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가지 핸디캡
“뜨악!”
중2 때였나. 어딘가 따끔따끔한 느낌에 비몽사몽 눈을 떴다. 눈곱 떼고 찾아낸 통증의 진원지는 팔뚝. 온 팔뚝이 손톱자국과 피딱지로 엉망이었다. 얼얼함과 따가움, 간질간질함이 뒤엉킨 낯선 감각. 누가, 왜, 잠든 사이 내 팔뚝을 할퀴고 간 걸까.
“긁을까 말까.”
전날 체육시간. 배구 토스 시험에 대비하느라 45분 내내 땡볕 아래서 땀을 뻘뻘 흘렸다. 햇빛만 보면 참을 수 없는 가려움과 함께 오돌토돌 좁쌀이 돋는 X랄 같은 내 피부. 그나마 깨어 있을 때는 제어가 가능하지만 잠든 동안은 나도 내 손을 어찌할 도리가 없다. 울긋불긋한 팔뚝의 흔적은 마음껏 긁어대고 맛본 시원함의 대가.
“사계절 코감기?”
내 체신을 갉아먹는 불청객은 또 있다. 바로 밥 먹을 때면 사정없이 흐르는 콧물. 때로는 폭포처럼, 때로는 수돗물처럼 콸콸, 졸졸, 닦고 막고 뽑아내도 끝이 없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식사시간은 먹는 밥 반, 눈칫밥 반. 언제부터인지 기억도 안 난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나는 코 흘리는 아이였다.
“사람 코인가, 루돌프 코인가.”
점심 8~9번, 저녁 12번. 식사를 하면서 코를 훔친 횟수다. 그래서 내 코 언저리는 늘 불그스름하다. 겨울에는 콧물이 더 많아지는데, 이때는 코가 너덜너덜해져 수시로 로션과 연고를 덧발라야 한다. 자연히 휴지에도 집착하게 된다. 교양인답지 못한 행동이지만, 화장실이나 커피전문점 등 휴지가 비치된 곳에서는 꼭 여분을 챙긴다. 휴지가 떨어져 망신스러운 상황을 겪으면서 생긴 습관이다.
#병원 문을 두드리다
“알레르기는 그냥 체질이야. 선크림 팍팍 바르고 온몸을 무장하는 수밖에 없어. 밥 먹을 때 흐르는 콧물은 좀 참아봐. 코가 아프니까 그냥 닦기만 하든지.”
불편하고 창피했지만 병원을 찾은 적은 없다. 어린 시절 가까운 어른들이 한 말을 성전처럼 받들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살았다. 못 견딜 정도로 아픈 것도 아닌 데다 약이 없다는데 무엇을 어쩔 것인가. 햇빛은 가리고 콧물은 나오는 대로 거두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차, 정식 진단을 받을 기회가 왔다.
“이번에 제대로 진단받고 간단하게 기사 쓰면 좋잖아. 원고료도 줄게.”
‘주간동아’ 선배 기자의 제안. X인지 된장인지 판단할 겨를도 없이 “예!”라고 답했다.
‘설득의 달인’의 설득이 이런 거구나…. ‘첨단 광원검사’ ‘바로 너를 위한 검사 프로그램’ ‘알레르기의 혹독한 대가’ 등 무차별로 쏟아지는 유혹의 단어들에 혼이 쏙 빠졌다.
다음 날 찾은 서울대 병원. 막상 검사를 받으려니 가슴이 벅차온다. 그간의 불편함을 떨쳐낼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오늘 내가 받을 검사는 ‘항원검사’ ‘코 내시경’ ‘부비동 X레이’ ‘광원검사’ 4가지. 우선 알레르기내과 민경업 교수에게 증상에 대한 상담부터 받기로 한다.
민경업 교수 : “피부 증상이 어때요?”
나 : “빛에 노출된 모든 부위가 가려움증과 함께 달아올라요. 심하면 좁쌀도 돋고요. 성인이 된 뒤부터는 철저하게 가리고 다녀서 그럭저럭 괜찮았어요.”
민 교수 : “코는 어때요? 아침에 일어날 때 재채기와 함께 콧물이 많이 나지 않나요?”
나 : “시간과 상관없이 주로 식사할 때 콧물이 많이 나와요. 기침은 없고요. 아침에 코막힘은 있지만 콧물은 별로 나지 않아요.”
민 교수 : “한식, 양식 다 그런가요? 혹시 맵거나 뜨거운 거 먹을 때만 그런 건 아니고요?”
나 : “음식 먹을 때면 종류와 관계없이 콧물이 줄줄 흘러요. 어제 돈가스 먹을 때도 그랬고 주스 마실 때도 그랬어요.”
민 교수 : “알레르기 비염은 아닌 것 같네요. 알레르기 비염은 주로 이른 아침 재채기와 함께 맑은 콧물이 나거든요. 이설 기자의 말대로라면 식이성 비염 같아요. 후각이 음식에 예민하게 반응해서 콧물이 나오는.
<b>1</b> 검사 전 상담부터 받았다. <b>2</b> 항원검사. 50여 가지 대표 원인물질에 대한 반응도를 테스트한다. <b>3</b> 코 내시경. 오른쪽 코에 부종이 있었다.
