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대 병사들의 재기발랄함은 군의 또 다른 자산이 될 수 있다. 그러려면 군 기강이 약해져서는 안 된다.
나는 1996년 1월15일의 추위를 또렷하게 기억한다. 육군훈련소(충남 논산시 연무읍 죽평리)는 매력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곳이었다.
“시발년!”
남자에게도 ‘년’이라는 속어를 쓸 수 있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훈련병은 기본적인 인권조차 누리지 못하는, 맹목적으로 복종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였다.
입대 첫날, 사회의 더러운 때를 씻으라며 밀려 들어간 목욕탕에서 30초 만에 비누질하다가 쫓겨났고, 식당에선 숟가락을 들자마자 “식사 끝!”이라는 명령을 들었다. 그날 밤 배가 몹시 고팠다.
육군훈련소, 헌병학교를 수료하고 서부전선의 한 헌병대에 배치됐다. “수감자를 때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선임병에게 맞았을 때의 참담함이란. 기자가 사회 전반에 남아 있는 일본식, 박정희식 군사문화와 그에서 비롯된 권위주의적 기제(機制)에 거부감을 갖게 된 건 아마도 그즈음부터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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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중순 육군훈련소를 11년 만에 찾았다. 육군훈련소는 한마디로 천지개벽해 있었다. 임무에 매몰돼 인권개념이 전무하다시피 하던 관행이 확 줄어들었다. 그러나 군 원로와 일부 전문가들은 이처럼 빠른 변화를 두고 군 기강 해이를 걱정한다. 군이 약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전 군대는 일본식이었다. 훈련도 제대로 시키지 않았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군만 일본식 잔재가 남아 있다. 선배들이 예전 잣대로 군 기강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장종대 육군훈련소장·육군 소장)
군대가 바뀌고 있다. 비합리적인 문화가 눈에 띄게 줄었으며 병사 인권도 소 닭 보듯 하지 않는다. 훈련병이 쓰는 화장실 비데는 옛날 군대에선 상상도 못할 일이다. 2005년 육군훈련소 중대장이 훈련병에게 인분을 먹인 사건이 눈앞에 겹친다.
자원해서 방독면을 벗은 훈련병들이 가스를 흡입하며 괴로워하고 있다(왼쪽). 육군훈련소 입소대대.
화생방 교장은 군 복무를 마친 남성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추억의 장소다. 그런데 요즘엔 사고가 날까 봐 가스실에서 훈련병의 방독면을 벗기지 않는단다. 몇몇 훈련병이 가스실에서 방독면을 벗어보겠다고 나섰다.
소풍 나온 듯한 훈련병 군기 찾아보기 힘들어
“너희들 몸 건강하지? 강제로 시키는 것 아니다. 자발적으로 지원한 거다.”
훈련병을 다루는 태도가 사뭇 조심스럽다. 뒷말이 나올까 봐 걱정하는 눈치다. 사진기자와 함께 K-1 방독면을 쓰고 가스실에 들어갔다. 방독면의 끈을 헐겁게 조인 때문인지 가스가 조금씩 들어온다. 헐거운 방독면만큼이나 화생방 훈련은 느슨했다. 군가를 부르며 눈물 콧물을 흘리던 옛 기억이 스쳐간다.
“가스실에서 군가를 부르게 하거나 앉았다 일어났다를 시킨 건 모두가 쓸데없는 짓이었죠. 사실 방독면 사용법만 제대로 숙지하면 되는데요.”(장교 A씨)
각개전투 교장에선 느닷없이 도끼와 칼을 쥔 이웃 주민이 나타났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사람이라는데 훈련장 소음이 시끄럽다며 행패를 부렸다. 이 사람이 소란을 피운 탓인지 훈련은 싱거웠다. “훈련병들이 편해 보인다”는 질문에 한 장교는 “여름이 문제다. 날씨가 더워서 걱정”이라며 엉뚱한 소리를 했다.
