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번호 2008타경○○○○ 최고가는 3억1311만원, 지○○ 씨입니다.”
집행관의 건조한 목소리와 함께 ‘내 집’이 될 뻔한 집은 50대 아주머니 품 안으로 넘어갔다. 경매 실전 체험을 위해 실제 입찰에 참여하지는 않고 입찰표를 작성하기만 했는데도 왠지 모를 아쉬움이 밀려왔다.
[경매 투자 결심]‘경매 한 번 잘하면 결혼 후 평균 8년가량 걸린다는 내 집 마련 기간을 1년으로 확(!) 줄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욕심이, 실제로 경매 투자에 도전해보라는 과제를 받은 직후 슬쩍 생겼다. 물론 결혼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우리 부부의 자산으로는 서울에서 웬만한 아파트 한 채 사기가 어렵다. 그러나 ‘빚을 져야 열심히 벌어 갚는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대출 좀 받아 집 사놓고 매달 원금과 이자를 갚아나가면 외식도, 쇼핑도 줄이며 알뜰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다졌다.
우선 계산기를 두들겼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의 전세보증금과 그간 모아둔 돈을 합치고 1억원을 대출받는다면 3억원 정도를 마련할 수 있다. 연 7%로 1억원을 대출받아 5년 원리금 균등상환을 할 경우 매달 200만원씩 갚아나가면 된다. 맞벌이인 데다 아직 아이가 없으니 씀씀이만 잘 관리하면 충분히 갚을 수 있겠지 싶었다.
[독학]금요일 퇴근길에 경매 책을 사러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들렀다. 경매 책 코너가 따로 마련돼 있어 요즘 경매의 인기를 실감하게 했다. 경매 책을 고르는 몇몇 사람 사이에 끼여 책을 두루 살폈다. ‘백서’ ‘바이블’ ‘달인’ 등 최고를 자처하는 제목을 단 책이 여럿 눈에 띄었다. ‘나는 경매로 반값에 집 산다’ ‘27세 경매의 달인’ ‘나는 쇼핑보다 경매투자가 좋다’ 등은 제목부터 호기심을 끌었다. 한참을 뒤적거리다 주말 동안 다 읽을 요량으로 두 권을 골랐다.
하지만 혼자서 경매 책을 독파하기는 쉽지 않았다. 요즘 같은 집값 하락기일수록 ‘대박’을 노리기보다는 실수요로 경매에 접근해야 한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대항력, 대지권 미등기, 예고등기, 유치권 같은 용어는 낯설기만 했다. 밑줄 그어가며 몇 번 반복해 읽으니 대충은 알겠는데, 졸음이 밀려왔다. 주식 투자도 직접 해보며 배우는 법이라는데 경매 투자도 마찬가지겠지. 물건을 찾기 위해 컴퓨터를 켰다.
[물건 찾기]우선 책에서 배운 대로 대법원 법원경매정보(www.courtauction.go.kr·이하 법원경매정보)에 접속해 회원 가입을 했다. 법원경매정보는 지난해 10월 대폭 업그레이드돼 회원 가입만 하면 관심 있는 물건을 ‘관심물건’으로 등록해놓고 자주 들여다볼 수 있다. ‘경매물건 → 기일별 검색’에서 3월26일 서울중앙지방법원과 30일 서울동부지방법원에서 열리는 경매 물건을 위주로 ‘내 집’ 후보를 골랐다. 1~2회 유찰돼 최저 낙찰가가 3억원 미만인 서울 지역 아파트는 생각 외로 여러 개 있었다(법원경매에서 유찰될 경우 최초 감정가에서 20%씩 떨어진 최저 매각가격으로 다시 경매에 나온다). 법원경매정보는 지도 서비스도 제공한다. 한반도 지도 모양 아이콘을 클릭하면 된다. 인근 지하철역과 버스정류장, 회사까지의 이동거리를 재면서 여러 집을 구경하다 보니 서너 시간이 훌쩍 지난다. 두 눈이 빨개질 무렵 최종 후보 2개를 결정.
서울 강남구 삼성동 빌라. 전용면적 54.08㎡(약 16평), 3층. 감정가 3억원, 최저 매각가 2억4000만원(1회 유찰).
서울 송파구 거여동 아파트. 전용면적 59.73㎡(약 18평), 2층. 감정가 3억8000만원, 최저 매각가 2억4320만원(2회 유찰).