#항원은 어디에?
알레르기의 원인물질은 무궁무진하다. 하나일 수도 있고 여럿일 수도 있다. 항원검사는 대표 원인물질에 대한 반응을 테스트하는 것. 콧물의 원인을 찾기 위해 알레르기검사실 이정아 선생에게 등짝을 내줬다. 그는 등에 순서대로 50가지 시약을 스포이트로 퐁퐁 뿌린 뒤 바늘로 콕콕 찔렀다.
“깨끗하네요. 반응하는 항원이 없습니다.”
15분이 지나 나온 결과. 꽃가루, 곰팡이, 진드기, 개털, 옥수수, 고추…. 어느 것에도 무반응이었다. 거울에 슬쩍 비춘 등엔 머쓱한 바늘자국뿐. 실망한 마음에 물었다.
“여기에 없는 다른 물질이 원인일 가능성도 있지 않나요?”
“그럴 가능성은 낮아요. 일단 알레르기 체질이면 여러 가지가 동시에 나와요. 알레르기가 있다면 한두 개는 걸리는 거죠. 거꾸로 말해서, 50여 가지 대표물질에 반응하지 않았다면 다른 것에도 무반응일 가능성이 높은 거고요. 무반응으로 나오는 분도 많습니다.”
코 내시경과 부비동 X레이까지 마친 뒤 민 교수가 내린 종합 진단은 식이성 비염. 예측한 대로였다. 코 내시경과 부비동 X레이 결과, 부비동엔 이상이 없었지만 콧속에는 부종이 있었다.
“보통 맵거나 뜨거운 걸 먹으면 콧속에서 히스타민이 나와 콧물이 흘러요. 식이성 비염은 음식에 유난히 코가 예민한 것인데, 원인이나 발병 규정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감정적 스트레스, 호르몬 변화 등 여러 원인이 있죠. 약 처방으로는 하루 정도 콧물을 멈추게 하는 항히스타민제가 있습니다. 중요한 날에만 복용하는 임시 처방인 셈이죠.”
설명을 듣고도 마음 한구석이 개운치 않다. 원인을 모르니 똑떨어지는 치료법이 없기는 알레르기 비염과 마찬가지. 증상만 돌볼 뿐 근본치료는 어려운 것이다. 머리를 굴리다 보니 내시경 때 지나간 호스 자리가 더 얼얼하다. 시큰거리는 코를 부여잡고 광원검사실로 향했다.
<b>4</b> 부비동 X레이. <b>5</b> X레이 판독 결과 부비동에는 이상이 없었다. <b>6</b> 자외선과 가시광선에 대한 민감도를 측정하는 광원검사.
햇빛 알레르기가 생긴 뒤 내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러다 말겠지….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증상은 점입가경, 갈수록 가관이었다. 맑은 날이면 한숨이 나오고 흐린 하늘을 보면 마음이 편했다. 하다못해 신문, 전단지 같은 가리개라도 없는 외출은 꿈도 못 꿨고, 야외에 나가도 특수 선크림으로 칠갑한 채 파라솔 아래에 얌전히 머물러야 했다. 집에서도 영화 ‘디 아더스’ 속 가족처럼 커튼 속에 꼭꼭 숨어 살았다. 빛에서 멀어지니 마음도 칙칙해졌다.
“엉덩이에 물집이 생기거나 자국이 날 수 있는데 괜찮겠어요?”
광원검사는 한마디로 일부러 피부에 빛을 쏘여 반응을 살피는 것. 사실 이 검사는 한 달에 한두 명 받는다고 한다. 햇빛을 싫어하지만 정복할 방법을 갈구하는, 지피지기 백전백승의 마음으로 오는 이들이 대부분. 나 또한 그런 마음으로 눈을 가리고 기계에 엎드렸다.
검사할 항목은 자외선과 가시광선 2가지. 검사할 때는 괜찮았는데 다음 날이 되니 엉덩이가 화끈거렸다. 왼쪽 엉덩이 3칸3줄 9개 칸으로 찍힌 인장. 칸마다 9단계로 자외선을 쪼이는데, 이 결과를 보면 민감도를 알 수 있다. 모서리가 선명한 칸을 기준으로 홍반을 만드는 자외선 양을 살피는 것. 등은 깨끗했다.
“햇빛 알레르기 임상 진단은 모호한 부분이 있어요. 날씨와 장소에 따라 빛의 세기가 다르고 로션, 땀, 먼지 등 다른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거든요. 3, 4번째 칸부터 모서리가 선명하니 햇빛에 평균보다 민감한 피부네요. 심한 분들은 첫 번째 칸부터 심하게 붉거나 습진이 일어나기도 해요.
치료는 장갑, 모자, 옷 등으로 피부를 보호하는 게 최선이에요. 피부가 가렵고 붉게 변하면 항히스타민제를, 발진에는 스테로이드제를 복용하면 증상이 잦아들죠. 이 역시 대증적인 치료이기에 한 번만 복용해도 증상은 가라앉지만 완치는 불가능합니다.”
