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일고와 연세대 그리고 해태(기아) 타이거즈. 명문 학교와 명문 팀을 거친 이호성(41) 씨가 ‘모녀 일가족 4명 피살사건’의 범인이었다는 소식이 야구팬뿐 아니라 전 국민을 전율케 했다.
이씨는 야구계를 떠나 사업에 뛰어든 뒤 경험 부족으로 부도를 맞은 후 사기꾼으로 전락해 기소중지됐다 엄청난 죄를 저지르고 급기야 자살했다. 그렇다면 운동에 전념하느라 학창시절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역대 프로야구 선수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불사조’ 박철순 정보통신업체 회장님
해태타이거즈 4번 타자 출신의 프로야구 원년 홈런왕 김봉연(56) 씨는 운동하는 틈틈이 공부를 했다. 배팅 스타일은 무식해 보일지 몰라도 그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원년 멤버로는 드물게 대학원을 다녔다. 원광대에서 운동생리학을 전공해 석사학위를 딴 것.
그는 해태 타격 코치를 그만두고 쉬고 있을 때인 2000년 12월, 극동대로부터 겸임교수 제의를 받았다. 그 뒤로도 학업에 매진해 2002년 3월 조교수로 정식 발령을 받았다. 그는 지금 후학을 가르치는 재미에 흠뻑 빠져 있다.
투창 선수 출신으로 독특한 투구 폼을 뽐내던 송유석(42) 씨는 광주 광산구 쌍암동에 자리한 ㈜루빌코리아의 사장이다. 특허권을 받은 ‘회전식 건물 건축 기술’로 5년 전 사업을 시작했다. 그가 확보한 기술은 남산타워 전망대처럼 건물의 바닥만 회전시키는 게 아니라 건물 전체를 회전시키는 것이다.
외야수로 활약한 왼손타자 출신 박재벌(40) 씨는 ‘재벌’답지 않게 꽃집을 운영한다. 원년 우승팀 OB(두산) 베어스 출신의 ‘불사조’ 박철순(52) 씨는 대장암과 싸우면서 정보통신업체 모던테크의 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박씨와 함께 OB 베어스 쌍두마차로 활약한 선우대영 씨는 1983년 시즌을 마치고 은퇴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지금은 애틀랜타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 그곳 교민들 사이에서 그를 모르면 간첩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사업이 번창하고 있다고.
OB 소속으로 첫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만루홈런을 터뜨려 최우수선수(MVP)로 뽑힌 김유동(54) 씨는 1996년 당시 자유민주연합 소속으로 총선에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지난해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때는 박근혜 전 대표의 특보로 일했다. 그는 무소속 또는 자유선진당 후보로 이번 4·9총선 때 인천에서 출마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1984년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양세종(50) 씨는 1990년 은퇴한 뒤 운송업에 뛰어들어 자리를 잡았다. 인천에서 MK해운을 운영하고 있다. 삼성 라이온즈의 초창기 때 이선희 권영호 씨와 함께 트로이카를 이뤘던 황규봉 씨는 부산에서 건설업을 하고 있다. 황씨는 1973년 필리핀에서 벌어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때 숙소에 불이 나는 바람에 옥상에서 뛰어내린 뒤 고소공포증과 늑막염에 시달려 선수로 뛸 때 비행기로 이동하지 못해 고생했다. 그는 지금도 비행기를 타지 못한다고 한다.
야구하며 모은 돈으로 시작, 실패하는 경우도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2루수로 인정받는 배대웅(55) 씨는 1987년 은퇴한 후 지도자 생활을 위해 미국 메이저리그 LA 다저스 등으로 세 차례 연수를 다녀왔는데, 프로야구 감독 데뷔에 실패하고 지금은 여행사 대리점을 운영하고 있다. 이국적인 마스크의 박찬 씨는 은퇴 후 하와이로 이민 가 농사를 짓고 있다. 최근 그의 아들이 영화배우 오디션에 합격해 할리우드로 진출했다고 한다. LG 트윈스의 전신인 MBC 청룡의 원년 포수였던 김용운 씨는 야구판을 떠난 뒤 골프 레슨코치를 하다 2006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MBC 청룡 출신 가운데는 골프와 관련된 사람이 유난히 많은데 신언호(53) 씨가 실내골프장을 운영 중이고, 백인천(65) 원년 감독은 골프의류 사업을 하고 있다.
롯데 자이언츠 출신의 김문희 씨는 프로야구 초창기 때 포크볼을 던진 몇 안 되는 투수였다. 그는 부산에서 가업인 타이어 대리점을 16년째 운영해오고 있다. 최옥규 씨는 빠른 공이 주무기였던 선수인데 1983년 은퇴하자마자 요식업에 뛰어들어 성공했다. 지금은 건물 임대업을 하면서 서울 방배동에서 이름난 냉면집을 운영한다.
원년 후기리그 때 홈런왕을 거머쥔 박용성 씨는 야구판을 떠난 뒤 장인의 사업을 도와준 것이 계기가 돼 사업가로 변신했다. 지금은 연매출 150억원 규모의 플라스틱 사출 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초창기 롯데 선발투수였던 천창호 씨는 대전에서 아내와 함께 의류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박민규의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 등장해 이름이 다시 알려진 삼미의 주축 멤버 인호봉 씨는 제일유리에 근무하고, 그의 아들은 대를 이어 야구를 하고 있다. 김일권(52) 씨와 도루왕을 다투던 조흥운 씨는 경기 포천시에서 동생과 함께 유리사업을 한다.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으로 유명한 감사용(51) 씨는 여러 단체와 대학에 나가 강연을 하고 있다. 그는 소설(‘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과 영화(‘슈퍼스타 감사용’)로 유명해지면서 인생 경로가 바뀌었다.