삼성동 빌라는 무엇보다 ‘삼성동’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7호선 청담역과 강남구청역이 도보로 10분 거리라 지하철역까지 좀 멀고 주차공간이 협소하지만, 코엑스가 1km도 떨어져 있지 않고 아파트로 재개발되면 엄청난 수익을 올릴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거여동 아파트는 5호선 거여역에서 걸어서 3분밖에 걸리지 않고, 5호선 충정로역 인근에 있는 회사까지 지하철을 갈아타지 않고 출퇴근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아무래도 빌라보다 살기 편한 아파트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경매 물건을 고를 때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은, 임차인의 임차보증금을 매수인(낙찰자)이 인수해야 하는지 여부다. 임차보증금이 1억원인 아파트를 3억원에 낙찰받았을 때 임차보증금을 인수해야 한다면, 사실상의 투자금액은 3억원에서 4억원으로 뛴다. 이럴 바에야 일반 매매를 하면 되지, 굳이 경매에 나설 필요가 없다. 임차인의 임차보증금을 매수인이 책임져야 할 때 ‘임차인이 대항력이 있다’고 한다.
임차인의 대항력 여부는 법원경매정보가 매각기일 7일 전부터 제공하는 ‘매각물건명세서’에서 파악할 수 있다. 말소기준등기(등기부상 존재하는 등기 중에서 가장 먼저 설정된 등기로 낙찰 결과 이후의 모든 등기가 말소되는 기준등기)를 뜻하는 ‘최선순위 설정일자’가 임차인의 전입신고일보다 앞서면 대항력이 없고, 전입신고가 더 빠르면 대항력이 있다. 가격과 위치만 고려해 골랐을 뿐인데 운 좋게도 삼성동 빌라와 거여동 아파트 둘 다 임차인의 대항력이 없었다.
경매 책에서 읽은 바에 따르면 그 다음엔 유치권, 법정지상권, 예고등기 등 특별한 매각조건이 붙어 있는 물건인지 확인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고난도’ 사항은 아무리 관련 자료를 뒤적거려도 알쏭달쏭하기만 할 뿐 해결이 되지 않았다. 흠, 이제 어쩌지?
<b>1</b>교보문고 광화문점 경매서적 코너.<br><b>2</b>권성안 지지에셋 경매투자팀장은 각 물건의 주의점을 꼼꼼하게 지적해줬다.<br><b>3, 4</b>직접 찾아가본 후보 물건들.
“음…. 두 물건 모두 특별매각조건은 없습니다. 잘 고르셨네요.”
기자가 가져간 두 물건을 살펴본 권 팀장으로부터 이 말을 듣자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지난 며칠간 특별매각조건이 붙은 어려운 물건이 아닐까 노심초사했기 때문이다. 권 팀장은 매각물건명세서의 ‘비고’란을 꼼꼼히 읽으면 이 부분을 확인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비고란에 유치권, 법정지상권 등이 표기돼 있지 않으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 하지만 현장 조사를 통해 다시 확인해보는 것이 기본이라고 강조했다.
삼성동 빌라에 대해 권 팀장은 “강남에 내 집을 마련했다는 프라이드를 가질 수 있는 물건이지만, 아파트로 재건축을 기대하기까지는 무리가 있다”고 평가했다. 지지옥션의 유료경매정보에서 확인해보니 이 물건에 대한 조회 수가 무려 1000건. 권 팀장은 “조회 수가 500건만 넘어가도 매우 관심이 높은 편”이라며 “낙찰 경쟁이 셀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리고 권 팀장은 이 물건의 주의사항으로 1억3000만원에 전세를 살고 있는 대항력 없는 현재의 임차인이 대위변제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지적했다. 말소기준등기가 7500만원으로 비교적 소액이라 임차인이 이를 대신 갚고 대항력을 되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매수인은 임차인에게 1억3000만원의 전세금을 모두 물어줘야 한다.
권 팀장의 ‘심사’에서 거여동 아파트는 주의사항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는 다만 “관리비 체납 여부를 꼭 확인하라”고 했다. 임차인의 체납 관리비는 매수인이 인수해야 한다. 권 팀장은 “관리비를 700만원이나 체납한 경우도 봤다”고 귀띔했다.
[현장조사]현장조사는 경매 투자의 기본 중 기본이라고 한다. ‘앞으로 우리 가족이 살 집일 수도 있는데, 직접 가보는 것은 당연하지’ 하며 삼성동과 거여동으로 출동.
삼성동 빌라로 진입하는 도로는 차 한 대가 지나갈 정도로 생각보다 좁았다. 가장 가까운 버스정류장과의 거리는 도보 5분. 대문 격인 중앙 출입문이 전자잠금장치로 잠겨 있어 안에 들어가보진 못했다. 지나가던 주민이 알은체를 했다.
