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9년 이상정의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사림에서 건립한 고산서원(안동 소재).
여행은 꼭 뭔가를 발견하러 가는 길만이 아니다. 일상이 힘들고 삶을 돌아보고 싶을 때, 스스로 마음을 다독여야 할 때도 여행은 훌륭한 처방전이다. 버거운 일상을 외면하지 말고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주자. ‘빨리빨리’와 함께 살아온 우리에게 스스로를 만나는 시간은 꼭 필요하다.
고택에서의 귀한 하룻밤
이럴 때 안동은 참 좋은 곳이다. 퇴계 이황과 서애 유성룡, 병산서원과 탈춤, 하회탈과 각시탈, 간고등어와 헛제삿밥 등 안동이라 하면 수많은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이 중에서도 안동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전통을 이어가는 일상의 모습이다. 지역 전체가 박물관인 안동은 어디에서나 선조들의 숨소리가 느껴진다. 의(義)와 예(禮)를 중요하게 여기며 대쪽 같은 절개로 학문과 풍류를 즐겼던 옛 선비들의 정신. 곧게 살아간 선조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마음가짐도 생각도 조금씩 달라진다.
스스로를 위한 특별한 여행을 떠나보고 싶다면, 안동에서도 고택에서의 하룻밤을 추천한다. 오랜 세월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많은 이야기를 담고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고택.
<B>1</B> 고즈넉한 치암고택. <B>2</B> 치암고택에서는 다도를 배울수 있다. <B>3</B> 단정하고 깔끔한 것이 한 폭의 풍경화 같은 향산고택.
안동에서 묵을 수 있는 고택은 약 스무 곳. 그중에서 이번에 찾은 곳은 치암(恥巖)고택으로, 시내에서 가까우면서도 안동의 정신을 잘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정갈한 사랑채, 우뚝한 선비의 기상을 보여주는 누마루는 물론 담 아래의 꽃에도 주인의 정성이 가득 깃들어 있다. ‘치암’은 이 집 주인이던 이만현 선생의 호로 ‘부끄러움의 바위’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만현 선생은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이에 격분해 세상을 떠난 안동의 선비로, 선비가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부끄러워서 어떻게 살겠느냐며 아호를 ‘치암’이라 지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고택에는 방마다 교훈이 될 만한 내용이 적혀 있어, 올곧은 그분의 뜻을 다시 새기게 된다. 또 고택 오른편에는 군자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라는 잠룡담도 있다. 잠룡담은 현재 안동시 시도민속자료 제11호로 지정돼 있다. 고택에 들어가면 넓은 잔디밭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잔디를 가로질러 가면 안채가 나온다. 사랑채의 왼쪽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으로 돼 있고, 오른쪽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인 팔작지붕으로 이어져 있다. 뒤로 가면 옹기종기 장독대가 모여 있어 친구 집에 온 것처럼 편안하다.
대쪽처럼 곧은 고택, 문을 열면 한 폭의 풍경화가
아름다운 기와의 곡선과 수많은 세월을 견뎌왔을 마루를 밟는 느낌은 고택에서만 가질 수 있는 선물이다. 아무런 장식도 없고 못질도 보이지 않지만, 그렇게 탄탄할 수가 없다. 오래된 세월의 결만 남은 나무들은 어찌 그리 멋스러운지. 고택을 지긋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작은 파장이 인다.
밤에는 가야금을 배우러 온 학생들 덕분에 또 다른 낭만이 흘렀다. 함께 간 친구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오랫동안 마음속 깊이 숨겨놓았던 이야기를 하나하나 꺼냈다. 마치 치유의 시간처럼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며 상처받아온 마음을 서로 어루만져주었다. 고택은 누구에게나 이야기를 하게 만드는 특별한 힘이 있는 듯했다.
치암고택 바로 앞에는 치암고택만큼 고개가 숙여지는 고택이 있다. 바로 3대에 이어진 독립운동 가문의 고택인 향산고택(響山古宅). 향산고택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울분에 단신으로 항거하다 순국한 향산 이만도 선생의 옛집이다. 고택은 단출하다. 군더더기 없이 단정하고 깔끔하다. 향산고택에서는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보이는 왼쪽 방에서 하룻밤 묵었다. 방은 아담했지만 결코 느낌은 작지 않았다. 안동에 대한 수많은 책, 세월을 그대로 담고 있는 고서가 작은 방을 빼곡히 메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을 열면 나타나는 한 폭의 그림. 담장과 나무, 그리고 귀여운 강아지가 등장하는 풍경화. 마침 바람이 불어 수국에서는 꽃잎이 수줍게 떨어졌다. 바람에 날리는 꽃잎에 답답하고 힘든 마음들도 하나씩 떨어뜨려 보냈다.
강호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농암종택
안동에서 손꼽히는 고택 중 하나는 농암종택. 농암종택은 ‘어부가’로 잘 알려진 농암 이현보 선생이 태어난 집으로, 지금까지 직계 자손이 650여 년간 대를 이어 살고 있다. 긴 역사만큼이나 놀라운 것은 농암종택 주변 자연환경. 농암종택 앞에는 신비롭기 그지없는 청량산 줄기가 만들어내는 기기묘묘한 협곡을 끼고 낙동강이 흐르는데, 이 경치가 뭐라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아름답다. 안동 문화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곳이라고나 할까. 그 앞에 서면 강호의 아름다움에 취해 자연에서 즐기며 생활한 농암 선생의 삶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농암종택에 가면 ‘예던길’도 걸어봐야 한다. 예던길은 이현보 선생의 17대 종손인 이성원 씨가 ‘가다’의 예스러운 표현인 ‘예다’를 써서 이름 붙인 길로, 퇴계가 걸었던 오솔길이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예던길을 한번 찾은 이는 또 찾고 만다.
가만히 차 한잔을 가지고 농암종택 앞 은빛 모래사장에 앉아본다.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과 단애를 바라보니, 그동안 쌓아온 걱정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머릿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든다. 바로 이것이 안동의 고택으로 여행을 온 이유였구나, 새삼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렇게 보내는 고택에서의 시간은 ‘하루’를 값지게 만들어준다. 고택에서 밤을 지내고 나니, 언제 하루를 이렇게 깊이 있게 편하게 보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고택에서의 멋진 하룻밤. 앞으로도 일상이 힘들고 지치면 이곳을 찾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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