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 같은 사법처리 과정에서 모든 피고인이 변호인에게 적절한 도움을 받는 것은 아니다. 어마어마한 수임료를 지불하고 사선변호인을 선임해 제때 실효성 있는 법률 자문을 받는 피고인들이 있는가 하면, 돈이 없어 자신의 혐의가 부당하다고 호소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이들도 부지기수다.
사선변호인을 선임할 능력이 못 되는 빈곤자나 미성년자, 노인, 장애인 등은 재판 과정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다. 살인 등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사실이 명백하게 입증된 악질 피의자들은 예외지만 사선변호사 선임이 어려운 형사사건 피의자, 피고인들 중에는 검찰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억울한 피해자가 적지 않다. ‘유전무죄’니 ‘무전유죄’니 하는 말이 아직도 회자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활성화된 것이 국선 전담변호인 제도다. 통계를 보면 서울을 비롯한 각급 법원에선 매년 국선변호 비율이 높아지고 있는 추세다. 사실관계 판단이 모호하지만 변론을 제대로 받지 못해 수사기관 등에서는 하찮게 취급될 여지가 많은 형사사건이 국선변호인들에게 맡겨지는 사례가 늘고 있는 것.
죄 뒤에 감춰진 기구한 사연
2007~08년 2년 연속으로 서울중앙지방법원으로부터 우수 국선변호인으로 선정된 진한수(40·사법시험 41회, 법무법인 청담) 변호사는 50대 여성의 무전취식 사건을 잊지 못한다. 50대 여성 A씨가 발길 닿는 식당마다 들어가 음식을 시켜 먹은 뒤 돈을 내지 않았다가 지난해 식당 주인들이 경찰에 신고해 입건된 사건이다.
언뜻 보면 A씨의 소행은 괘씸하다. 그러나 진 변호사는 A씨를 접견하면서 그가 비이성적인 행동을 한 배경에 기구한 사연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A씨는 20대 중반에 편하게 알고 지내던 ‘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해 큰 충격을 받았고, 이것이 심리적 불안과 정신분열 상태로 악화됐다. 이후 A씨는 부모를 수시로 폭행하는가 하면 집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지내는 날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다 부모가 사망하자 이후 10여 년 동안 음식점을 드나들며 무전취식을 하는 정신병질적 행태를 보였다.
진 변호사는 이러한 A씨의 상태를 구체적으로 파악해 재판부에 전달했다. 만약 진 변호사의 도움 없이 A씨의 과거가 전달되지 못했다면 상습 사기 혐의에 대한 처벌 기준에 따라 무거운 형을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진 변호사는 “처음 접견할 때는 A씨가 간단한 의사표현 말고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 어머니 얘기만 나오면 눈물을 흘려 무척 곤혹스러웠다”며 “그래도 꾸준하게 만나고 정신분열 증세가 있다는 정신감정 결과를 재판부에 잘 설명한 뒤 선처를 구해 재판부로부터 치료감호 처분을 받아낼 수 있었다”고 했다.
진 변호사는 외국인이 연관된 국선 사건도 기억에 남는 사례로 소개했다.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친구를 따라 한국에 온 대만인 부부가 보이스피싱 범인으로 오인받아 수개월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사건이다. 남편이 한국에서 대만인 친구의 부탁을 받고 돈을 인출해 대만으로 재송금했는데, 이것이 발단이 돼 대만 보이스피싱 사기단 공범으로 몰려 부부가 구속된 것. 남편은 송금 전후의 사정을 몰랐다고 항변했지만 수사기관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더욱이 공교롭게도 부부가 보이스피싱 조직원과 같은 여관에 투숙하고 있다 검거돼 오해가 더 커졌다고 한다.
결국 부부는 3개월 넘게 옥살이를 했고, 이 충격으로 부인은 구치소에서 유산하는 일까지 겪었다. 진 변호사 등이 적극적으로 사실관계를 밝혀낸 끝에 재판부는 “부부가 (보이스피싱 조직과) 범죄를 공모했다고 볼 증거는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고, 부부는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고 나서야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진 변호사는 “이 사건은 자칫 대만과의 외교 문제로 비화될 수 있었다”며 “부부의 진심을 제대로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기에 바로잡을 수 있는 사건”이었다고 전했다.