갓 입대한 신세대 훈련병들에게서는 군기라곤 찾아보기 어려웠다.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아니요. 재미있어요”라고 대답하며 키득키득 웃는다. 훈련 도중 조교들에게 스스럼없이 농담을 하고, 카메라를 향해 익살스런 표정을 짓는 훈련병도 있었다. 거리낌 없는 훈련병들의 행동에서 기강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꼭 소풍 나온 학생들 같았다.
“나는 솔직히 회의적입니다. 분대장(훈련소에서 ‘조교’ 구실을 하는 사병을 분대장이라고 부른다)들이 불쌍해요. 이런 시스템에서 제대로 통솔할 수 있겠습니까?”(장교 B씨)
요즘엔 육군훈련소에서 조교들이 훈련병에게 하대를 할 수 없다고 한다. 그 결과 구타, 가혹행위, 폭언 등 그릇된 행동이 일소됐다는 게 육군훈련소의 설명이다.
훈련을 마치고 생활관으로 돌아온 훈련병들은 자유로웠다. 한 훈련병이 장교에게 실없는 소리를 했다. 기자가 지켜보고 있는데도 이 훈련병은 장교의 뒤통수를 향해 입을 비쭉거린다. 옛 기준으로 보면 훈련병들의 관물대도, 몸가짐도 무질서하기 짝이 없었다. ‘여기가 신병훈련소 맞나?’ ‘신병훈련소가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육군훈련소 26연대 식당에 나붙은 “최고의 맛으로 여러분을 모십니다”라는 대형 문구와 “폭언, 욕설 청정지역에 있습니다”라는 표어가 눈길을 끈다. 청정지역은 기성부대에서도 대부분 운영한다. 군대 식사의 질이 더 나아지고, 전투력과는 무관한 ‘잡(雜)군기’가 일소돼야 한다는 데엔 누구도 이견을 달기 어렵다. 그러나 군의 기강이 바로서야 한다는 데도 토를 달 수는 없다.
병영문화가 급변한 것은 최근 2년의 일이다. 2005년 6월 전방 GP에서 사병의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난 직후 노무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국방부는 ‘병영문화개선대책위원회’를 발족했고, 2006년 1월엔 병영문화팀을 신설했다. 병영개선 사업의 대전제는 사병 역시 ‘제복 입은 대한민국 시민’이라는 것이다. 국정브리핑 2월14일자 기사 일부를 발췌해 옮겨본다.
“병영생활의 자율권이 확대됐다. 기존의 ‘내무반’이란 명칭도 ‘생활관’으로 바꿨다. 내무생활을 통제에서 자율로 전환, 일과 후 자유시간 또한 늘었다. 밤 12시까지 자율학습 등 자기계발을 위한 시간도 주어진다. ‘대표병사’ 제도를 둬 병사들의 의견을 부대관리에 반영하게끔 했다. 전자우편, 동영상 등을 통한 간접 면회도 가능하다 어학·전공·취업을 위한 인터넷 교육프로그램도 제공된다. 병영문화 개선을 위해선 간부들의 의식전환이 중요하다.”
군대의 변화 속도는 눈부시다. 침대형 생활관이 잇따라 들어서고, PC방 체력단력실도 향상되고 있다. 사병들은 인터넷도 자유롭게 쓸 수 있다. 보안조치를 마련해놓았으나 일부 부대는 싸이월드 등으로 자료 업로드가 가능했다. 병사들이 만든 UCC를 웹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까닭이다.
장교들의 의견은 ‘공식’ 인터뷰와 ‘비공식’ 인터뷰의 내용이 크게 달랐다. 취재팀이 비공식적으로 접촉한 영관급, 위관급 장교의 절대 다수가 병사들의 군기와 자세가 약해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중 두 장교의 주장을 들어보자.
“지휘관 대다수가 전투력 증대보다 사고 예방에 더 관심을 쏟고 있다. 사고가 발생하면 진급 때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나도 구습은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군은 더욱 강해져야 한다. 사병들이 더 편하게 생활하게끔 하겠다며 부대들이 경쟁하는 지금의 모습은 실망스럽다. 군이 그렇게 가서는 안 된다. 임무가 먼저다.”
