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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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의 수감, 출소자 돕기는 내 운명”

‘기쁨과 희망은행’ 후원회장 김기섭 전 안기부 차장

  •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입력2008-07-07 15: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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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번의 수감, 출소자 돕기는 내 운명”

    “우리나라 살인범의 이력 통계를 보면 평균 전과 4범이라더군요. 만약 3범에서 그치게 만들었다면 생명 하나는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출소자들을 받아줄 수 있는 포용의 정신이 필요한 시기예요.”

    한국판 ‘마이크로 크레디트’ 운동이 첫걸음을 내디뎠다. 방글라데시 무함마드 유누스 박사의 노벨평화상 수상(2006년)으로 널리 알려진 이 운동은 빈민에게 무담보로 소액대출을 해주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이를 벤치마킹해 6월25일 출범한 ‘기쁨과 희망은행’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 가운데 하나인 출소자(出所者)와 살인피해자 가족을 위한 은행으로, 1인당 1000만원의 창업자금을 3년간 2%의 저리로 대출해준다.

    그런데 (사)천주교 사회교정사목위원회가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 이 은행의 후원자 명단을 살펴보면 매우 익숙한 이름 석 자가 눈에 띈다. 김영삼(YS) 정부 시절 최대 권력비리로 알려진 ‘안풍(安風)’과 관련된 김기섭(69·사진) 전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의 전신·이하 안기부) 운영차장이 바로 그다. 김씨는 현재 ‘기쁨과 희망은행’의 후원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11년은 하느님이 저를 시험에 들게 하고 악에서 구원한 시기예요.”

    “지난 11년 하느님이 악에서 구한 시기”

    젊은 시절엔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신뢰를, 이후엔 김영삼 전 대통령과 그의 아들 현철 씨의 무한 신임을 바탕으로 안기부 운영차장 자리까지 올랐던 그에게 대체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그는 YS 정권 말기인 1997년 한보사건을 시작으로 11년간 다섯 번의 검찰 조사와 70여 회의 재판, 그리고 세 번의 수감생활을 거치는 등 고난의 시기를 보냈다. 차가운 구치소 바닥에서 출혈성 위궤양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낀 적도 있었다. 절망의 그림자 속에서 그를 구원한 것은 바로 종교의 힘이었다.

    “그 시련의 장소에서 하루 네 시간씩 기도하고 네 시간씩 성경을 읽으며 견뎠어요. 왜 저를 이곳에 보내셨는지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노력했죠.”

    김씨를 권력 정점에서 나락으로 떨어뜨린 ‘안풍’ 사건은 한나라당의 전신 민자당과 신한국당이 1197억원의 안기부 예산을 빼돌려 1995년 6·27 지방선거와 96년 15대 총선에서 선거자금으로 사용했다는 의혹을 말한다.

    그는 사건이 공개된 2001년 이후 줄곧 “1197억원으로 선거를 치른 것은 맞다. 당시엔 나라를 위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게 아닌 것 같다”면서 “누구의 지시를 받은 적도 없고, 나라를 위해서도 자금 전달과정에 대해 말할 수 없으니 나를 처벌하라”는 태도를 고수했다. “안기부 자금의 출처는 YS”라고 못 박은 전직 정치인 강삼재 씨와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어찌 보면 주군을 위한 우직한 선택일 수 있지만 그 개인으로선 우둔한 선택이었다.

    2001년 1월 김씨가 두 번째로 구치소에 입감했을 때 일이다. 당시 주말 미사에 참가하는 게 전부일 만큼 설렁설렁한 천주교 신자였던 그는 조금 낯선 경험을 했다. 곁불을 쬐러 갔다가 한 교도관에게 “오늘 출소하는 70세 노인이 갈 곳이 없어 안타깝다”는 말을 들었던 것.

    “당시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바빠 스쳐 들을 법도 한데, 순간 ‘아! 하느님이 이런 사람들을 위해 일하라고 나를 보내셨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날 이후 이곳에서 나가면 오갈 데 없는 출소자들을 위해 일하겠다고 기도했어요.”