“경매 나온 집 보러 오신 거죠? 요새 이 빌라 보러 오는 사람이 참 많아요. 저 집에 고만고만한 애들이 서너 명 돼요. 잘 해결돼야 할 텐데….”
순간 막상 낙찰을 받은 뒤 전세금을 고스란히 날릴지도 모를 임차인 가족에게 ‘나가달라’고 요구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겁이 났다. 인근 공인중개사무소 사람들은 “시세는 대지 평당 3000만원으로 잡으면 된다. 좀 낡았지만 위치가 워낙 좋으니 살기 괜찮을 거다”고 했다.
거여동 아파트는 ‘ㄷ’자 구조로 좀 독특했다. 현재 추진 중인 송파 신도시와 바로 이웃해 있고 총 12개 동 1002가구의 대단지다. 지역열병합이라서 관리비가 싸고, 주차 대수가 가구당 2대일 정도로 넉넉했다. 단지 안에 유치원도 있다. 관리사무소에 들러 체납 관리비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전혀 없다”며 “요새 그 집 관리비 체납을 물어보러 사람들이 자주 온다”며 조금 귀찮아했다.
<b>5</b>송파구 거여동의 한 공인중개사무소에서 주변 시세를 파악했다.<br><b>6</b>3월26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연습 삼아 입찰서류를 작성해봤다.<br><b>7</b> 경매법정 현장에서 생긴 여러 궁금증에 대해 설명해주는 권성안 팀장.<br><b>8</b>입찰자와 경매 교육생들로 발 디딜 틈 없는 경매법정.
[낙찰가 정하기]이제 ‘운명의 낙찰가’를 정해야 할 때. 빈 종이에 감정가, 최저 낙찰가, 시세를 적었다. 경매로 내 집 마련을 하고자 한다면 각종 비용(세금, 명도비용 등)을 고려해 시세의 80% 선에서 낙찰받는 것이 좋다는 경매 전문가들의 조언도 곰곰 생각해봤다.
삼성동 빌라의 대지 지분은 9.05평. 평당 3000만원을 곱하면 시세는 2억7150만원이다. 최근 다세대주택의 낙찰가율인 80%를 적용하자면 감정가 3억원의 이 빌라는 2억4000만원 언저리에서 낙찰될 것이다. 그러나 시세의 80%를 적용하자면 1억9200만원에 낙찰받는 것이 적당하다. 대위변제의 위험도 도사리고 있다. 그런데 최저 매각가가 2억4000만원이므로 한 번 더 유찰될 가능성이 높다. 아무래도 입찰에 참여하지 않는 게 좋겠다.
거여동 아파트의 현 시세는 3억2000만원으로 잡았다. 최저 매각가는 2억5600만원이고 현 시세의 80%는 2억5600만원. 하지만 경쟁이 치열할 것으로 예상되니 이보다 조금 더 높여 2억6052만원을 써보기로 결심. 입찰가를 1만원 단위까지 쓰는 것은 최고가를 써낸 사람이 두 명 이상이 되는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권성안 팀장은 “20평형대 아파트는 인기가 매우 좋아 3억원 이상은 써내야 낙찰될 텐데…”라며 고개를 저었다. 기자도 좀 걱정됐지만, 첫 입찰인 만큼 능력에 벗어나는 베팅은 하지 않기로 했다.
|
[매각 당일]삼성동 빌라는 정말로 한 번 더 유찰이 됐다. 3월26일 오전 10시, 서울중앙지방법원 경매법정에서 집행관이 경매기록 열람을 허락하자 서너 명이 몰려나가 이 빌라의 경매기록을 꼼꼼히 살폈다. 관심은 있지만, 금액이 좀더 떨어져야 한다고 투자자들이 ‘무언의’ 공감을 하는 듯했다. 이 물건은 몇 달 후 최저 매각가가 20% 더 떨어진 1억9200만원에 다시 경매법정에 나올 것이다.
3월30일 오전 11시40분. 서울동부지방법원에서 지난 일주일 동안 기자가 ‘내 집’으로 점찍었던 거여동 아파트를 낙찰받은 지모(50· 여) 씨는 입찰보증금 영수증을 받아들고 환한 표정을 지었다. 그 또한 기자와 마찬가지로 경매 초보자. 지씨는 “요새 경매가 하도 좋다고 해서 1월부터 경매를 시작했다”며 “세 번째 도전 만에 낙찰에 성공했는데 아직은 어안이 벙벙하다”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내 집’은 멀어져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