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미디어의 총아 IPTV(초고속 인터넷망을 이용해 제공되는 양방향 텔레비전 서비스)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방송과 통신의 장점만 취한 ‘방통 융합’의 결정체인 IPTV는 미디어 지형도를 근본적으로 바꿀 ‘괴물’로 평가받는다.
- 선진국은 물론 다국적 미디어 기업들도 수년 전부터 IPTV를 미래의 핵심사업으로 선정하고, 연구개발과 관련 제도 정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반면 ‘인터넷 강국’으로 통하는 한국은 IPTV 분야에서 제자리걸음을 계속하고 있다. 인터넷 중진국들까지 앞다퉈 다양한 IPTV 서비스를 내놓으며 경험과 기술을 축적하는데도 팔짱만 끼고 있는 것. ‘주간동아’가 4회에 걸쳐 시리즈를 마련한 것도 이런 안타까움과 답답함 때문이다. - 편집자 -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두고 있는 프랑스텔레콤(FT) 본사 전경(왼쪽). 건물 전면에 IPTV와 IP전화, 초고속 인터넷이 가능한 ‘오랑주 TV’서비스의 탄생을 알리는 홍보물이 내걸렸다. 독일 베를린에 본부를 두고 있는 도이치텔레콤(DT) 본사 모습. DT가 앞세운 ‘T’라는 브랜드는 프랑스 오랑주와 유사한 IPTV 서비스로 올해부터 독일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문제는 월말이 다가오면 각종 고지서가 우편함에 수북이 쌓인다는 것. 비용 부담 역시 만만치 않은 수준이다. 통신과 방송에 들어가는 비용이 한 달에 200유로(약 25만원)를 넘는다. 한국에서도 이 정도의 미디어 서비스 혜택을 누리려면 20만~30만원이 든다.
그런데 미셸 씨의 이런 고민이 올해 초 상당 부분 해결됐다. 프랑스텔레콤(FT)이 내놓은 오랑주(Orange)TV 서비스에 가입하면서부터다. 초고속 인터넷망을 근간으로 하는 오랑주TV는 텔레비전 방송은 물론 IP전화, 초고속 인터넷을 한꺼번에 제공하는 이른바 트리플(Triple) 서비스. 가격도 이전 통합요금의 50~60%에 불과해 프랑스 소비자들의 관심이 무척 높다.
세 가지를 한데 묶어 서비스하자 파급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먼저 IPTV를 통해 텔레비전 방송은 물론 미셸 씨가 좋아하는 프로축구 시청(유료)까지 해결할 수 있어 위성방송을 대체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VoD(Video on Demand·주문형 비디오) 서비스로 최신 영화를 1~3유로(1유로는 1250원)에 볼 수 있어 영화관이나 DVD 구입에 필요한 비용도 아낄 수 있게 됐다. 결과적으로 오랑주TV 서비스 하나로 집 안의 잡다한 미디어가 깔끔히 정리된 셈. 미셸 씨는 “유료 채널이 지나치게 많고 채널 변환 도중 멈춤 현상(time lag)이 일어나는 등 불만이 없진 않지만, HD급 화질과 높은 경제성 때문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IPTV 통해 축구경기 시청
유럽 현지에서 확인한 IPTV(Internet Protocol TV) 열풍은 생각보다 뜨거웠다. 지하철은 물론 시내 곳곳에서 IPTV 가입자를 모집하는 광고를 볼 수 있었다. 특히 유럽인의 삶의 일부인 축구 경기도 케이블TV나 위성방송이 아닌 IPTV를 통해 즐기고 있었다.
최근까지만 해도 TV는 편안하게 소파에 기대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려가며 보는 매체로 인식돼왔다. 많아야 10여 개 채널 가운데 보고 싶은 방송을 고르는 것이 선택의 전부였고, 그마저도 방송시간에 맞춰야 시청이 가능했다. TV에 ‘바보상자’라는 별명이 붙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 하지만 최근 디지털 기술의 발달과 방송통신 산업의 변화로 TV의 개념이 빠른 속도로 달라지고 있다.
