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색의 묘미를 살린 재치 있는 대사들로 꾸며진 뮤지컬 ‘나쁜 녀석들’.
뮤지컬 코미디 ‘나쁜 녀석들’(원제 : Dirty Rotten Scoundrels)은 세상의 돈 많고 외로운 귀부인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사랑’을 주어야 한다는 ‘메시아적이고도 신성한’ 소명의식을 가진 중후한 신사 로렌스의 이야기다. 배경은 멕시코의 휴양도시 리비에라. 혁명이 일어난 유럽의 작은 나라에서 망명한, 왕자인 척하며 독립운동을 지휘하고 있다는 핑계로 부자 미국 여인들에게서 후원금을 받아 챙기는 그를 세상은 사기꾼이라 부른다. 하지만 그 여인들에게서 배타적인 사랑을 요구받는 순간, 그는 뿌리치며 다시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떠난다. 그럴 때마다 그는 거울 앞에서 이렇게 독백한다. “어떻게 하면 이 매력이 없어질까? 그건 불가능하겠지.”
이러한 나르시시즘에 가득 찬 로렌스에게 도전장을 낸 사람은 모성애를 자극하는 읍소(泣訴) 전략으로 무장한 초보 사기꾼 프레디. 프레디는 로렌스의 연륜에 자신의 젊음을 결합하면 ‘차세대 최고의 사기꾼’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에 차 있다. 두 남자는 리비에라를 방문한 묘령의 여인 크리스틴을 먼저 유혹해서 5만 달러를 챙기기 위해 밀고 당기는 두뇌싸움을 벌인다. 하지만 묘령의 여인은 이 과정에서 백옥 같은 순박함으로, 경쟁에 돌입한 두 남자의 마음을 무장해제시키고 만다. 로렌스와 프레디는 ‘제비’가 범해서는 안 되는 최악의 실수인 사랑에 빠지고, 크리스틴은 두 남자를 자기 손바닥에 놓고 유유히 즐기며 단물을 빼가는 한 수 높은 ‘꽃뱀’의 허물을 벗는다.
미국식 웃음 코드 한국 관객에 맞게 각색
이 작품은 1988년 프랭크 오즈가 감독한 동명의 영화를 뮤지컬로 재구성한 것이다. 2005년 브로드웨이에서 대극장 규모로 초연된 원작은 뮤지컬 코미디의 미덕인 전형적인 캐릭터, 촘촘하게 짜인 복선과 상황의 아이러니가 선사하는 웃음 코드, 적절한 과장과 흥겨운 음악, 앙상블의 감초 구실과 군무(群舞) 등의 볼거리가 조화를 이룬 수작이다. 국내 공연에서 눈길 끄는 부분은, 회전무대를 활용해 빠른 템포로 장면을 전환하며 화려한 앙상블 댄스로 포진했던 원작을 국내 창작진이 중극장 규모로 아담하게 각색하면서 새롭게 포커스를 준 여러 시도다.
대표적인 부분은 미국적인 뮤지컬 코미디의 웃음 코드를 한국 관객에 맞게 각색하면서 브레히트의 서사극처럼 배우들이 배역과 현실을 오가며 스스로를 낯설게 하는 효과를 실험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주인공들이 “저는 원래 한국 사람인데 미국 사람 역할을 하고 있어요” “식당칸은 어디죠? - 바로 다음 장면입니다” “1막에서 했는데 왜 다시 하죠? - 재미있으니까” 등의 대화를 나누면 원작에는 없는 웃음 코드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브레히트가 서사극을 도입한 까닭은 극중 고단한 민초들의 삶의 모습이 바깥세상에선 엄연한 현실임을 관객들에게 주지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나쁜 녀석들’의 한국 공연에서 보여준 이런 시도는 관객들에게 ‘이것은 연극이다’ 또는 ‘미국 뮤지컬이다’라는 브레히트적 선언을 한다기보다, 번역과정에서 감수성의 차이로 잃을 수밖에 없는 부분에 대한 대체물로서 국내 창작진이 새롭게 창조한 유머 코드라고 볼 수 있다.
배우들의 연기는 전반적으로 뛰어났다. 로렌스 역을 맡은 김우형(더블캐스팅 강필석)은 중년을 연기하기에는 젊은 배우지만 나르시시즘에 빠진 한 남자로서의 본질적인 연기는 전혀 무리가 없었다. 김도현이 보여준 프레디는 배역과 실제 배우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꼭 맞는 옷을 입고 있었다. 원작에는 없지만 새롭게 추가된 ‘파라오 의상’을 입고 춤추며 노래 부르는 ‘Great Big Stuff’ 장면에서 그는 뻔뻔한 얼치기 사기꾼에 어울리는 동작을 안무, 노래, 연기로 버무려 근래 가장 인상적인 뮤지컬 장면으로 요리해냈다. 윤공주(크리스틴 역)는 극과 극을 달리는 캐릭터 변신을 특유의 발랄함과 시원한 가창 실력으로 뽐내고 있다.
이 작품은 국내에도 공연된 바 있는 ‘풀 몬티’를 작곡한 데이비드 예즈백의 후속작이다. 예즈백은 자신의 장기인 로커빌리에서 컨트리, 재즈에 이르는 다양한 음악을 드라마와 각 배역 상황에 알맞게 선사하고 있다. 라이브 밴드가 아닌 MR을 사용하고 있지만 자로 잰 듯한 편곡과 레코딩 상태도 만족스러운 편이다.
재치 있는 한글 가사들도 여러 번 귀를 사로잡는다. 아픈 다리가 낫는 ‘기적’을 바라는 프레디와 크리스틴이 부르는 노래 가사 중에서 프레디는 기적이란 “치킨 시켰더니 다리가 3개 나오고, 피자 주문했는데 30분 지나서 공짜로 한 판 더 받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또한 크리스틴에게 자신의 아픈 다리를 가리키며 ‘험한 세상의 다리’가 돼달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무대에는 달이 뜬다. ‘다리-다리-달이’로 이어지는 언어유희이자 우리식 운율을 뮤지컬에 도입한 유쾌한 시도인 셈이다.
이 작품의 최고 미덕은 긴장과 이완이 쉴새없이 반복되는 과정에서도 우리의 ‘나르키소스’ 로렌스가 사랑에 빠지는 감정선을 때로는 매끄럽게 표현하고 때로는 화려하게 채색해낸 안정감 있는 연출(황재헌)에 있다. 막판 본색을 드러내는 크리스틴이 두 번에 걸쳐 선사하는 반전도 미스터리물의 전형적인 형식이면서 깔끔한 마무리다. 공연은 5월12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열린다. 문의 02-708-5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