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4월 경찰에 적발된 위조 그림들과 가짜 이중섭 그림 ‘물고기와 아이.(오른쪽)’
최근 검찰이 한국고서연구회 고문 김용수 씨가 갖고 있던 이중섭 박수근 그림 2827점을 모두 가짜라고 판정하면서 미술품 위작(僞作) 시장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자 한 미술계 인사가 던진 말이다. 미술계에 활황이 지속되는 한 위작을 사주하는 중간거래상(일명 나까마)의 움직임은 더 활발해질 것이고, 예술혼보다 돈이 앞서는 세태에서 돈의 유혹에 굴복하는 화가들도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번 사건이 흥미로운 것은 검찰이 위작 일부를 팔아넘긴 김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위작범은 밝혀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즉 사건 전모가 드러나려면 더 긴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는 뜻이다. 검찰은 이 사건에 대한 수사를 2년6개월 넘게 해오고 있다. 검찰은 감정 결과 그림의 제작 시점이 5년 전인 것으로 드러나 위작범이 밝혀져도 공소시효 5년이 지났기 때문에 형사처벌은 불가능하리라 판단하고 있다. 다만 이중섭 화백의 차남 태성(58·일본 거주) 씨가 김씨와 공모한 사실이 드러나 충격을 줬다. 이씨는 김씨에게서 ‘물고기와 아이’ 등 가짜 이중섭 그림 5점을 넘겨받아 이를 S옥션에 내놓았고, 판매 대금 9억1900만원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미술품 위작 사건은 올해만 해도 여러 차례 터져나왔다. 9월 초에는 충남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가 박수근 화백의 진품 ‘나무와 두 여인’을 위조해 팔아넘긴 서모 씨를 구속했다. 서씨는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면서 대한민국 미술대전 특선에 입상했을 정도로 촉망받는 화가였지만 재능을 사기행각에 바치고 말았다.
4월에는 서울 서초경찰서가 2006년 10월부터 2007년 3월까지 이중섭 박수근 천경자 등 유명 화가들의 그림 100여 점을 위조해 팔아온 혐의로 판매책인 복모(51) 씨 등을 구속하고, 위작을 그린 노모(64) 씨 등 3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수사 담당자들은 “미술품 위조단 수사가 마약 수사보다 더 힘들다”고 토로한다. 중간거래상과 위작범들이 점조직 형태로 움직이는 만큼 수사가 어렵기 때문이다. 4월 서초경찰서가 미술품 위조단을 검거할 수 있었던 것은 수사팀이 통신 수사를 통해 ‘운 좋게도’ 위작범의 행방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위작은 생각보다 널리 퍼져 있다. 한국미술품감정협회가 2003년부터 2006년까지 감정한 이중섭 작품 87점 중 60점이 가짜(26점은 진품, 1점은 불능)로 밝혀졌다. 또 한국화랑협회 산하 감정연구소에서 1982~2001년 의뢰받은 2525점의 미술품을 감정한 결과 30%가 가짜였다. 위작 비율이 높은 작가는 이중섭(75%), 박수근(36.6%), 김환기(23.5%), 장욱진(20.5%) 등이었다.
갈수록 수법도 대담해지고 있는 요지경 위조시장의 실태를 검찰과 경찰의 수사, 실제 위조와 유통에 관여했던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엿봤다.
원작 훔쳐 위조하기도
가짜 이중섭·박수근 그림을 팔아 구속된 한국고서연구회 고문 김용수 씨.
“먼저 위조하고자 하는 그림이 작을 경우 팸플릿이나 원본 그림에 습자지를 대고 구도를 베낀다. 100호 크기 등 대형 그림은 확대 복사한 뒤 다시 습자지로 베껴서 밑그림을 그린다. 요즘엔 환등기를 비춰 데생을 하거나 20배까지 확대할 수 있는 확대경 자를 이용하기도 한다. 오래돼 보이게 하는 물감도 있어서 원작의 색과 똑같이 표현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원작의 붓터치가 섬세할 경우, 사진으로 찍거나 복사해도 미세한 부분이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그대로 따라 그리기가 어렵다. 그럴 때는 원본을 훔치기까지 한다.”