    기도 덕인지 그는 1심 재판이 늦어져 만기보석으로 석방됐다. 그는 출소하자마자 교정사목(구금시설 수용자를 대상으로 목회활동을 하는 신부)인 이영우 신부를 찾아가 후원을 약속하고, 매달 수용자와 출소자를 위한 미사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2003년 9월 속개된 1심 재판에서 그는 5년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재판부가 ‘안기부 자금을 한 푼도 개인적으로 유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평가해준 점이랄까. 김씨는 “그 때문인지 호송차를 타고 다시 구치소로 향하는데도 그다지 걱정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2004년 1월 그는 2심에서도 만기보석으로 출소했다. 당시 법무부 장관이 “1, 2심 모두 만기보석으로 출소하는 경우는 1만 건에 한 건일 정도로 기적”이라고 했을 만큼 이례적이었다. 결국 그는 2004년 7월5일 고등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 자신조차 예상치 못한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생각해보세요. 저는 제 죄를 부인하지 않았어요. 처벌을 피하지 않겠다, 그 대신 건강을 고려해 법정구속만 면하게 해달라는 간절함뿐이었죠. 그런데 하느님은 제 기도와 상상을 뛰어넘는 결과를 보여주셨어요.”

    대법원에서도 무죄가 확정되자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천주교 교정사목에서 실시하는 교도소 구치소 봉사자 교육을 받는 일이었다. 그는 4개월의 교육을 마치고 서울구치소에서 3년간 꾸준히 봉사활동을 했다. 넓은 인맥을 활용해 출소자에게 직업을 알선하고, 자신이 직접 자본금 1억원짜리 미용재료 회사를 설립해 출소자들을 채용하기도 했다. 회사 이름도 아예 ‘God blessed (신의 가호를…)’라고 지었다.

    그러나 1년간 쏟아지는 무연고 출소자들이 6800여 명. 1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천주교 출소자 쉼터인 ‘평화의 집’으로선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갈 곳 없어 재범을 결심하는 이들을 위해 좀더 획기적인 방법이 필요했다.

    “자본금 50억원 목표 더 노력할 것”

    “제가 삼성 이사 출신이잖아요. 중역은 문제의 솔루션(해법)을 제시하는 자리예요. 그런데 수감자와 출소자를 돕다 보니 그들이 내 몸뚱이를 원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죠. 그들에겐 먹고살 밑천, 즉 돈이 필요했던 거예요.”

    김씨는 즉각 이 신부와 함께 은행 설립에 착수했다. 10개월간 5000명의 후원자들에게서 2억원을 모금했다. 그는 또한 자신이 경영하는 회사의 월급을 가불하는 형태로 적지 않은 돈을 기부했다. 참여 인사들의 이름만 봐도 국가대표급인 ‘기쁨과 희망은행’ 후원회 역시 그가 발로 일군 결실이다.

    김씨의 본격적인 사회활동은 이제 시작이라 할 수 있다. 5억원으로 시작한 은행 자본금을 하루빨리 50억원 규모로 키우겠다는 목표도 세웠다. 이를 위해 그는 구치소에서 만난 사회 지도급 인사들을 찾아다닐 계획이다.

    “우리나라 살인범의 이력 통계를 보면 평균 전과 4범이라더군요. 만약 3범에서 그치게 만들었다면 생명 하나는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출소자들을 받아줄 수 있는 포용의 정신이 필요한 시기예요.”

    그는 작별인사를 하는 기자에게 “내 인생을 통틀어 두 번째 인터뷰”라고 고백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기쁨과 희망은행’을 위해서였다는 것. 그는 한 가지 주문을 내걸었다.

    “기쁨과 희망은행 후원계좌를 기사에 꼭 넣어주세요.”

    기쁨과 희망은행 후원계좌

    계좌번호 : 551-2637-01-001051(국민은행) / 예금주 : (사)천주교 사회교정사목위원회 연락처 : 02-921-5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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