“앞으로는 허물 없이 임기를 마치려면 병사 부모의 눈치까지 봐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사병 인권은 보호돼야 한다. 그러나 군기는 살아 있어야 한다. 미국식 군대로 바뀌어야 한다는데,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우리는 미군과 다르다. 그리고 미군의 군기는 일반의 생각과 달리 강하다. 국민이 바라는 건 나약한 군대가 아니라 강한 군대다.”
군은 더욱 강해져야 한다.
국정브리핑에 따르면 병영문화 개선사업은 인명사고 건수에서부터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고 한다. 2005년 전반기의 전국 군부대 사고 건수가 70건이었는데, 개선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2006년 전반기엔 8건이 줄어 62건이 됐다. 그러나 4월 총기사건, 3월 KF-16 전투기 추락사건 등 군 기강 해이에서 근본 원인을 찾을 수 있는 사고는 최근에도 일어나고 있다.
국방부는 2006년 전반기 병영문화 개선사항을 점검한 뒤 육·해·공군에서 12개 부대를 모범 사례로 꼽았다. 공군 17전투비행단은 국방부장관 표창을 받았는데, 공군의 여러 부대가 이 부대를 벤치마킹하기 위해 견학을 다녀갔다고 한다. 그래서 기자가 직접 가보았다.
17전투비행단은 기수별, 계급별로 생활관을 사용한다. 같은 단위부대 이등병과 병장이 일과 후엔 마주칠 일이 없는 셈이다. 생활관 분위기는 옛 군대의 내무반과 비교하면 학교 기숙사에 오히려 가깝다. 생활관에서 한방을 쓰는 병사들은 단위부대가 다르면 계급과 무관하게 서로 ‘아저씨’라고 부른다. 일병과 상병이 서로에게 반말하는 모습도 눈에 띈다. 이 부대가 기자에게 건네준 보도자료 일부를 소개한다.
“생활관에 돌아오니 동기들이 따뜻한 웃음으로 반갑게 맞아준다. 하루 동안 힘들었던 일, 즐거웠던 일들을 얘기하니 어느새 피로가 싹 가시는 기분이다. 샤워를 하고, 도서관에 가서 얼마 남지 않은 자격증 시험에 대비해 열심히 공부했다. 얼마 전까지는 저녁 시간에 미술동아리 친구들과 연습을 열심히 하고, 대민 봉사활동도 나갔다. 요즘은 시험이 코앞이라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저녁 점호도 간단히 인원보고만 하는 자율점호여서 저녁시간을 훨씬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내일은 신나는 토요일이다. 생활관 친구들과 부대 명물인 호숫가에 가서 잠깐 동안 낚시를 했다. 오늘 밤에도 월척을 낚는 꿈을 꿔야지….”
‘군대 맞아?’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자식을 군에 보내야 할 부모 처지에선 ‘꿈의 군대’다. 병사들의 생각은 계급에 따라 엇갈렸다. ‘본전 생각’ 때문인지 고참 병사들 중에는 “소속감이 없어졌다” “공동체 의식이 없다” “결속력이 떨어진다”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그러나 신참 병사들은 하나같이 “편하다” “좋다”면서 웃었다. 한 일병은 “‘꿈의 17전투비행단’이라고 적으면 된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이 부대에선 사병들이 병사자치위원회를 운영한다. 병사 대표 와 병사 임원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이 위원회는 동아리활동, 스포츠활동, 병사축제, 군 기강 확립 등 병사생활을 관장한다. 병사자치위원은 근무에서 제외돼 6개월 동안 병사들을 위한 업무만 본다. 이날도 병사자치위원회 회의가 열렸는데, 스포츠활동 관련 토의 등을 했다. 윤우 17전투비행단장(공군 준장)의 설명이다.
동기별 생활에 자율점호 “군대 맞나?”
