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외에 의존하지 않고도 일류대학에 입학하면 언론의 취재대상이 될 만큼 ‘특별대접’을 받는 게 우리 사회의 현주소다.
8월23일 오후 서울 강남구의 한 버스정류장. 여고생 3명이 수다를 떨고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이라는 이들에게 과외 하는 이유를 묻자 “학교 명예 때문에 이름은 절대 밝힐 수 없다”는 한 여학생이 이렇게 답했다.
“학원에서 배우지 않으면 점수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요. 당근 좋은 대학에 못 가죠. 특히 수학은 선행학습을 하지 않으면 안 돼요. 절대로! 학교수업이 학원에서 공부한 것을 복습하는 수준에도 못 미치거든요.”
이 학생은 “어떤 선생님은 평소엔 대충 가르치다가 시험기간이 닥치면 진도를 맞추기 위해 학생들이 듣든 말든 혼자 떠든다”며 “애들이 학원에서 죄다 배워오니 그렇게 가르치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의외의 대답이었다.
“강남 8학군에서, 그것도 명문 고교로 소문난 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치냐”고 반문하자 그는 “우리 학교뿐 아니라 인근 고교에 다니는 친구들 얘기를 들어봐도 상황은 비슷하다”고 했다. 3명의 여학생은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학교교육만으로 수능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얻는 건 하늘의 별 따기”라고 입을 모았다.
이번 취재를 위해 만난 15명의 초·중·고교생 가운데 과외를 받지 않는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어느 한 지역에 국한된 게 아니라 전국적인 현상이다. 자녀에게 과외를 시키지 않는 ‘간 큰’ 부모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들이 사교육에 의존하는 가장 큰 이유는 공교육을 불신하기 때문이다. 정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다수는 못 먹고 못 입는 한이 있더라도 자녀교육만큼은 그들의 능력 이상으로 투자(?)한다. ‘수익률’에 대한 계산 따위는 해보지도 않은 채 무작정 ‘묻지마’ 투자를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교육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입시제도
‘사오정’ ‘오륙도’ 등 조기 은퇴를 일컫는 은어가 사회에 보편화돼 있지만 부모들에겐 노후 대비보다 자녀교육이 우선이다. 왜 그렇게 사교육에 연연하느냐는 질문에 취재에 응한 10여 명의 학부모 대부분은 “별다른 이유가 있겠느냐”면서 “자녀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 든든한 직업을 얻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초석을 마련해주려는 것”이라고 답했다.
중학교 1학년과 초등학교 4학년, 유치원생 등 세 아이를 둔 최영숙(40·서울 강서구 내발산동) 씨는 지난해 말 인천에서 서울로 이사했다. 특목고를 목표로 공부하는 큰딸에게 좋은 교육환경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자녀들에 대한 사교육은 교육특구 중 하나인 서울 양천구 목동 학원가에서 해결한다.
최씨는 “영어와 수학, 피아노 등 엄마가 가르치기 버겁고 학교에서 제대로 배우기 힘든 과목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학원에서 가르쳤다”며 “남들 다 (학원에) 보내는데 우리 아이만 안 보내면 뒤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학원을 보내는 이유 중 하나”라고 털어놓았다.
과외에 의존하지 않고 가정에서의 영어교육을 통해 자녀 셋을 ‘영어 박사’로 키운 김연선 씨(왼쪽). 부모와 학교가 도와줄 수 없는 부분은 전적으로 학원 도움을 받는다는 최영숙 씨.
연세대 경제학과 89학번인 노태윤(37·지엔씨인터렉티브 대표) 씨는 ‘과외 없는 세상’에서 살았다. 1980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국회를 대신해 제정 공포한 151개 법률 중 과외금지법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일명 ‘전두환 과외금지법’의 테두리 내에서 부산에서 중·고교를 다닌 그는 “학교수업과 교사가 나눠준 유인물, 참고서와 몇 권의 문제집이 공부 수단의 전부였다”며 “사교육에 의존하지 않고는 변변한 대학에는 들어가기조차 힘든 지금보다 그 시절이 낫다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부모는 사교육비 때문에 허리 휘는 일이 줄어들 테고 자녀들은 학원을 전전하는 피곤함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돈 없는 집 자식들이 공교육 범주에서 공부해 명문대에 입학하는 확률이 예전보다 현저히 떨어지는 현실이 안타깝다. ‘개천에서 용 나던’ 시절은 이미 오래전 막을 내린 것 같다. 그 원인 중 하나는 일관성 없는 교육정책 탓이다.”(노씨)
1980년대 ‘나 홀로 공부’로 대학에 입학한 386세대라면 대부분 노씨의 주장에 공감할 것이다. 이들은 현재 사교육비를 지출하는 처지가 됐다. 자녀들에게 종종 “엄마 아빠는 과외 한번 안 하고 (명문)대학에 들어갔다”는 말을 건넸다가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라고 대꾸하는 그들과 갈등을 빚은 경험마저 있을 것이다.
