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서재와 책 창고에 있는 책이 1만권쯤 되는데, 독서가 습관처럼 굳어지다 보니 요즘도 하루에 한 권은 읽는다. 하지만 매일 한 권을 정독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마다 책 읽는 방식과 습관은 다르지만, 나는 대략 세 가지 방식으로 읽는다. 이는 짧은 시간에 비교적 많은 양의 독서를 가능케 하는 비결이기도 하다. 세 가지 방식은 △단어로 읽기 △문장으로 읽기 △문단으로 읽기다. 나는 책을 읽기 전 되도록 그 책에 대한 정보를 구한다. 그러고는 읽고자 하는 책이 세 부류 중 어느 부류인지를 결정한다.
단어로 읽는 대표적인 부류는 시(詩)다. 하나하나의 시어를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시상(詩想)을 공감하기 어렵다. 독특한 문체의 소설도 이 부류에 든다. 그런가 하면 플롯이나 얼개가 중요한 책이 있다. 이런 부류의 책에선 작가의 사상이나 주장, 철학 등이 중요하다. 실용서라면 블루오션 전략이나 롱테일 경제학 같은 책이 여기에 속한다. 이런 책에서 눈여겨볼 것은 개념 혹은 슬로건일 뿐, 그것을 증명하기 위한 자료나 사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대개 이런 책들은 하나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책 대부분을 사례로 채우기 때문에 일단 저자의 주장이나 개념이 잡히면 책을 덮는다.
문학작품도 그렇다. 세풀베다의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의 경우 글의 분량도 많지 않지만, 그 중심은 다양한 이야기와 사건이다. 따라서 이야기의 구성과 작가의 주장에만 귀를 기울이면 된다. 그래서 이런 책을 읽을 때는 단어가 아니라 문장으로 읽는다. 우리 눈이 글자를 읽을 때는 음절 → 단어 → 문장 → 문단을 따라간다. 눈은 먼저 각각의 음절을 읽은 뒤 그것을 연결해서 단어를 한 개의 덩어리로 인식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글을 읽을 때 대개 단어 단위로 읽는다고 착각하는데, 이는 뇌가 그렇게 훈련돼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것은 워낙 찰나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라 그 과정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어의 미학 중요 땐 숙독, 의미가 중요하면 문장 단위로
다만 이런 독서법으로는 언어 구사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 문장의 의미는 알 수 있어도 말의 아름다움을 인지하기는 어렵다. 이런 방식으로 시를 읽거나, 예컨대 윤대녕의 소설을 읽는 것은 의미가 없다. 따라서 윤대녕의 소설처럼 언어의 미학이 중요한 경우라면 단어 단위로 숙독하고, 맥락이나 의미가 중요하다면 문장 단위로 읽으면 된다.
다음으로는 문단으로 읽는 방식이 있다. 이는 많은 책을 섭렵하거나 이미 아는 내용을 되새길 때 사용하는 방식이다. 내 경우에는 ‘내가 사랑한 클래식’ 같은 책이 읽어야 할 책 목록에는 들어 있지만, 그 내용이 내게 새로운 공부나 학습 기회를 주는 것은 아니다. 이럴 때는 저자의 글과 느낌, 음악에 대한 애정 등을 스쳐가듯 간접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만족한다. ‘새로움을 발견한다’라기보다 ‘익숙한 느낌을 즐긴다’는 것이다. 문단으로 책을 읽는 것은 속독의 원리와 비슷하다.
정리하면 나는 책 한 권을 들고 사흘, 나흘씩 끌며 음절 하나, 단어 하나를 꼭꼭 씹어 즙을 만들다시피 해서 삼키는 경우도 있지만, 마치 쌈밥을 먹어치우듯 한 시간에 한 권을 꿀꺽하는 경우도 있다. 그것이 내가 엄청나게 많은 책을 읽은 것처럼 보이는 까닭이다.
인간은 언어로 사고하고 표현하고 전달한다.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언어를 많이 익히고 그들의 표현법을 폭넓게 활용하면 궁극적으로는 내 사고의 지평이 넓어질 수 있다. 대신 자기만의 독서법을 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독서의 힘이고 나를 좀더 나은 사람으로 단련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http:blog.naver.com/donodonsu
단어로 읽는 대표적인 부류는 시(詩)다. 하나하나의 시어를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시상(詩想)을 공감하기 어렵다. 독특한 문체의 소설도 이 부류에 든다. 그런가 하면 플롯이나 얼개가 중요한 책이 있다. 이런 부류의 책에선 작가의 사상이나 주장, 철학 등이 중요하다. 실용서라면 블루오션 전략이나 롱테일 경제학 같은 책이 여기에 속한다. 이런 책에서 눈여겨볼 것은 개념 혹은 슬로건일 뿐, 그것을 증명하기 위한 자료나 사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대개 이런 책들은 하나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책 대부분을 사례로 채우기 때문에 일단 저자의 주장이나 개념이 잡히면 책을 덮는다.
문학작품도 그렇다. 세풀베다의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의 경우 글의 분량도 많지 않지만, 그 중심은 다양한 이야기와 사건이다. 따라서 이야기의 구성과 작가의 주장에만 귀를 기울이면 된다. 그래서 이런 책을 읽을 때는 단어가 아니라 문장으로 읽는다. 우리 눈이 글자를 읽을 때는 음절 → 단어 → 문장 → 문단을 따라간다. 눈은 먼저 각각의 음절을 읽은 뒤 그것을 연결해서 단어를 한 개의 덩어리로 인식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글을 읽을 때 대개 단어 단위로 읽는다고 착각하는데, 이는 뇌가 그렇게 훈련돼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것은 워낙 찰나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라 그 과정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어의 미학 중요 땐 숙독, 의미가 중요하면 문장 단위로
다만 이런 독서법으로는 언어 구사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 문장의 의미는 알 수 있어도 말의 아름다움을 인지하기는 어렵다. 이런 방식으로 시를 읽거나, 예컨대 윤대녕의 소설을 읽는 것은 의미가 없다. 따라서 윤대녕의 소설처럼 언어의 미학이 중요한 경우라면 단어 단위로 숙독하고, 맥락이나 의미가 중요하다면 문장 단위로 읽으면 된다.
다음으로는 문단으로 읽는 방식이 있다. 이는 많은 책을 섭렵하거나 이미 아는 내용을 되새길 때 사용하는 방식이다. 내 경우에는 ‘내가 사랑한 클래식’ 같은 책이 읽어야 할 책 목록에는 들어 있지만, 그 내용이 내게 새로운 공부나 학습 기회를 주는 것은 아니다. 이럴 때는 저자의 글과 느낌, 음악에 대한 애정 등을 스쳐가듯 간접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만족한다. ‘새로움을 발견한다’라기보다 ‘익숙한 느낌을 즐긴다’는 것이다. 문단으로 책을 읽는 것은 속독의 원리와 비슷하다.
<b>박경철</b> 의사
인간은 언어로 사고하고 표현하고 전달한다.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언어를 많이 익히고 그들의 표현법을 폭넓게 활용하면 궁극적으로는 내 사고의 지평이 넓어질 수 있다. 대신 자기만의 독서법을 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독서의 힘이고 나를 좀더 나은 사람으로 단련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http:blog.naver.com/donodons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