프로야구를 떠난 뒤 야구판에 남지 않은 선수들은 대부분 야구를 하며 모은 돈으로 사업을 시작한다. 선수 시절부터 몸에 밴 성실성으로 성공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호성 씨처럼 실패한 사례도 없지 않지만….
이씨는 야구계를 떠나 사업에 뛰어든 뒤 경험 부족으로 부도를 맞은 후 사기꾼으로 전락해 기소중지됐다 엄청난 죄를 저지르고 급기야 자살했다. 그렇다면 운동에 전념하느라 학창시절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역대 프로야구 선수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불사조’ 박철순 정보통신업체 회장님
해태타이거즈 4번 타자 출신의 프로야구 원년 홈런왕 김봉연(56) 씨는 운동하는 틈틈이 공부를 했다. 배팅 스타일은 무식해 보일지 몰라도 그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원년 멤버로는 드물게 대학원을 다녔다. 원광대에서 운동생리학을 전공해 석사학위를 딴 것.
그는 해태 타격 코치를 그만두고 쉬고 있을 때인 2000년 12월, 극동대로부터 겸임교수 제의를 받았다. 그 뒤로도 학업에 매진해 2002년 3월 조교수로 정식 발령을 받았다. 그는 지금 후학을 가르치는 재미에 흠뻑 빠져 있다.
투창 선수 출신으로 독특한 투구 폼을 뽐내던 송유석(42) 씨는 광주 광산구 쌍암동에 자리한 ㈜루빌코리아의 사장이다. 특허권을 받은 ‘회전식 건물 건축 기술’로 5년 전 사업을 시작했다. 그가 확보한 기술은 남산타워 전망대처럼 건물의 바닥만 회전시키는 게 아니라 건물 전체를 회전시키는 것이다.
외야수로 활약한 왼손타자 출신 박재벌(40) 씨는 ‘재벌’답지 않게 꽃집을 운영한다. 원년 우승팀 OB(두산) 베어스 출신의 ‘불사조’ 박철순(52) 씨는 대장암과 싸우면서 정보통신업체 모던테크의 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박씨와 함께 OB 베어스 쌍두마차로 활약한 선우대영 씨는 1983년 시즌을 마치고 은퇴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지금은 애틀랜타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 그곳 교민들 사이에서 그를 모르면 간첩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사업이 번창하고 있다고.
OB 소속으로 첫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만루홈런을 터뜨려 최우수선수(MVP)로 뽑힌 김유동(54) 씨는 1996년 당시 자유민주연합 소속으로 총선에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지난해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때는 박근혜 전 대표의 특보로 일했다. 그는 무소속 또는 자유선진당 후보로 이번 4·9총선 때 인천에서 출마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1984년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양세종(50) 씨는 1990년 은퇴한 뒤 운송업에 뛰어들어 자리를 잡았다. 인천에서 MK해운을 운영하고 있다. 삼성 라이온즈의 초창기 때 이선희 권영호 씨와 함께 트로이카를 이뤘던 황규봉 씨는 부산에서 건설업을 하고 있다. 황씨는 1973년 필리핀에서 벌어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때 숙소에 불이 나는 바람에 옥상에서 뛰어내린 뒤 고소공포증과 늑막염에 시달려 선수로 뛸 때 비행기로 이동하지 못해 고생했다. 그는 지금도 비행기를 타지 못한다고 한다.
야구하며 모은 돈으로 시작, 실패하는 경우도
백인천 MBC 청룡 원년 감독은 골프의류 사업을 하고 있다(왼쪽), 프로야구 선수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전임교수가 된 김봉연 씨가 강의하고 있다.
롯데 자이언츠 출신의 김문희 씨는 프로야구 초창기 때 포크볼을 던진 몇 안 되는 투수였다. 그는 부산에서 가업인 타이어 대리점을 16년째 운영해오고 있다. 최옥규 씨는 빠른 공이 주무기였던 선수인데 1983년 은퇴하자마자 요식업에 뛰어들어 성공했다. 지금은 건물 임대업을 하면서 서울 방배동에서 이름난 냉면집을 운영한다.
원년 후기리그 때 홈런왕을 거머쥔 박용성 씨는 야구판을 떠난 뒤 장인의 사업을 도와준 것이 계기가 돼 사업가로 변신했다. 지금은 연매출 150억원 규모의 플라스틱 사출 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초창기 롯데 선발투수였던 천창호 씨는 대전에서 아내와 함께 의류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박민규의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 등장해 이름이 다시 알려진 삼미의 주축 멤버 인호봉 씨는 제일유리에 근무하고, 그의 아들은 대를 이어 야구를 하고 있다. 김일권(52) 씨와 도루왕을 다투던 조흥운 씨는 경기 포천시에서 동생과 함께 유리사업을 한다.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으로 유명한 감사용(51) 씨는 여러 단체와 대학에 나가 강연을 하고 있다. 그는 소설(‘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과 영화(‘슈퍼스타 감사용’)로 유명해지면서 인생 경로가 바뀌었다.
프로야구를 떠난 뒤 야구판에 남지 않은 선수들은 대부분 야구를 하며 모은 돈으로 사업을 시작한다. 선수 시절부터 몸에 밴 성실성으로 성공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호성 씨처럼 실패한 사례도 없지 않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