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앞바퀴 때문에 ‘하이휠’ ‘빅휠’이라고 불리는 ‘오디너리’. 구동바퀴의 지름을 크게 해서 속도를 빠르게 했다.
자전거를 처음 본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1896년 미국의 과학잡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은 이렇게 표현했다.
“벨로시페드(자전거의 옛 이름)가 똑바로 설 수 있는 것은 실용역학의 놀라운 업적 가운데 하나다.”
‘자전거 발명가’ 두고 독·프 원조논쟁
땅에서 두 발을 떼고 이동하거나 달리는 것은 인간의 가장 오래된 꿈 중 하나다. 촛농으로 커다란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던 이카로스는 ‘기계’로 인간의 육체를 확장해 비행에 성공한 최초의 영웅일 것이다.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의 발명왕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있다. 그는 천재답게 현재의 자전거와 놀랄 만큼 유사한 스케치를 남겼다.
남아 있는 기록에 따라 역사가들은 1790년 프랑스의 귀족 콩트 드 시브락이 만든 ‘셀레리페르’를 자전거의 시초로 본다. 이것은 놀이공원의 목마에 바퀴를 단 형상이다. 셀레리페르는 자전거에 대한 최초의 아이디어가 ‘말 없는 마차’에서 나왔음을 보여준다. 말은 충직하지만, 키우기도 쉽지 않고 도로를 더럽힌다. 무엇보다 말의 힘을 빌리는 것은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어 영웅이 되려는 인간의 욕망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그래서 독일의 명문가 귀족이던 카를 폰 드라이스는 1810년대에 ‘드라이지네’라는 2개의 나무바퀴 자전거를 공개하고 특허를 신청했을때, 바덴 대공국 특허청 감독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걷기 외의 방식으로 인간의 동력을 활용하는 것은 적합지 않다’며 특허권 인정을 거부했다. 드라이지네는 페달이 없었기에 발로 땅을 찬 힘으로 굴러갔다(도보 속도의 2배로 달렸다 한다).
여기에 1861년 ‘역사적인’ 페달을 달아 본격 자전거 ‘벨로시페드’(‘빠른 발’이란 뜻)의 시대를 연 사람이 파리의 대장장이 피에르 미쇼다. 독일이 몸체를 만들고, 프랑스가 ‘화룡점정’ 격인 페달을 다는 바람에 그러잖아도 사이가 좋지 않던 독일과 프랑스는 또 하나의 분란거리를 갖게 되었다. 전 유럽에 자전거 붐이 일어난 1890년대 초, 독일의 라이더들이 드라이스를 ‘자전거의 아버지’로 추대하자, 프랑스인들은 ‘자전거 창안자’ 대장장이 미쇼의 동상을 세우는 것으로 응수했다. 독일과 프랑스의 자전거 ‘원조’ 경쟁은 자전거 문화를 여행과 경주로 분화, 다양화하고 자전거의 기술적 발전에도 큰 도움을 줬다.
패션 브랜드의 로고에도 등장하는 ‘오디너리’는 거대한 앞바퀴 때문에 ‘하이휠(High Wheel)’ ‘빅휠(Big Wheel)’이란 애칭을 가졌는데, 벨로시페드가 영국으로 건너가 발전한 모델이다.
영국인 제임스 스탈리와 윌리엄 힐먼은 1871년 차체 전체를 금속으로 만든 하이휠 모델 ‘아리엘’을 출시해 스포츠를 즐기는 귀족 가문 자제들에게서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아리엘 클럽’은 곧 부유층의 사교모임이 됐고,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 대학은 자전거 클럽을 설치했으며 1874년에는 제1회 대학간선수권대회가 열렸다.
