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이나 마음은 외양의 배후가 아니라 하나의 중층구조로 형과 연계돼 있다. 그리하여 화가가 어떤 인물을 그려낼 때 외양인 형을 올바로 포착해낸다면, 이 형과 구조적으로 연계된 내적 요소 역시 자연스럽게 화면 위로 끌어올려져 영(影)으로 반영된다.
이를 전신사조(傳神寫照·정신을 전달함) 혹은 사심(寫心·마음을 그려냄)이라고 하는데, 한국 초상화에서는 이렇듯 형에서 이끌어낸 영의 표현을 궁극의 목표로 삼아 인물의 모습을 실물과 꼭 닮게 그려냄으로써 그 마음까지 오롯이 담아내려 했다.
한국 초상화의 원류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묘주인 초상화에서 찾을 수 있지만,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대부분 조선시대 작품이다. 그 유형으로는 조종(祖宗·임금의 조상)이 영구(永久·무한히 이어짐)하길 바란다는 의미의 어진(御眞·왕의 초상), 후손이나 제자들이 선조나 스승의 진영을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제작한 사대부상(士大夫像), 국가에 공헌한 인물들을 본받게 하고자 왕이 하사한 공신상(功臣像), 노대신이 기로소(耆老所·원로 기구)에 든 것을 경축하는 기로도상, 사찰에서 받들던 승상(僧像), 여인상 등이 있다.
초상화의 유형별 대표작을 소개하면서 역사와 문화를 살펴보기로 한다.
1-1 ‘연잉군 초상’ 안면세부 박동보 필, 1714년, 비단에 채색, 183×87cm, 보물 제1491호,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1-2 ‘영조 51세 어진’ 안면세부 조석진과 채용신 필, 1900년 이모, 비단에 채색, 203×83cm, 보물 제932호,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2-1 ‘김시습 초상’ 작자 미상, 조선 중기, 비단에 채색, 72×48.5cm, 보물 제1497호, 부여 무량사 소장 2-2‘김시습 초상’ 안면세부
왕의 초상 중에는 영조의 변화된 초상을 살피는 것이 흥미롭다. 궁중에서 가장 하급직인 무수리 신분의 숙빈(淑嬪) 최씨의 몸에서 태어난 연잉군(1694~1776)은 초상화가 그려질 당시 세자 신분이 아니었으며, 자신을 지지하는 노론세력과 당시 세자이던 장희빈의 아들(훗날 경종)을 지지하는 소론세력의 극심한 대결 속에서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
초상화에 나타난 연잉군의 모습(그림1-1)은 눈초리가 올라가고 하관이 빠른 길쭉한 얼굴인데, 젊은 나이인데도 패기가 보이지 않고 신중하면서도 온유한 표정이며 어딘지 울적한 기색이 감돈다. 이어 왕위에 오른 뒤의 모습(그림1-2)을 살펴보자. 조선의 역대 왕 가운데 재위기간이 가장 길고 각 방면에 재흥의 기틀을 마련한 영조는 홍기 가득한 정력적인 안색을 띠고 있다. 노년에 접어든 영조의 모습에서는 더 이상 왕자 시절의 소심하고 조심스러운 표정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의 외모는 이제 자신만만하고 권위적인 인상으로 바뀌어 있다.
2. 고뇌하는 천재의 내면세계, 김시습 초상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은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은 스물한 살 때,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에 분개해 책을 모두 태워버린 뒤 승려가 됐다. 각지를 떠돌며 방황하던 그는 표리부동한 세상인심을 비웃으며 자신을 학대했다. ‘네 모습은 지극히 미약하고 네 말은 분별이 없으니 구렁 속에 빠져 마땅하다(爾形至 爾言至大 宜爾置之丘壑之中).’ 김시습은 자신의 삶 자체를 가차 없이 질타하는 이런 찬문을 자화상에 남겨놓았다. 아쉽게도 그의 자화상은 전해지지 않지만, 현재 부여 무량사에 보관돼 있는 초상(그림2-1)에서 고뇌로 충만한 비장한 내면세계를 발견하게 된다.
