와 노력이 부족했다. 항전 모드도 아니고 타협 모드도 아닌, 어쩌면 전략이 아예 없었다고 해야 할 정도로 어설펐다.
민주당 너무 한가한 모습
반면 여권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제1야당 대표가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됐다는 보도는 백악관이 언론을 활용해 깅리치를 거짓말쟁이로 만든 일을 연상케 한다. 이 대통령은 정파 간 싸움에서 벗어나 명실공히 ‘대통령다운’ 행보를 보여줬다. 서민의 삶이나 경제현장을 찾고, 국제무대를 열심히 누비고 다녔다. 특히 아랍에미리트(UAE)에서 한전 컨소시엄이 원자력발전소 건설 사업을 따내는 ‘그림’은 가히 압권이었다. 탁월한 연출(stagecraft)이었다. 대통령이 쇼를 했다는 말은 협량한 트집 잡기로 보였다. 12월30일에는 용산참사도 해결했다.
대통령이 국익을 위해 열심히 뛰는 모습의 효과는 대단했다. 원전 수주 직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이 대통령의 지지율이 급등한 것으로 조사됐다. 그의 지지율은 전주 대비 12.1%p 상승한 53.1%를 기록했다. 대통령답게 행보하는 모습, 정쟁에서 벗어나 일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여준 것에 대한 여론의 호응이 수치로 증명된 셈이다.
이런 판에 민주당의 대응은 활력이 없었다. 4대강 사업 예산 불가만을 외쳤다. 여론을 안고 가려는 어떤 노력도 펼치지 않았다. 그러다 대통령이 ‘준예산’을 거론하자 움찔했다. 그 여파로 당내 갈등도 깊어졌다. 어떻게 보면, 민주당의 당내 리더십은 이미 붕괴된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의 예산전쟁에서 공화당이 범한 우를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민주당은 10·28 재·보궐선거(이하 재보선)로 인해 변화의 기회를 다시 흘려버렸다. 수도권 선거에서 승리함으로써 이대로 가도 승산이 있다는 안이한 판단을 내린 것 같다. 아무리 우호적으로 봐도, 선거에서 승리했다는 결과 외에 민주당이 느긋해할 이유는 거의 없다. 정당 지지율이 앞서는 것도 아니고, ‘경쟁력 있는(relevant)’ 광역단체장 후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국민참여당, 진보신당 등 세력분열 및 후보경쟁이 불가피하다. 그런데도 연합정치에 대해서도 미온적, 아니 부정적이다.
2009년 예산전쟁에서 민주당은 완패했다. 재보선 이후 오만해져 어영부영한 대가다. 일모도원(日暮途遠)에 서산일락(西山日落)이라, 해는 저무는데 갈 길은 멀어 보인다. 어느 학자가 말했듯, 야당의 집권은 대부분 그들이 잘해서가 아니라 여권이 잘 못한 결과다. 그래도 지금의 민주당은 너무 한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