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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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바이러스’도 유행 탄다

  • 김경훈 한국트렌드연구소장

    입력2007-03-05 11: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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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망 바이러스’도 유행 탄다
    2005년 통계 결과 우리나라 인구 가운데 1만2047명이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우리나라가 자살률 1위라고 한다. 정부도 심각성을 느끼고 종합대책을 내놓고 있다. 당분간 자살자 증가 문제는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될 것이다.

    인간은 하루에도 수백 가지 선택을 하며 산다. 자살 역시 그 선택 중 하나다. 2006년에 개봉한 영화 ‘무도리’에는 자살을 선택한 인간 군상의 모습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영화는 코믹하게 전개되지만 하루 33명씩 자살하고(2005년 기준), 그래서 자살률이 교통사고 사망률의 1.5배에 이르는 한국의 현실은 결코 코믹하지 않다. 그런데 이런 침울한 문제가 하나의 문화이고 때로는 유행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면?

    최근 10여 년간 자살 급증 … 2005년엔 1만2000명 넘어

    자살도 문화의 하나임을 보여주는 사례는 동유럽 국가인 리투아니아에서 볼 수 있다. 자살률이 세계 최고인 이 나라는 인구 10만명당 44명(2000년)이 자살한다. 학자들은 이 나라의 경제적 상황도 문제의 하나지만 예민한 감성, 타인에게 속내를 내비치지 않는 관습, 리투아니아 남성들의 남다른 가부장적 책임감이 주된 배경이라고 분석한다.

    10여 년째 해마다 3만명 이상이 자살하는 일본에 대한 진단에서도 문화적 원인들이 제기된다. 세계보건기구(WHO)의 호세 벨트로테 박사는 일본의 경우 자살의 직접적 원인은 “과로나 실업, 도산, 집단 괴롭힘 등이지만 자살을 자신의 명예를 지키고 책임을 지는 등의 논리규범으로 인식하고 있다”며 자살이 문화의 일부라고 진단한다.



    그런데 이런 문화적 배경에 더해 자살에도 유행 요소가 있다. ‘자살, 도대체 왜들 죽는가’의 저자 마르탱 모네스티에는 “자살도 유행을 탄다”며 “비슷한 불행에 빠져 있다는 공감이 형성된 경우에는 ‘그 사람이 자살했기 때문에 나도 자살해야 한다’는 생각에 빠진다”고 설명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지금 한국의 자살률 증가에 유행 요소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수치에서도 나타난다. 1983년 자살자 수는 3183명이었다. 이 수치는 1990년대 중반까지 큰 변화가 없더니 1995년경부터 6000명대로 증가했다. 그러다가 2002년을 전후해 다시 폭증세로 돌아서 2005년에 1만2000명을 넘겼다. 이렇게 보면 한국인의 높은 자살률은 최근 10여 년 내의 유행과 같은 현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유행에는 경제양극화와 같은 구조적 원인도 있지만 자살을 좀더 손쉽게 선택하게 하는 ‘절망 바이러스’의 존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자살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유행처럼 번지는 전염성 자살은 고리를 끊는 간단한 메시지만으로도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다. 자살하고 싶은 날 일찍 잠드는 것 하나로도, 혹은 단순한 상담전화 한 통이 생명을 구한다. 다소 끔찍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자살자를 오히려 위협하는 것도 효과가 있다. 1845년 쿠바 흑인들 사이에서 자살 열풍이 일어났을 때 쿠바 당국은 자살자의 머리를 잘라 광장에 한 달 동안 걸어놓고, 몸뚱이는 불태워 바다에 뿌렸다. 그러자 자살 열풍이 사라졌다.

    아파트의 깨진 창문을 그대로 방치하면 그러려니 하다가 또 다른 창문이 깨지고, 이윽고 아파트 전체가 범죄 소굴이 된다는 유명한 이론이 있다. 자살 유행도 마찬가지다. 어떤 식으로든 자살 같은 ‘깨진 창문’을 우리 사회가 방치하지 않는다는 반복적인 메시지를 전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 비로소 절망 바이러스는 자살해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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