사실 IPTV는 속성이 명확하게 정의된 서비스는 아니다. 그래서 국가별 또는 사업자별로 VoD, 인터넷TV, TV포털 등의 개념이 IPTV와 혼용돼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통신망을 기본으로 방송 서비스를 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통신망의 진화가 빨라지면서 HD급 화질까지 전송 가능해졌기 때문에 생긴 방송과 통신의 접합 현상이라고 볼 수 있는 것.
IPTV가 관심을 끄는 이유는 첫째, 방송과 통신, TV와 인터넷의 만남으로 무한한 변화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먼저 인터넷의 쌍방향성을 고스란히 TV 화면에 구현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그렇다고 TV와 개인컴퓨터(PC)가 곧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채팅, 검색, 쇼핑을 방송을 통해 할 수 있게 됐다. IPTV의 특징은 가장 인기 있는 콘텐츠인 축구 경기를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미셸 씨는 프랑스 축구리그 ‘올림피크 리옹’의 팬이다. 이제까지 미셸 씨는 방송사가 일방적으로 내보내는 한 가지 화면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IPTV를 통해서는 축구에 대한 거의 모든 정보를 TV 화면으로 확인할 수 있다. 실시간으로 스포츠, 토토, 정보 검색은 물론 베팅까지 할 수 있는 것. 뿐만 아니라 앞으로는 경기장에 배치된 카메라까지 선택해 볼 수 있을 전망이다.
둘째, 완벽한 개인화가 가능해 유료방송은 물론 맞춤광고 등 다양한 수익모델을 개발할 수 있다는 점이다. IPTV를 활용해 어떤 비즈니스가 탄생할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닷컴 붐이 일기 직전의 묘한 기운이 여기저기서 감지된다.
다양한 수익모델 개발도 가능
이 같은 IPTV의 잠재력은 이미 잘 알려졌지만, 서비스 수준은 걸음마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우리나라의 하나로텔레콤이 서비스하는 ‘하나TV’ 역시 VoD로, IPTV 전 단계다). IPTV가 시행되는 지역도 유럽을 제외하고 미국과 아시아 일부 지역에 국한된다.
인터넷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한국 사람들은 ‘유럽이 IPTV 선진국’이라는 사실에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실제로 유럽은 인터넷 분야에서 우리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초고속 인터넷 보급률이 50% 선에 그치기 때문. 유럽 대부분 나라의 주거 형태가 우리나라와 달리 아파트가 아닌 데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초고속 인터넷망 보급이 더딜 수밖에 없다. IPTV 서비스를 시작한 지 3년이 지난 프랑스만 해도 전 국민의 30% 정도만이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더구나 역사가 오래된 구도심은 땅을 파서 인터넷망을 깔 수도 없다. 소비성향 역시 보수적이기 때문에 인터넷 상거래 성장도 매우 더디다.
그럼에도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을 중심으로 한 유럽의 IPTV 열풍은 심상찮은 수준이다. 2005년 100만 가구에 지나지 않던 IPTV 가입자 수는 지난해부터 급증하기 시작했다. 미디어 부문 리서치 회사 ‘스크린 다이제스트’에 따르면, 2006년 말 유럽의 IPTV 가입자 수는 290만명, 매출은 4억7000만 유로(약 6조원)에 이른다. 올해는 배 이상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이중 막강한 기세로 IPTV를 확장하고 있는 나라는 단연 프랑스다. 지난해 말 유럽의 전체 가입자 중 프랑스인 가입자가 절반 이상인 200만 가구를 넘어섰다. 유럽 5대 IPTV 회사 가운데 프랑스계가 3개에 이를 정도. 프랑스의 국영 통신사였던 FT의 오랑주TV 서비스와 소규모 인터넷서비스 제공업체(ISP)에서 통신회사로 성장한 프리텔리콤의 FreeTV, 뇌프텔레콤(Neuf Telecom) 등 브로드밴드 사업자의 초고속통신망 네트워크가 급성장하면서 유럽시장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 중이다.