“생활은 편하게 하고 임무는 철저하게 하면 된다. 힘들어야 군기가 나온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일과 후는 재충전의 시간이 돼야 한다. 하급자는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은 전투력과 사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선임병은 전문성과 경험으로 후임병에게서 존경받아야지 윽박지르고 긴장시켜 억지로 존경받는, 진정성 없는 충성은 극한 전투상황에서 힘을 발휘할 수 없다.”
공군은 장비 중심의 군대다. 따라서 사병간 결속력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할 수도 있다. 기자도 본전 생각을 느꼈나 보다. 윤 단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과유불급(過猶不及·지나친 건 모자람만 못하다)이라는 말이 떠올랐으니까.
육군도 동기별 생활관 도입을 심도 있게 검토하다가 부작용이 우려돼 접었다고 한다. 육군이 이 제도 도입을 검토했다는 것은 난센스다. 공군의 한 장교는 “사람 전력이 중요한 육군에선 절대로 도입해서는 안 되는 제도”라고 말했다.
지금 군은 병사들을 편하게 해주기 위한 경쟁으로 물불 못 가리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병사들은 하나같이 입대 전 생각했던 군대와 직접 경험한 군대는 달랐다고 말했다. 갓 제대한 사병들의 반응도 대체로 비슷하다. 한 영관급 장교는 “병사들을 지휘하는 게 아니라 부모처럼 보호한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고 털어놓았다. 취재팀의 눈에는 장교와 병사의 관계도 지나치게 느슨해 보였다.
“군의 사기와 기강이 우려되는 것은 현 정부의 대북정책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군인들이 대적관(對敵觀)에 큰 혼란을 느끼고 있어요. 서해교전 때 북한의 도발에 ‘쏠까요, 말까요?’ 하다가 목숨을 잃은 것도 느슨한 대적관 때문이었죠. 그런 일이 또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비군사 분야에선 포괄적인 상호주의를 취하더라도 군사 분야에선 구체적인 상호주의 정책을 취했어야 합니다. 병사들이 자신이 대비해야 할 목표가 북한군이라는 사실은 확실히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노무현 정부는 포퓰리즘적 정책으로 군을 약화하고 있습니다.”
김인종 예비역 대장(전 2군사령관)의 주장이다. 박용옥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부총장(전 국방부 차관)도 최고위 정책결정자들의 국방관이 심각한 문제라고 꼬집었다. 현 정부에서 요직을 지낸 조영길 전 국방부 장관, 남재준 전 육군참모총장의 시각도 마찬가지다. 남 전 총장은 김재창 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박승춘 전 정보본부장 등과 함께 박근혜 예비후보를 돕고 있다. 조 전 장관은 말을 아꼈으나 전시작전통제권 이양과 관련해선 목소리를 높였다.
북 위협 증가하는데 군 정책은 거꾸로
“반미 시위도 좀 하고, 한미연합사령부도 해체하고, 훈련을 못하게 하더라도 한미동맹은 변함이 없고 미군은 철수하지 않을 것이며, 유사시 미 증원군이 즉각 뛰어와 피를 흘려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화법이 참으로 난해하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군대 가서 몇 년씩 썩는다”고 말했다. 그 후 국방부는 군 복무기간을 18개월까지 줄여나가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취재 과정에서 만난 장교들은 단 한 명의 장성급 장교를 빼놓고는 전원이 “군 복무기간 단축은 부작용이 크다”고 답했다. 북한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18개월의 군 복무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송대성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노 대통령의 국방관이 지나치게 이념화, 정치화돼 있다”면서 “포퓰리즘을 연상케 하는 접근이 군을 약하게 만들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태효 성균관대 교수도 “병사의 질적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다”면서 “북한의 위협은 오히려 커지는데, 정부의 군 정책은 위험이 감소하는 것을 전제로 세워지고 있다”고 꼬집었다.
전방부대의 군 시설 개선은 눈부시다. 당연히 더욱 좋아져야 한다. 그러나 그만큼 군 기강도 바로서야 하지 않을까? 군 원로들의 우려가 ‘기우(杞憂)’인 것만 같지는 않다. 군이 키워나가야 할 소프트파워의 핵심인 병사들이 눈에 띄게 약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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