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 라이더’
두 청년(데니스 호퍼, 피터 폰다)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땅과 자신들의 존재의미를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이 영화에서 할리 데이비슨은 또 하나의 주인공이다. 속박을 싫어하고 자유분방함을 추구하는 이들의 여정에 함께했던 것이 바로 할리 데이비슨이었다.
두 사람은 캘리포니아를 출발해 남부로 내려가는데, 그것은 마치 이상에서 현실세계로의 이동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들은 보수적인 남부지방에서 자신들을 침입자로 간주하고 경계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들을 만난다. 급기야 한밤중의 습격으로 동행자인 잭 니콜슨이 죽음을 당한다. 그리고 그들 자신도 고속도로를 달리다 백인 운전자에게서 이유 없이 총알 세례를 받는다. 길가에 나뒹구는 할리 데이비슨과 허망한 죽음. 그것은 당시 젊은 세대의 꿈의 좌절이었다.
이 영화가 개봉된 때는 1969년. 거세게 분출했던 68세대의 열정이 기성세대의 바리케이드 앞에 꺾이고 있을 때였다. 미국은 케네디 대통령에 이어 존슨 대통령의 ‘위대한 사회’의 혼돈을 거쳐 노회한 정치인 닉슨이 등장하던 참이었다. 바야흐로 68의 추억이 백일몽처럼 막을 내리는 것을 애도하는 조가(弔歌) 같은 영화가 ‘이지 라이더’였다.
‘좌절한 68의 꿈, 이 꿈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라고 요즘 미국 언론이 쓰고 있다. 바로 ‘오바마 열풍’이 68세대의 꿈과 이상을 되살리고 있다는 것이다.
오바마 현상이 기성 정치권에 대한 혐오라는 점에서 68세대의 가치와 이상의 부활을 보여주는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40년 전의 기류와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의 ‘반(反)기성’ 열풍이 젊은이들만에 의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고소득 고학력층, 백인 중산층까지 흑인인 오바마를 지지하는 현상은 분명 새로운 변화다. 미국의 주류와 그 문화가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분석도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오바마 열풍은 기성세대에 대한 전면적 저항을 낳았던 1968년과는 다르다. 전면적 저항이라기보다는 안정 속 변화의 추구 정도가 아닐까. 한편으론 흑인 대통령도 용인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줄 만큼 사회가 기성화됐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다. ‘68년’은 다시 살아났지만 진짜 68년은 또 아닌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