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빙식이었던 국무회의 차 문화도 바뀌었다. 참석자들이 직접 차를 타 마시도록 했으며 받침이 있는 찻잔은 머그컵으로 대체됐다.
이처럼 이제 취임 50일을 갓 넘겼지만, ‘불도저’라는 별명이 무색할 만큼 디테일에 강한(?) ‘꼼꼼’ 대통령 관련 일화는 적지 않다. 그 시작은 전봇대였다.
“대불공단에 가봤는데 공단 길 건너편 교량에 전봇대가 있어서 대형 트럭이 커브를 돌기 어렵다. 옮겨달라고 요청해도 몇 달이 지나도록 안 된다고 하더라. 도도 권한이 없고, 목포시도 안 되고 산자부도 안 되고…. 전봇대 하나 옮기는 것도 안 된다.”
_ 1월18일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간사회의
당시 대통령 당선인의 이 발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산업자원부 공무원들이 대불공단으로 달려갔고, 문제의 전봇대는 이틀 만에 제거됐다. 이후부터 ‘전봇대 뽑기’는 탁상행정에서 벗어난 이명박식 규제 완화의 상징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부 규제가 없어진 대신 새롭게 지켜야 할 것도 생겼다. 이 대통령의 발언 내용 중에는 세부적인 규칙을 강조한 게 유독 많다.
“자리 배치나 결재 방식 등 사소한 것부터 글로벌한 기준에 맞게 변화시켜라. 어느 장관이 잘하는지 지켜보겠다. (중략) 디지털 시대엔 분초당 계획을 세워야 한다. ‘월말까지, 주말까지, 중순까지’란 아날로그 시대의 용어를 쓰지 말고, 하루도 오전과 오후로 세분해서 써라.”_ 2월19일 장관 후보자와 함께한 국정운영 합동워크숍
변화의 첫 타자는 청와대였다. 취임 후 청와대 집무실에 들어선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집무실 안 바꿨네. 바꿔야지.”
이후 청와대 내 사각탁자는 원형탁자로 바뀌었고, 김영삼 정부 시절부터 사용하던 청와대 로고도 바뀌었다. 국무회의에서는 차 서빙을 받는 게 아니라 회의실 바깥에서 직접 차를 타 마시는 방식으로, 찻잔은 받침이 없는 머그컵으로 바뀌었다. 모두 실용을 중시하는 대통령 지시에 따라 바뀐 것들이다.
청와대 여민관 내 재정경제비서관실을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사진 위), 이 대통령이 서울 자양동 골목시장을 방문해 둘러보고 있다.
대통령은 본인의 업무공간뿐 아니라 비서관들의 업무공간인 여민관의 구조도 바꿀 것을 지시했다. 비서관실을 없애고 직원 자리 사이 칸막이를 1.1m로 낮출 것 등에 대해 지시했고, 공사가 완료된 후 3월5일에는 직접 여민관을 방문해 한 시간 동안 확인절차를 밟았다. “칸막이가 없어야 의사소통이 잘된다” “공개적인 것이 불편한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라는 말로 칸막이 제거 공사의 당위성을 설명한 대통령은 “출입문에서 복도로 들어가는 공간이 불필요하게 넓은데 좀더 효율적으로 이용해야 한다” “숨어 있는 2cm를 찾아라” “ (유리벽을 시범 설치한 총무비서관실의 반투명 유리에 대해) 좀더 투명한 것으로 바꿔라” “사무실과 책상이 벽과 붙어 있는데 칸막이가 설치돼 있다. 없으면 더 활용할 수 있는데 공간 넓히라는 주문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 “창문을 통해 햇빛이 들어와 등을 켜놓을 필요가 없다. 점심시간이나 자리를 비울 때는 전등을 꺼라”는 등의 세부사항을 추가했다.