자칭 자녀들의 교육매니저인 김모(46·서울 강남구 대치동) 씨는 고2와 중2인 남매에게 쏟는 사교육비가 월 300여 만원(방학 때가 아닌 학기 중)에 이른다. 사업하는 남편을 둔 그는 “투자하는 만큼 성적이 나온다”고 믿는다. 자녀교육에 ‘올인’한 김씨의 두 자녀 성적은 최상위권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영어 수학은 기본으로 가르쳤고, 논술과 과학의 선행학습도 했다. 자녀가 중학교에 들어간 이후 중간 및 기말고사에 앞서 국어와 사회는 내신 향상을 위해 학원 도움을 받았고 음악과 체육은 실기시험에 대비해 과외를 받았다. 김씨는 자신의 언니와 친지들의 자녀교육 방식을 답습했다. 사교육을 통해 명문대에 입학하는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봤기 때문이다.
남매 사교육비 월 300여 만원 “투자한 만큼 성적 나와”
서울교대 컴퓨터교육과 김갑수(46) 교수는 “과외를 많이 한 학생일수록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며 “특히 강남 출신 학생들 중 지방이나 강북 출신보다 창의력이 떨어지고 새로운 문제가 주어졌을 때 해결하지 못하는 학생이 많다”고 지적한다. 그는 “오히려 사교육을 많이 받지 않고 자기주도 학습을 한 학생들의 생존력이 강하다”며 “면접과 논술시험 또한 학원, 과외 등 정해진 틀에서 공부하지 않은 학생들의 성적이 월등히 높다”고 강조한다.
올해 서울대 공대에 들어간 윤모(19) 군과 연세대 어문계열 4학년인 김모(22) 군도 앞서 언급한 김씨 자녀들보다는 덜하지만 영어 수학 등 주요 과목은 사교육의 도움을 받아 대학에 입학했다. 김군은 “주변에 혼자 공부해서 대학에 온 친구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한때 사법시험을 준비했으나 그만둔 그는 “중·고교 때의 교육은 오직 대학 입학만을 위한 교육이었고, 대학에 들어와서는 전공과목 공부에 전념하기보다는 취업을 위한 학점관리 차원에서 공부하는 학생이 많다”고 전했다.
김연선(42·인천 부개동) 씨는 동네에서 소문난 인사다. 중2, 중l, 유치원생인 세 자녀 모두 영어를 잘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외국 한번 나가보지 않았지만 발음이 원어민 수준이다.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는 ‘영어박사’로 통한다. 김씨는 남들이 뭐라고 하든 학원에 의존하지 않고 집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영어 만화책과 비디오로 영어공부에 흥미를 불어넣었고, CNN과 영화 등을 통해 발음을 익히게 했다.
“큰애가 다섯 살 때부터 영어를 즐겨 사용할 수 있게 집안 분위기를 바꿨고, 지속적으로 영어에 관심을 갖도록 가르쳤어요. 남들 다 학원에 보내는데 불안한 마음도 없지 않았죠. 하지만 인내심을 갖고 아이들을 지켜보고 격려했더니 영어실력이 학원 수강이나 조기유학을 거친 아이들보다 뛰어나더군요.”
아쉽게도 김씨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자녀를 가르치는 부모가 아직은 많지 않다. 3년 전 큰아들에 이어 지난해 둘째 딸까지 민족사관고에 합격해 주위의 부러움을 산 주부 이미경(43) 씨도 소신껏 자녀교육을 시켰다. 그는 ‘사교육 1번지’인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살았지만 일부 필요한 과목 외엔 사교육을 시키지 않았고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힘을 길러줬다.
과외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녀교육에 성공했다고 호언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다. 14년째 EBS와 학원 강의를 통해 학생들을 가르쳐온 언어논술 전문학원 ‘진단과 대책’의 유국환(46) 원장은 사교육 의존도가 높은 현실에 대해 “학교교육만으로는 수능시험과 직결된 문제들을 해결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학교보다는 학원에서의 교육이 내신과 수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식이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빚을 내서라도 과외를 시키고 싶은 게 부모 심정이죠. 그래서 사교육을 맹신하는 거고요. 어쨌든 우리나라가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과외는 존재할 겁니다.”
취재 중 만난 한 학부모의 한숨 섞인 한마디가 남의 일 같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