올해 4월 검거된 미술품 위조단도 변시지 화백의 그림을 한 화랑에서 훔쳐 위작범에게 ‘공급’했다. 그런데 그림을 도둑맞은 화랑 주인이 도난신고를 한 것이 계기가 돼 경찰이 수사에 나섰고, 결국 일당이 검거됐다.
뒤집힌 인쇄 그대로 베껴 들통
당시 위작품 제작을 맡았던 무명 화가들은 각자 역할 분담도 했다. 극장 간판과 미국 수출용 장식 그림을 그려온 노모 씨는 주로 변시지와 이만익 화백의 인물화를, 박모 씨 등 3명은 경기도 안양 작업실에서 이중섭의 정물화를 그렸다.
김씨가 소장했던 가짜 그림들도 위의 방식으로 그려졌다. 흥미로운 것은 2005년 2월 3억1000만원에 팔린 가짜 이중섭 화백 작품 ‘물고기와 아이’의 경우 잘못된 원본을 베껴 위작임이 들통났다. 1977년 발간된 ‘한국 현대작가 100인 선집’에 나온 이 화백의 그림이 서귀포미술관 개관기념 화집에 제작자 실수로 좌우가 바뀌어 인쇄됐는데, 위작 제작자들이 이 잘못 찍힌 그림을 본떠 가짜 ‘물고기와 아이’를 그렸던 것.
김씨가 소장한 그림 가운데 박수근 화백의 가짜 서명이 적힌 ‘한복 입은 여인’ 등 19점은 1956년 중학교 2학년생이던 이모 씨가 스케치북에 그린 그림에 덧칠을 한 것이었다. 또 이중섭 박수근 두 화백이 사망한 뒤에 개발된 ‘펄 물감’을 위작에 사용해 가짜임이 들통나기도 했다.
물론 위작은 그림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미술계 인사 전모 씨는 “고서화나 고려청자도 진품처럼 감쪽같이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인사동에만 중간거래상 60여 명 활개
한 중간거래상에 따르면 인사동 주변에는 적어도 60여 명의 중간거래상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화랑이 하는 일과 같은 일을 한다. 화가에게서 그림을 사고, 그것을 컬렉터에게 팔아 이문을 남긴다. 다만 화랑이 일정한 공간을 두고 전시회를 여는 등의 활동을 통해 화가의 그림을 컬렉터에게 소개하고 구입한다면, 중간거래상들은 직접 돌아다니면서 화가와 컬렉터를 접촉한다. 이 과정에서 가난한 무명화가에게 대가의 작품 위조를 사주하기도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위작을 장안동 고미술시장과 대구의 중간거래상에게 팔아넘기다 덜미가 잡히기도 했다. 4월 구속된 복모 씨 등은 직접 위조한 그림과, 구입한 천경자 박수근 위작 38점 가운데 108점을 50만~150만원에 시중에 되팔아 1억8000만원을 챙겼다. 진품값으로 치면 1000억원대에 이른다.
공인 감정기구 도입해야
이런 위작품 유통을 막기 위해서는 공인된 감정기구 도입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최명윤 명지대 문화예술대학원 교수는 “위작 사건은 공인된 감정제도가 없어서 생기는 일이다. 또 감정전문가들의 불신을 해소하는 노력도 병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런 요구를 수용해 2007년 1월 화랑가 통합감정기구인 한국미술품감정연구소가 출범했는데, 3월 변시지 화백의 위작 ‘조랑말과 소년’을 진품으로 감정해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위작 사건은 우리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대영박물관 지하에는 위작들을 모아놓은 ‘블랙 컬렉션’이 소장돼 있고, 세계적인 미술품 경매회사 소더비도 위작 때문에 골치를 앓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많은 나라에서 작가의 모든 작품에 대한 정보를 모아놓은 카탈로그 레조네(Catalogue Raisonne) 등을 통해 위작시비를 차단해가고 있다. 위작이 설 자리를 잃게 하려면 공인된 감정제도뿐 아니라 위작자와 유통자에 대한 형량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이들에 대해 징역 3년 이하(사서명 위조) ‘솜방망이’ 처벌이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 교수는 또 “비정상적인 유통 경로로 유명 작가의 작품을 터무니없이 싼값에 사려는 컬렉터들의 자세도 바뀌어야 한다. 이 모든 게 돈이 예술보다 우선시되는 사회 탓이다. 그래서 이 지경까지 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