사소한 다툼 끝에 사람을 죽게 한 동성애자 사건도 뇌리에 남는 일 중 하나. 사건 변론을 하는 과정에서 진 변호사는 술 취한 동성연애 상대를 업고 계단을 내려가다 본의 아니게 놓쳐 숨지게 한 피고인에게서 애틋하고 진실한 사랑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가식적인 눈물과 진실한 눈물
“명문대를 나온 사람이었는데 상대가 사망하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 충격으로 한쪽 눈이 실명될 정도였다. 워낙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진술하지도 못했다. 검찰은 살인 혐의로 영장을 청구했는데, 사망한 동성연애 상대에 대한 피고인의 태도가 너무나 진지해서인지 나중에 과실치사 혐의로 공소장이 변경됐고, 결국 재판에서 집행유예 선고를 받았다.”
역시 ‘우수 국선변호사’로 선정된 길명철(34 ·사법시험 46회, 법무법인 나래) 변호사는 국선변호사로 활동하면서 피고인의 가식적인 모습과 진실을 분명히 구별할 수 있었다며 비슷한 시기에 처리한 두 건의 국선 사건을 꼽았다.
사무실만 침입해 물건을 훔친 절도사건이 있었다. 비슷한 전과가 여럿 있는 피의자였는데, 접견할 때는 웃으면서 솔직하게 심정을 털어놓다 재판 때만 되면 엉엉 울면서 재판장이 묻는 질문에도 대답하지 못했다. 길 변호사의 말이다.
“피고인의 눈물은 누가 봐도 연기인 게 티가 났다. 법률적으로 도움을 주고 싶었지만 정작 피고인이 그렇게 돌출행동을 보이는 바람에 준비한 변호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피고인으로선 나름 과거의 ‘실력’을 뽐낸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변호인인 내가 보기엔 참으로 딱하고 안타까웠다. 진실한 변호를 한다는 게 참 힘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죄 혹은 절도 미수를 주장하던 피고인은 가식적인 눈물이 밉보였는지 되레 1년6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과 대조적으로 길 변호사는 한 이혼 여성이 관련된 사건에서 ‘진실한 눈물’을 봤다고 했다. 남편과 시댁의 구박을 받고 쫓겨나다시피 이혼을 당한 40대 여성 B씨의 애절한 구속 사건이다. 이혼 후 착실하게 돈을 모아 어렵사리 작은 술집을 냈는데, 가게에 미성년자들이 들어와 술을 마시다 경찰 단속에 걸리는 바람에 50만원의 벌금을 물었다.
국선 변호사건은 범행동기와 밀접한 피고인의 기구한 사연이 감춰진 경우가 많다. 새롭게 도입된 국민참여재판에서도 국선 변호사건이 자주 다뤄지면서 피고인이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해 양형에 적용하려는 경우가 점차 늘고 있다.
중학생 딸을 키워줄 사람도 없는 데다 생계마저 막막해진 B씨는 구치소에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며 자신이 저지른 일을 후회했다고 한다. 그는 법정에 나와서도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러나 하늘이 도왔는지, 눈물의 진실이 읽혔는지 B씨는 가정 형편이 고려돼 집행유예로 풀려났다고 한다. 길 변호사는 “같은 눈물이라도 의미는 크게 다르다”며 “재판에 임하는 과정에서 진실한 마음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두 사건에서 깨닫게 됐다”고 전했다.
이처럼 사건의 진위가 뒤바뀌거나 피의자가 선의의 피해자로 둔갑하는 사건, 기구한 사연이 숨어 있는 국선 사건은 무수히 많다. 대체로 수사기관의 막강한 힘에 진실과 딱한 사정이 매몰된 사건이 주를 이룬다.
피의자가 피해자로 둔갑도
지난해 또 한 사람의 우수 국선변호인으로 선정된 이마리(43·사법시험 42회, 법무법인 위너스) 변호사는 “국선 변호를 해보니 검찰이 잘못 기소해 억울하게 피해를 보는 경우가 흔했다”고 말했다.
우수 국선변호인 홍기정(43·사법시험 45회, 홍기정 법률사무소) 변호사도 “전체적으로 피고인들의 권리의식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사선변호사 선임 자체가 불가능한 약자들은 자신을 보호하기는커녕 아예 무기력증에 빠져 수사기관이나 재판에 제대로 대응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라며 국선변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런 측면에서 국선변호인들이 적극적으로 대처한 사건들은 일반에게 공개되고 기억돼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