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 서산 간척지를 찾은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가운데).
최근 아산이즘을 심층 분석한 문건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현대그룹 계열사인 현대경제연구원(원장 김주현)이 작성한 ‘7주기를 맞아 재조명해보는 정주영 경영전략’이란 제목의 보고서가 그것이다. ‘경제 난국 극복을 위한 돌파경영’이란 부제(副題)가 붙었다. 이 보고서는 정주영 창업자가 일으킨 현대그룹의 성공신화와 그의 리더십을 집중 분석한 내용을 담고 있다. 또 아산이즘이 오늘날 한국 기업에 주는 시사점을 정리했다. 보고서의 머리말은 이렇게 시작한다.
“한국 경제와 국내 기업을 둘러싼 대내외 여건이 급속히 악화되고 있다. 세계 경제 불안이 가중되는 가운데 기업들의 경쟁력은 약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1970년대 오일쇼크 이래로 최대의 위기 국면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 경제의 어려움이 가중되는 현 상황에서 1960~70년대 열악한 경영 여건 속에서도 현대그룹의 성공신화를 이룬 고(故) 정주영 회장의 경영철학과 리더십은 국내 기업들의 위기 극복을 위한 경영전략 수립에 소중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정주영 회장의 경영철학은 어려운 난관에 부딪혀서도 ‘할 수 있다’라는 과감한 도전정신과 창의력으로 사업 성공을 이끌어내는 ‘돌파경영 (Breakthrough Management)’으로 요약된다.”
행간을 세심히 읽어보면 심상찮은 구절이 눈에 띈다. ‘최대의 위기 국면’이라는 부분이다. 외환위기 때보다 더 심각하다는 의미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아무튼 현 상황이 매우 어렵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영웅은 난세에 태어나는 법 아니던가. 위기 상황에서 아산 같은 지도자가 나타나야 함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 보고서는 아산의 돌파경영전략을 7가지로 요약했다. ‘성공신화’를 창출하는 이 전략은 ⊙시대를 앞서가는 신성장 동력 확보(건설·자동차·중공업·증권 등 시대와 업계를 선도하는 사업 창업) ⊙세계시장을 무대로 한 사업 개척(사업 초기 건설 중심의 수출주도형에서 전 사업영역에 걸쳐 해외 진출 시도) ⊙고객 감동의 신뢰경영 추구(신용 제일주의를 바탕으로 중동 특수 등 새로운 시장 창출을 견인) ⊙기술자립 신조 견지(소양강댐 건설, 자동차 및 조선의 독자 모델 개발 등 시행착오와 경험을 통해 독자적 기술 확보) ⊙능력 제일주의의 인재경영(실무능력 중심의 인재 관리, 현장 중심 및 해외 전문가 양성) ⊙긍정과 실천의 리더십 추구(창조적 예지, 적극 의지, 강인한 추진력을 바탕으로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창조적 리더십 발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 실천(사재 출연으로 대기업 최초의 복지재단 설립 후 복지사회 기틀 마련) 등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에서 강연하는 정주영 명예회장의 생전 모습.
특히 리더십 부분이 돋보인다. 정주영 회장은 “해봤어?”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임직원에게 ‘하면 된다’는 강인한 추진력을 요구했던 것이다. 본인이 앞장서서 실천했음은 물론이다.
현대그룹의 성장 역사는 ‘한강의 기적’을 이룬 한국 경제 성장사와 궤를 같이한다. 1963년 현대그룹의 자산은 8억1400만원, 매출액은 8억원, 국민총생산(GNP) 대비 매출액 기여는 0.1%에 불과했다. 그러나 96년엔 자산 59조8788억원, 매출액 69조7257억원, GNP 대비 매출액 기여 18%로 급성장했다.
2001년 창업주 별세 이후 그룹은 현대그룹(정몽헌), 현대자동차그룹(정몽구), 현대중공업그룹(정몽준) 등으로 나뉘었다. 이때 정몽헌 회장이 이끄는 현대그룹의 적통(嫡統) 여부가 논란이 됐다. 창업주의 장남 정몽구 회장이 경영하는 현대자동차그룹은 자신이 정통성을 가진 그룹이라는 자부심을 대내외에 알렸다. 정몽헌 회장이 2003년 8월 갑자기 생을 마감함에 따라 현정은 회장이 남편의 뒤를 이어 현대그룹 최고경영자로 등극했다. 적통 논란은 더욱 뜨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2006년 기준으로 범(汎)현대그룹의 자산은 136조4040억원, 매출액 135조3440억원, GNP 대비 매출액 기여 16%로 집계됐다. 통계에 포함된 회사는 118개사. 정몽구 정몽준 현정은 회장이 지휘하는 그룹 이외에 현대건설, 하이닉스반도체 등 과거에 현대가 창업한 회사들이 들어갔다. 고 정세영 현대자동차 회장의 아들 정몽규 회장이 이끄는 현대산업개발, 정주영 창업자의 막내동생 정상영 회장의 KCC도 포함됐다.