이후 정부 각 부처에까지 칸막이벽 허물기와 유리벽 설치붐이 일어난 것은 물론이다. 청와대 여민관은 구조를 변경하면서 쓸모를 잃은 폐문 14곳에 ‘MB 어록’을 담은 액자가 붙었다. 이 대통령이 공식석상에서 한 발언을 담은 액자에는 “법이 아무리 바뀌더라도 공직자들의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실질적인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공직자는 서번트다. 주인인 국민보다 앞서 일어나는 게 머슴의 할 일로, 주인보다 늦게 일어나선 역할을 할 수 없다” 등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으며 매달 새로운 말로 업데이트된다.이 밖에도 청와대와 관련된 이 대통령의 세심한 지시사항은 다양하다.
“오후 4시면 아직도 훤한데 문을 닫으면….”
_3월2일 청와대 내 관람객 편의시설 효자동 사랑방의 문이 닫힌 것에 대해
“이 과일들은 항상 똑같이 나와요. 항상 배 멜론 사과 딸기고 배열순서까지도 그대로예요. 청와대 들어온 이후 계속 이래요. 오는 사람은 한 번 먹지만 저는 매일 똑같은 것만 먹어요. 사소한 것부터 바뀌어야 해요. 변화가 중요합니다.”
_3월3일 각 부처 차관 임명장 수여 후 다과회에서
어린 시절 가난을 경험한 탓인지 이 대통령은 절약정신이 투철하다는 평도 받는다. 업무보고에서도 예산절약을 강조하는 발언을 자주 했다.
“다른 부처는 모두 보고서를 컬러로 했는데 법무부는 흑백으로 돼 있어서 좋다.”_3월20일 법무부 업무보고에서 가격이 비싼 컬러 인쇄 보고서 대신 흑백 인쇄한 보고서를 내놓은 것에 대해
또 “용인시청이 새로 지어 서울시청보다 좋은데, 관청 건물은 민간 건물보다 좋게 지으면 안 된다. 그게 다 낭비”(3월12일 국방부 업무보고 전) 라는 발과 지식경제부 업무보고를 듣기 위해 경북 구미에 내려가는 일정에 탈것을 비행기에서 KTX로 변경한 사례 등은 유명하다.
일산 초등학생 납치 미수 사건때는 직접 일산경찰서를 방문했다(사진 위), 청와대 여민관 구내식당에서 식판에 직접 밥을 담고 있는 이 대통령.
“비싼 밀가루를 쌀로 대용할 수 없는지 연구해야 한다. 동남아에서도 쌀국수를 먹는데, 우리만 밀가루국수를 먹느냐.”
_2월21일 농어업단체 대표 간담회
“최근 라면값이 100원 올랐다. 밀가루의 t당 가격은 얼마인가. 밀가루 대신 쌀가루를 보급하는 방법은 없나.”
_2월22일 국무위원 후보자 회의
“라면값이 100원 올랐는데 서민들의 부담이 클 것.”
_2월27일 청와대 첫 수석회의
결국 3월3일 열린 국무회의에서는 쌀국수와 쌀라면 등을 개발, 보급하는 방안이 논의됐다. 청와대는 이후 첫 외무초청 만찬에서 밀가루 국수 대신 쌀국수가 든 설렁탕을 내놓았다. 한편 농림수산부 직원들은 쌀 상품을 만드는 방안을 찾기 위해 전국을 뒤진 끝에 전남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쌀 케이크를 공급하는 업체를 찾았다는 후문이다.
“해봤어?” “가봤어?”식 어법으로 대표되는 이 대통령은 현장 방문을 선호한다. 이 때문에 일선 재래시장을 방문해 생선 채소 과일 값 등을 확인하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3월8일 재래시장을 방문한 이 대통령은 “재래시장이라는 어감이 안 좋다”며 “전통시장으로 이름을 바꿔라”라는 주문도 했다.