3 ‘윤두서 자화상’ 윤두서 필, 18세기 초, 종이에 담채, 38.5×20.5cm, 국보 제240호, 개인 소장 4-1 ‘운낭자 초상’ 안면세부 4-2 ‘운낭자 초상’ 채용신 필, 1914년, 비단에 채색, 120.5×6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시대의 자화상은 극히 드물다. 스스로에 대한 고민과 자의식, 감성 표현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자화상 제작이 당시로선 파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자신을 ‘그릴 가치가 있는 인물’로 인식하는 경우가 드물었을 뿐 아니라, ‘정밀한 사생능력’을 갖춘 사람도 많지 않았다. 회화를 통한 감성 전달은 조선시대 몇몇 작품에서만 발견될 뿐이다.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함께 조선 ‘삼재’라 일컬어지는 공재 윤두서(1668~1715)는 풍속화는 물론 자화상에서도 독보적인 작품을 남겼다. 대결 의식을 갖고 자신을 마주한 듯 그려진 이 자화상(그림3)은 종이와 먹을 위주로 안면을 사출(寫出·그대로 베껴냄)한 작품이다. 윗부분이 생략된 탕건, 정면을 응시하는 눈, 꼬리 부분이 치켜 올라간 눈썹, 적당히 힘줘 다문 두툼한 입술에서 윤두서의 엄정한 성격과 조선 선비의 옹골찬 기개를 읽을 수 있다.
4. 미인도 같은 의기의 모습, 운낭자 초상
몇 안 되는 우리나라 여인 초상화 중 대표 작품인 ‘운낭자 초상’(그림4-2)은 벌거벗은 아이를 안고 있는 젊은 여인의 전신입상이다. 운낭자는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을 때 27세의 나이로 의열을 보인 의기(義妓)다. 그는 당시 난군이 휩쓸고 간 군청에서 군수인 정씨 부자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러주고, 군수 아우의 부상도 치료해줬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은 그 충절을 가상히 여겨 기적(妓籍)을 삭제해주고 전답을 줘 표창했다.
초상화에서 운낭자는 머리를 단정히 빗어 넘겨 낮게 쪽을 졌으며, 조선 말기 여인의 평상복 차림을 하고 있다. 저고리의 길이가 짧아 치마허리 사이로 풍만한 유방이 보인다. 이 초상화는 안면을 정밀하게 묘사하기보다 여인의 몸짓에서 드러나는 여성다운 곡선, 치마의 대칭 주름이 만들어내는 물결치는 듯한 율동감, 안고 있는 아기의 포동포동한 몸체와 즐거운 표정에서 느껴지는 평화로움, 땅까지 끌리는 긴 치마 틈새로 내비치는 버선발 등을 통해 전체적으로 포근한 인상을 준다.
한편 운낭자가 기녀 출신임에도 얼굴 표정(그림4-1)은 굳건하면서도 담담한데, 이는 의열을 강조하고자 화가 채용신이 여성성이 덜 감지되게 의도적으로 설정한 것으로 풀이된다.
5. 구국의 승려, 사명대사상
사명대사 유정(1544~1610)은 나라가 어려울 때 구국 위업을 이뤘을 뿐 아니라, 수려한 문장과 유학 지식까지 갖춘 걸출한 선승이었다. 대구 동화사에 있는 ‘사명대사상’(그림5)은 화폭이 떨어져나간 부분이 많은데도 우리나라 승상의 진수를 제대로 보여주는 걸작이다. 촘촘한 모시에 그려진 이 그림은 얼굴을 오른쪽으로 약간 돌린 7분면의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좌상인데, 오른손은 불자(拂子·속세의 때를 모두 털어준다는 상징물)를 쥐고 있으며, 왼손은 무릎에 올려져 있다. 앞을 직시하는 듯한 형형한 눈, 단아한 콧날, 굳게 다문 붉은 입술에서 적진을 찾아가 담판 지을 만한 배포를 지닌 사명당의 면모를 읽을 수 있다.
6. 올곧은 심지의 무관, 이중로 초상
5 ‘사명대사상’ 작자 미상, 1796년 이전, 모시에 채색, 122.9×78.8cm, 동화사 성보박물관 소장 6-1 ‘이중로 초상’ 안면세부 6-2 ‘이중로 초상’ 작자 미상, 1624년경, 비단에 채색, 171.5×94cm, 경기도박물관 소장
이중로는 이듬해 인조반정 때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일어난 이괄의 난을 평정하다가 사망했다. 당시 단검을 들고 적과 접전을 벌이다 혼자 6, 7명을 죽이고 힘이 다하자 여러 장수에게 “나는 왕의 신하다. 적으로 하여금 내 머리를 갖고 돌아가게 해선 안 된다”고 외친 뒤 깊은 물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국조인물고’). 이중로의 이러한 열렬 장부로서의 충렬과 의용은 그 후 무장들의 귀감이 됐다. 그의 초상화(그림6-1)는 47세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젊은 미장부의 얼굴인데 특히 매섭고 형형한 눈빛, 꼭 다문 입매에서 무장으로서의 결단력과 단호한 성품을 짐작할 수 있다.
초상화의 세계에서 우리는 이처럼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가 시대의 인물을 마주하고, 그들이 지닌 모습과 성정(性情)을 관조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이 처한 시대적 정황을 목도하고 족적을 확인하며 그들의 정신세계를 공유할 수 있다. ‘초상화’라는 장르가 지닌 매력이자 존재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