보고서는 “정주영 회장의 서거 전인 1996년 시점에 현대그룹은 49개 계열사를 거느려 총자산 규모로 재계 순위 1위였다”면서 “2007년 4월 기준으로도 범현대그룹의 자산 규모는 재계 순위 1위”라고 밝혔다. 이 분석에는 문제가 있긴 하다. 현대건설, 하이닉스반도체는 외환위기 때 부실기업으로 전락해 채권 금융기관이 대주주가 됐으므로 지금은 현대와 무관하기 때문이다.
현대건설 인수전 뛰어든 정몽준 - 현정은 미묘한 신경전
이 보고서가 나오자 재계에서는 “현대건설 매각을 앞두고 현대그룹이 산하 연구소를 부추겨 보고서를 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적통을 은연중 과시하려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고서 작성을 총괄한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상무는 “억측에 불과하다”면서 “나라 경제가 어려울 때 돌파경영을 되새김으로써 돌파구를 찾자는 동기에서 작성한 것일 뿐”이라고 밝혔다. 실무 책임을 맡은 허만율 연구위원도 “다른 복잡한 배경은 없고 아산이즘을 재조명하자는 순수한 목적에서 작성했을 따름”이라고 말했다.
현대중공업의 광고가 이런 소문의 원인을 제공한 측면도 있다. 정 전 회장이 1986년 중앙대에서 특강하는 모습을 현대중공업이 3월 초 광고물로 제작해 여러 매체에 게재했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중공업이 창업자에게서 정통성을 계승했다는 점을 암시한 것으로 해석됐다.
정통성 논쟁이 또 불붙는 이유는 현대건설 매각과 관련이 있다. 현대건설 주주협의회 주관기관인 외환은행은 현대건설을 매각하기 위한 구체적인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현대그룹과 현대중공업은 각각 인수희망자로 나선다. 현대의 ‘뿌리 기업’인 현대건설을 차지하면 자연스레 정통성도 갖추는 셈이어서 그룹의 사활을 건 쟁탈전이 벌어질 조짐이다.
현 회장의 최근 발언을 분석하면 현대건설 인수에 대한 강렬한 의지가 엿보인다. 3월20일 정주영 창업자 7주기를 맞아 경기 하남시 창우동 선영을 찾은 자리에서 현 회장은 “(현대건설은) 반드시 우리가 인수할 것”이라 말하고 “현대가의 정통성은 정몽구 회장에게 있다”고 밝힌 바 있다.
현대중공업 측은 현 회장의 발언에 대한 언급을 자제하고 있다. 양측이 갈등 양상을 보이면 대주주인 정몽준 의원의 정치활동에 이롭지 않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최고위원인 정 의원은 이번 총선에서 정동영 통합민주당 후보와 서울 동작을에서 맞붙는데, 양 후보가 대통령 후보로 나선 전력이 있어 ‘빅매치’로 꼽힌다. 정 의원으로서는 압승을 거둬 향후 당권, 대권 도전에 청신호를 밝혀야 하는 중요한 승부다.
재계 일각에서는 현대경제연구원 보고서가 정 의원에게 불리할 것도 없다고 본다. ‘왕회장’(정주영 창업자의 별명)의 리더십이 널리 알려지면 그 아들인 정 의원이 반사효과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왕회장 리더십’은 이명박 대통령의 리더십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 대통령이 현대건설 사장을 지내며 아산이즘을 이루는 데 일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회장 리더십이 현 회장의 리더십으로 바로 연결되기엔 시기상조”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런 면에서는 현대그룹 소속 연구소가 만든 보고서지만, 효과는 정 의원이 더 누릴 수 있다는 분석이다.
창조적 예지 | ● 미래지향적 사고로 대내외 여건 변화를 긍정적으로 인식 ● 중동 진출 신화, 자동차 및 조선 등 중화학공업에 선도적 진출 |
적극 의지 | ● 투철한 주인의식과 능동적 대응 자세 ● 오일쇼크로 인한 어려움을 중동 해양설비 공사로 극복 |
강인한 추진력 | ● ‘하면 된다’는 정신으로 목표 달성에 매진 ● 내부 반발과 외국 견제에도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성공 |
* 현대경제연구원 작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