#“피가 모자라요…”
한방(韓方)은 어떨까. 알레르기를 전문으로 치료하는 서울 강남 갑산한의원. 이곳 이상곤 원장은 내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추위와 더위 중 어느 쪽에 더 약한지, 땀은 얼마나 흘리는지, 우유가 몸에 잘 맞는지, 생리 주기는 어떤지 등 문제 부위뿐 아니라 몸 전반을 꼼꼼히 살폈다.
“한방은 질병을 내면의 문제로 봅니다. 외부 환경이 아닌 균형이 깨진 내 몸에 원인이 있다는 것이죠. 알레르기도 몸 안의 뭔가가 넘치거나 부족하기에 사소한 물질에 면역체계가 과민 반응하는 것이고요.”
상담과 진맥에 이어 코 내부를 살핀 결과 내 체질은 ‘혈허유화(血虛流火)’. 전반적으로 피가 모자라 화가 밖으로 넘친다는 것이다. 이 원장은 코와 피부가 예민한 것도 모두 혈액이 모자라기 때문이라고 했다.
“코의 기능은 온도와 습도 조절이에요. 코 안 점액이 그 일을 하는데, 그게 부족하면 코가 민감해지죠. 밥을 먹을 때 음식물이 부서지면서 나오는 물질에도 과민 반응하는 것이고요. 알레르기 비염은 아니고 과민성 비염 정도로 진단할 수 있습니다. 피부 역시 햇빛이 들어오면 멜라닌이 중화를 하는데, 멜라닌 분비량이 적으면 민감해져요. 화가 밖으로 나가면서 피부 신경도 예민해지고요. 두 가지 현상 모두 혈액이 부족한 탓이니, 혈액을 보충하고 화를 식히는 약을 복용하면 좋습니다.”
상담을 마친 뒤 뜨뜻한 침대에 누워 침을 맞았다. 머리에 두 방, 손목에 두 방, 코와 입가에도 두 방씩. 신기하게도 코에 침을 꽂자 막힌 코가 뻥 뚫렸다. 아쉽게도 그 시원함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지만. 레이저로 염증을 삭히고 한방 김으로 코 온도를 높이는 ‘코 스파’도 받았다. 아무렇게나 비틀어 풀어젖히던 코가 난생처음 누린 호사였다.
“서양의학이 증상을 없애는 데 주력한다면 한의학은 전체 증상을 종합해 원인을 향해 달립니다. 혈액을 보충하고 화를 식히면 열이 피부 속으로 단단하게 스며들어 차츰 증상이 좋아질 거예요.”
#‘알레르기 해방의 날’
“역시 공주 체질이구나.”
구름 사이로 비친 햇빛 줄기나 실내에 틈입한 손바닥 크기의 볕에도 유난을 떠는 나. 그늘 따라 널뛰기를 하는 나. 그런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눈초리에 “나, 햇빛 과민성 피부예요”라고 말하면 십중팔구 이런 반응이다. 하물며 유난을 참다못한 엄마도 “내놓고 다니면 피부가 적응한다”며 햇빛 쨍쨍한 사지로 손을 잡아끌 정도.
‘낮에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집에서도 블라인드 쳐놓고. 밤에만 돌아다니는 부엉이도 아니고.ㅜㅜ’ ‘운동을 좋아하는데 밖에서 뛰면 온몸이 부어오르고 입술이 파래져요. 이래서 군대는 갈 수 있는지’ ‘6년째 고생하면서 나름 터득한 방법이 있어요. 햇빛을 날 잡아서 받으세요. 매일 같은 부위에 햇빛을 쬐면 처음엔 괴롭겠지만 어느 순간 검게 타면서 그 부분은 괜찮아집니다. 물론 과학적 검증 없는 저만의 요법입니다’….
검색창에 ‘햇빛 알레르기’를 쳤더니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성장기 이후 발현해 증상이 사라지지 않는 이들이 대부분. 피부가 달아오르고 물집이 잡히는 중증을 토로하는 글들. 나는 약소한 편이었다. 병원과 한의원을 오가다 지친 이들은 저마다의 요법을 내놓고 있었다. 못 미더운 마음에도 거금을 들여가며 하나둘 요법을 시도할 ‘어둠의 자식들’을 떠올리니, 동변상련에 마음이 짠했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작동하는 것들이 있다. 노력으로 안 되는 것들이 있다. 유전자가 대표적이다. 키나 얼굴처럼 돈으로 해결되는 것도 아닌 관리의 질병. 그 최고봉에 알레르기가 있다.
하지만 거의 완치했다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발현하는 원인과 과정을 모르듯 사라지는 이유도 불확실하지만, 건강식과 몸의 기운을 바꾸기 위한 노력의 결과라고 밝히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알레르기가 스트레스를 낳고 스트레스가 알레르기를 작동하는 악순환이었던 것 같다. 그때그때 다독였을 뿐 시위하는 몸 구석구석을 진지하게 들여다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럭저럭 살 만했으니까. 이번 기회로 체질 개선을 하나하나 시도해볼 생각이다. 나의 요법을 비슷한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소개할 날을 꿈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