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1</B> 4월21일 국립과천과학관에서 열린 ‘과학의 날’ 기념식장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악수하는 정두언 의원(왼쪽). <BR> <B>2</B> 3월23일 미래기획위원회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회의장에 들어서는 이 대통령과 곽승준 위원장. <BR> <B>3</B> 이상득 의원이 4월 임시국회 도중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한나라당 지도부가 총력을 기울인 선거 결과치고는 참담하기 짝이 없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심판론이 주요 이슈로 부각되지도 않은 선거였기에 더하다. 따라서 이번 재보선 결과의 책임소재를 둘러싼 논란과 한나라당 내 계파별 정치적 이해관계가 맞물리면서 휴전상태인 권력다툼이 재점화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당장 경쟁력이 약한 후보를 내세운 박희태 대표 등 당 지도부가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그 화살 끝은 현재 당을 장악하고 있는 친(親)이명박계, 특히 이상득 의원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경북 경주에서 무소속 정수성 당선자에게 패한 정종복 한나라당 후보가 바로 이 의원의 최측근인 까닭이다. 그가 한나라당 후보로 결정된 이유도 이 의원이 강력히 요구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0:5 완패 한나라당 “네 탓이오”
재보선을 앞두고 터져나온 악재의 발원지도 대부분 이 의원이었다. 첫 번째가 정수성 후보 사퇴 논란이다. 선거 초반 이 의원이 정 후보에게 모 의원을 보내 후보 사퇴를 종용했다는 의혹이 불거진 것. 박근혜 전 대표는 당시 이 의원을 향해 ‘정치의 수치’라며 직격탄을 날렸고, 그 파장은 선거 결과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선거 막판 또 하나의 악재는 이 의원과 박영준 국무총리실 국무차장의 포스코 회장 인사개입 의혹이다. 지난 연말 이 의원과 박 차장이 직접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을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박 차장은 회장 후보로 거론되던 윤석만 사장을 만난 사실도 드러났다.
4월21일 박 차장은 민주당 우제창 의원이 국회에서 이에 대한 사실 여부를 묻자 박 명예회장과 윤 사장을 만난 것을 시인했다. 그러나 인사 관련 외압을 행사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반면 이 의원은 박 명예회장이나 포스코 측 인사를 만난 사실 자체가 없다고 부인한다. 어찌 됐든 이 의원은 물론, 이 의원의 최측근이자 이명박 대통령의 ‘왕비서관’으로 통하던 박 차장의 인사개입 의혹이 이번 선거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만은 사실이다.
이명박 정부가 지난 1년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허송세월하면서 국민에게 실망을 안겨준 점도 재보선 패배의 원인으로 꼽힌다. 정치개혁을 위한 개헌은 둘째 치고 공직사회, 공기업, 교육, 행정, 실업, 복지 등 전 분야에 걸쳐 시급한 개혁과제가 즐비하지만 뭐 하나 제대로 추진된 게 없다. 법안은 야당에 발목 잡히고, 정책 추진방향에 대한 정부와 여당의 의견은 제대로 조율되지 않았다.
당과 청와대의 관계도 좋지 않았다. 현 정부 들어 몇 차례 부분 개각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오히려 당청 관계가 악화됐다. 주요 부처의 장관직 진출을 노리는 당 중진급 의원들의 희망과 달리, 이 대통령이 정치인들을 철저히 배격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요즘 한나라당 의원들 사이에서는 “당청 관계를 조율하는 청와대의 정무 기능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불만이 터져나온다.
선거 직전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의 교육개혁 관련 발언에 대한 당과 정부의 비판이 거셌는데, 이는 당과 청와대, 정부 간 관계를 엿볼 수 있는 단적인 예다. 또한 이를 통해 향후 권력을 둘러싼 계파 간 주도권 다툼의 새로운 변화도 엿볼 수 있다.
곽 위원장은 정두언 의원 계파로 분류된다. 그는 지난해 정 의원이 이 의원과의 권력투쟁에서 패한 뒤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제1차관(당시 교육과학문화수석비서관)과 함께 청와대 국정기획수석비서관에서 밀려났다. ‘투쟁’에서 승리한 이상득 계파는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다. 이 의원의 보좌관 출신인 박영준 당시 기획조정비서관이 물러나는 선에서 그친 것. 정 의원 계파인 곽 위원장과 이 차관, 이 의원 계파인 박 차장은 지난 1월 함께 현역에 복직했다. 이 대통령은 계파를 떠나 이들에게 집권 1년차에 이루지 못한 개혁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라고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곽 위원장이 내놓은 ‘사교육 억제와 공교육 강화’를 위한 교육개혁은 이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다. 당시 공약을 만든 사람이 바로 곽 위원장과 이 차관이다. 두 사람은 그동안 수시로 정책을 조율했고, 정 의원은 국회에서 입법을 책임지기로 했다고 한다. 여당과 청와대, 정부 등 당·정·청 논의구조가 나름 형성돼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주도권을 빼앗긴 안병만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등 정부와 당이 가만있지 않았다. 특히 홍준표 원내대표는 당 공개석상에서 곽 위원장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앞으로 언론에 나오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 자기 분수에 충실할 것을 권고한다”고 말한 것. 또한 홍 대표는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는 미래생활과 관련된 총체적 국가 비전을 대통령에게 자문하는 기구다. 그 기구의 장은 정리된 안을 대통령에게 보고하면 그만인데, 마치 집행기관인 것처럼 언론에 나와 자기 생각을 마음대로 떠들고 있다. 그러니 국정에 혼선이 생긴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발언에는 이 대통령의 측근들과 청와대에 대한 홍 대표의 불만이 가득 녹아 있다.
친이계 내부 ‘제2의 권력투쟁’ 가능성
그러자 이번엔 정 의원이 기자와 단독으로 만난 자리에서 홍 대표를 향해 격한 발언을 쏟아냈다. “역대 어느 여당이 청와대를 대놓고 비판한 적 있느냐. 홍 대표의 퍼스낼리티(성격) 문제다. 더구나 본질적인(곽 위원장이 발언한 교육개혁 내용) 것은 제대로 알지도 못하지 않느냐. 원내대표가 법안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서 본질과는 상관없는 것을 따지는 일은 옳지 않다.”
권력투쟁에서 패한 이후 자극적인 발언을 삼가던 그간의 행보와는 사뭇 다르다. 정 의원은 청와대를 향해서도 거침없이 비판을 쏟아냈다. “제대로 된 대통령비서실 수석비서관들이라면 수시로 관계부처 회의를 소집해 논의해야 하는데,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당·정·청 간 불협화음이 발생하는 이유도 수석비서관들이 제 구실을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
정 의원은 수석비서관들을 향해 “순 엉터리”라면서 “곽 위원장은 대통령이 정한 개혁과제를 책임지고 추진하겠다고 나선 사람이다. 제발 수석비서관들이 그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곽 위원장이 비록 절차상 매끄럽지 않게 처리한 측면은 있지만, 이 때문에 개혁 추진을 미룰 수는 없다는 뜻이다.
이 같은 정 의원의 발언은 현 정부의 개혁정책을 앞장서 추진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자, 이 의원 측으로 넘어간 힘의 주도권을 빼앗아오겠다는 계산도 깔려 있는 듯하다. 때마침 이 의원은 이번 재보선 결과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다. 그렇다고 이 의원 측이 주도권을 순순히 내줄지는 미지수. 오는 10월 재보선을 전후해 정계 복귀를 노리는 이재오 전 의원도 변수다. 이런 사정 때문에 친이계 내부에서 제2의 권력투쟁이 발발할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도 높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