자전거의 과거 ‘벨로시페드’(왼쪽)와 미래가 될 수도 있는 ‘리컴번트’. ‘리컴번트’는 놀라운 속도감을 자랑하지만, 도심에서는 실용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가난한 식민지 자전거 영웅 ‘엄복동’
20세기 이후 자전거는 자동차, 오토바이와 경쟁하며 발전과 부침을 거듭해왔다. 자전거가 ‘첨단기술의 집합체’가 아니라 서민의 이동수단이 되면서 ‘얼리어답터’인 돈 많은 라이더들은 새로 나온 오토바이나 자동차로 옮겨갔다. 현재의 자전거 르네상스는 1980년대 ‘여피’로 대표되는 교육받은 상류층 사이에서 마운틴바이크와 자전거 레이싱, 트라이애슬론이 유행하면서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레저를 즐길 수 있는 여유와 잘 가꾼 육체가 현대적인 부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1903년 시작한 전설적인 ‘투르 드 프랑스’는 점점 더 국제적인 인기를 얻고 있으며, 매년 케이프타운 인근 해변에서 열리는 ‘아거스 사이클 투어’는 전 세계에서 몰려온 공식 참가인원만 3만명에 이른다. 자전거가 가장 트렌디한 스포츠의 중심으로 떠오른 것이다.
물론 70년대의 혹독한 오일쇼크가 사람들에게 친환경 교통수단으로서 자전거의 가치를 새삼 깨닫게 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자전거업체 관계자들은 “일반의 예상과 달리 자전거 산업과 문화는 경제호황일 때 여유 있는 계층을 중심으로 발전해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자전거는 어떤 길을 달려왔을까. 우리나라에 자전거가 선보인 것이 구한말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이지만, 처음 자전거를 타고 다닌 사람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윤치호라는 설도 있고 예조시랑 고희성이 탔다는 말도 있지만, 그보다 앞선 1884년에 미국공사관 무관인 해군장교 포크가 제물포에서 서울까지 자전거를 타고 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종 황제가 의사 올리버 애비슨의 자전거를 보고 “어떤 원리로 바퀴가 넘어지지 않는지” 묻는 등 큰 관심을 보였다는 기록도 있다.
일제 강점기에 자전거로 영웅이 된 엄복동(왼쪽).
사람의 신체 혹은 애완동물
우리나라를 포함, 현재 지구 위에서 자전거를 타는 사람은 10억명에 이른다. 캄파뇰사의 우아한 수제 변속기를 장착한 초고가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덜덜거리는 생활 자전거에 만족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이 후자에 속한다.
조선의 엄복동이나 미국의 랜스 암스트롱처럼 2개의 바퀴로 세상을 열광하게 한 영웅이 있는가 하면, 짐받이에 태운 딸의 가느다란 양팔을 허리에 감고 등과 가슴으로 체온을 나누며 세상에서 가장 멋지게 달리는 아버지도 있다. 삼각형 프레임을 고집하는 클래식 마니아도 있고, 리컴번트(공기 저항을 줄이기 위해 누워서 타는 자전거)가 자전거의 미래라고 굳게 믿는 이도 있다. 할리우드 스타 브래드 피트는 고전적인 슈윈을 타고, 한국의 배두나는 샤넬을 타며, 옆집 아주머니는 삼천리 앙드레김을 주문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가슴에는 “놓으면 안 돼!”라고 외칠 때 흔들흔들 홀로 도로 위로 달려가준 ‘최초의 자전거’가 존재한다.
1935년 4일 만에 700마일을 주파하고 런던에 들어서는 여성 사이클리스트 애벌린 해밀턴. 사이클은 여성들의 패션, 지위, 가치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왼쪽). 1903년 1회 대회가 열린 ‘투르 드 프랑스’. 도로마다 엄청난 인파가 몰린다.
자전거를 타는 목적은 모두 다르지만, 모든 자전거에는 땅에서 발을 떼고 자신의 동력으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바람과 시간에 맞서 달리는 즐거움이 있다. 그렇지 않다면, 지난 200년 동안 2개의 단순한 바퀴가 이처럼 눈부신 기술적 발전과 다양한 문화를 이루진 못했을 것이다. 100년 전, 하이휠을 타고 영국을 일주한 자전거 여행가의 말에 우리 모두는 동의한다.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간은 모두 자전거 위에 있을 때였다.”
※ 자료 출처 :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두 바퀴 탈것’ ‘자전거학교’ ‘한국산악자전거학교교재’, 이규태의 ‘개화기의 자전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