“일선 경찰이 너무 해이해져 있다. 경찰이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뛰어왔다.”_3월31일 일산경찰서 방문
일산 초등학생 유괴사건이 뜨거운 감자였던 당시에는 사건을 담당했던 일산 경찰서를 직접 방문했고, 4월8일에는 전북 정읍의 AI(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피해지역을 시찰했다. 두 건 모두 한승수 총리의 방문 계획이 잡혀 있었지만 “부지런한 총리보다 더 부지런한 대통령” 덕에 번번이 총리의 현장방문 일정은 취소됐다.
대통령의 이러한 현장중심 행보와 발언, 이른바 ‘액션 플랜’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최고경영자(CEO) 출신 대통령답게 탁상을 벗어난 실천력 있는 통치라는 칭찬이 있는가 하면, 대통령이 지나치게 지엽적인 사항에 간섭하는 것은 효율적이지 못하며 때로 위험하기까지 하다는 비판도 있다.
“오늘 날씨 예보가 또 틀렸다”_3월21일 환경부 업무보고는 발언으로 기상청이 발칵 뒤집어지고, 예보 정확도 85%를 웃도는 기상청이 ‘오보청’ 오명을 쓰게 된 것은 그나마 귀여운 사례에 속한다.
“하루 220대만 통과하는 톨게이트에 12명 넘게 근무하고 있다”_3월10일 기획재정부 업무보고/ 3월24일 국토해양부 업무보고는 대통령의 발언 후 국토해양부와 한국도로공사는 문제의 톨게이트를 보름간 찾았지만 딱 맞는 ‘220대 톨게이트’는 찾지 못했다. 결국 그중 문 연 지 4개월째로 일일통행량이 282대인 전남 나주 문평 톨게이트가 문제의 톨게이트로 꿰맞춰졌다. 더불어 12개 톨게이트에서 45명의 감원이 시행됐다. 불필요한 예산낭비를 막으라는 의도의 발언이 다수가 비정규직(41명)인 이들의 일자리를 빼앗은 셈이다.
“취임 20일 됐는데 국민도 언론도 6개월 지난 것으로 생각”
“화성에 가보니 경찰서가 하나도 없더라”_3월15일 행정안전부 업무보고는 대통령의 지적은 20일 만에 컨테이너박스 경찰서를 하나 더 만들게 했다. 현재 ‘화성’이라는 이름이 붙은 경찰서는 동부와 서부 두 개가 있지만 정작 화성 동부 경찰서(구 화성경찰서)가 위치한 곳은 오산시다. 오산시에 ‘오산경찰서’는 없고 ‘화성 경찰서’만 있는 것이다.
“50개 생활필수품의 물량공급을 조절하는 등 집중 관리하면 서민물가는 잡힐 것.”_3월19일 법무부 업무보고
위의 발언 이후 청와대에서 “학원비, 라면, 버스료, 소주, 공동주택관리비, 쇠고기와 돼지고기 값 등을 포함해 생활필수품 52개 품목을 선정해 관리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것이나 청와대가 은행연합회 등에 ‘송금수수료 인하 협조공문’을 보낸 일 등은 전형적으로 ‘꼼꼼한’ 이 대통령의 스타일이지만 정부가 불필요하게 시장에 관여하는 것으로 자유경쟁시장 논리를 거스른다는 비판도 받는다.
“한 6개월쯤 지난 것 같다.”
_3월16일 새 정부 첫 국정철학 공유 확산을 위한 장차관 워크숍
3월 중순 취임 20일을 되돌아보면서 대통령이 한 말이다. 당시 대통령은 “취임 20일 됐는데 국민도 언론도 한 6개월은 된 것으로 생각한다. 특히 언론은 1년쯤 된 정권으로 알고 우리에게 아주 많은 충고를 해주고 있다”는 발언을 하며 부담을 드러냈다. 그에 덧붙인다면, 넘치는 꼼꼼함 또는 쫀쫀함에 따른 피로감 역시 무시 못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