“프랑스에서 IPTV는 뉴미디어 시장을 위한 일종의 승부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새로운 시장을 선점하고 이를 바탕으로 유럽 전역으로 확장해나가겠다는 정부와 국민의 의지가 작용하는 셈이다.”(FT 스테판 프랑스 부사장)
이 밖에도 이탈리아 패스트웹(Fastweb), 스페인 텔레포니카(Telefonica) 역시 30만명 이상의 가입자를 확보한 숨은 강자다. 영국과 독일은 2007년을 IPTV 사업 원년으로 삼고 있는 듯한 분위기다. 얼마 전 두 나라의 대표 통신사인 브리티시텔레콤과 도이치텔레콤이 FT의 오랑주와 유사한 서비스를 출범했다.
인터넷망의 양과 질에서 아시아와 미국에 뒤처져 있던 유럽이 IPTV 분야에서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호남대 신문방송학과 김명중 교수는 “유럽은 방송 시스템의 독과점을 효과적으로 통제해왔기 때문에 신기술 IPTV가 나오자마자 서비스를 시작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또한 유럽 각국의 프로축구 리그와 다양한 언어에 바탕을 둔 방송 콘텐츠 역시 케이블TV 시대를 넘어 IPTV 시대를 추동하는 원동력이 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해 당사자 조율 법과 제도 정비
결국 인프라가 뒤떨어진 유럽에서 융합서비스가 잘되고 있는 이유는 제도가 앞서 있고, 정책이 정비돼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유럽에서는 1989년부터 ‘국경 없는 TV 강령’이 제정돼 유럽 통합과 기술발전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중요한 것은 ‘원산지 표시’와 ‘콘텐츠의 품질’이며, 국경과 자본에 막혀 원하는 방송을 볼 수 없어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
이로 인해 유럽에서는 방송사들과 방송 유통회사들이 효과적으로 분리될 수 있었다. 유럽의 방송사들은 콘텐츠 생산만 전담하기 때문에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방송 프로그램 제작업체에 해당한다. 공중파를 이용해 콘텐츠를 각 가정에 전달하는 것은 방송 유통회사 몫으로, 이는 주로 통신사들이 맡았다. 한마디로 통신자본이 통신과 방송 유통을 한꺼번에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IPTV라는 신기술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던 것.
특히 프랑스의 IPTV는 통신사업자와 방송사업자 간의 탄탄한 제휴를 기반으로 한다. IPTV 사업자인 카날새트(CanalSat) DSL은 위성방송사인 모회사 카날새틀리트(Canal Satellite)로부터 콘텐츠를 제공받아 망을 가진 오랑주나 FreeTV 등에 공급한다. 오랑주만 해도 채널이 어느새 100개를 넘어섰다. 비슷한 시기에 시작했지만 50개 채널에 그치는 이탈리아나 스페인보다 앞설 수 있는 배경에는 이처럼 콘텐츠가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2004년 IPTV만 따로 관리하는 제3의 법인 ‘전자커뮤니케이션 및 시청각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법’을 제정해 IPTV를 적극 후원하기 시작했다. 독일은 2007년 시장 진입의 자유를 보장하는 ‘텔레미디어법’을 제정했고, 영국은 올해 초 기존의 모든 방송·통신 관련 심의위원회를 하나로 묶어 오프콤(Ofcom)이란 기구를 만들어 미디어 시장에 대응하겠다고 공언했다. 이른바 2007년을 IPTV 원년으로 삼을 수 있을 만한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통신사업자들에게 IPTV 사업은 미디어 기업으로의 변신을 의미한다. 통신시장이 정체하면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갈구하던 통신사업자들은 IPTV를 ‘구세주’로 보고 있다. 단순 전화사업에서 벗어나 콘텐츠 유통이라는 미지의 땅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IPTV 셋톱박스를 활용하면 앞으로 펼쳐질 홈네트워크 산업에서도 일정 정도 주도권을 쥘 수 있다. 전자업계에서 통신사업자들을 경계하는 눈초리가 감지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다.
도이치텔레콤의 로첸스키 홍보담당관은 “결국은 양질의 콘텐츠와 소비자 중심의 고품질 서비스가 핵심일 뿐 미래를 예측하기에는 변화가 너무 빠르다”면서 “IPTV의 무조건적인 성공을 예단하지 말고 실정에 맞는 모델을 만들어가는 것이 관건”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