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이 향기로 말하는 시대다. 2007 향수업계의 화두도 ‘남성’이다. ‘롤리타 렘피카 오 마스큘랭’의 남성 향수 홍보이미지.
밸런타인데이를 하루 앞둔 오후, 한 남자가 작업실로 들어선다. 살인적인 교통체증을 뚫고 왔을 터인데 흐트러짐 하나 없이 말끔하다. 날렵해 보이는 무테 안경에 필시 타고난 곱슬이었을 머리카락은 헤어왁스를 덧입어 한결 산뜻해 보인다.
향에 남녀가 따로 있나 … 향수시장 성의 경계 와르르c
남성들에게 인기 있는 향수 ‘버버리 위켄드 맨’ ‘불가리 오 떼 블랑’ ‘롤리타 렘피카 오 마스큘랭’(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즉, 이처럼 자기 관리에 열심인 남자는 더는 감동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한데 복병이 숨어 있었다. 약속된 물건을 건네주며 싱글녀 쪽으로 몸을 기울인 남자, 그때 그녀의 코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킁킁. 오호! 결코 내놓고 코를 벌름거리진 않는다. 사회적 체면을 지키는 선에서 평상시보다 폐활량을 더 많이 늘리는 거다. 그러고는 말을 건넨다. 무심한 듯.
“버버리 위켄드 맨이네요.”
남자, 소년처럼 옅은 향수 혹은 미소로 답을 대신한다. 그의 첫 내음은 박하다. 마치 릴레이 회의 중의 무거운 침묵을 재치 있는 농담 한마디로 역전시키는 비즈니스맨의 위트와도 같다. 그 다음은 친근한 라벤더. 외유내강할 줄 아는 남자의 살가운 부드러움이 이럴 듯싶다. 그러고는 풀숲에 핀 들장미의 와일드한 달콤함이다. 어딘지 다듬어지지 않은 부분이 있어 여자의 손길이 필요한 그런 향기.
‘DKNY 비 딜리셔스 맨’
그가 떠났다. 그러나 공기 중에 그의 흔적은 남아 있다. 생전 처음 보는 누군가를 코로 느끼기 시작한다면 당신, 이들을 ‘변태’라고 몰아붙일 것인가?
아니나 다를까, 이 모든 것을 지켜본 남자 동료, 찌릿 흘겨본다. “요즘 점점 더 원초적으로 돼가는 거 알아?”
그렇다고 이 싱글녀, 결코 기죽지 않는다. “젊은 남자가 요즘 트렌드에 도통 깜깜하구먼!” 외려 되받아친다.
결론을 말해, 지금은 남자가 향기로 말하는 시대다. 물론 현대문명이 시작된 이래 남성들의 체취도 시대적 변화를 겪었다. 지금 어필하는 향은 로렌스의 파격적 성담론서인 ‘채털리 부인의 사랑’에서 장작 패는 근육질의 남성이 온몸으로 뿜어내는, 상상만으로도 부담스러운 와일드함이 아니다. 어떻게든 튀어보려는 X세대의 자극적인 향은 더욱 아니다.
한 국내 향수 브랜드의 홍보 담당자에 따르면, 요즘 젊은 남자들이 선호하는 향은 무겁지 않으면서도 모성을 자극하는 이른바 ‘완소남’의 따뜻한 이미지다. 최근 뜨거운 트렌드로 주목받는 연상연하 커플 붐이 향수의 선호도에도 반영됐다고 한다. 한 뷰티 에디터의 말은 이런 변화를 확실히 증명한다.
“여성 향수에 주로 사용되는 꽃 성분이 남성 향수에 가미되는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2005년에 첫 출시된 ‘디오르 옴므’는 여성 향수 성분의 대명사인 달콤한 아이리스꽃을 남성 향수에 최초로 사용해 유명해졌습니다.”
또 다른 뷰티 디렉터는 좀더 분석적인 시각에서 이런 변화를 짚는다.
“한마디로 성의 경계가 무의미해졌어요. 후각을 즐겁게 하는 특별한 것을 누리려는 욕망은 남자와 여자의 구분을 떠나 본능적인 것이죠. ‘프레시’의 향수에는 남녀 공용을 내건 제품이 많은데, 중요한 건 라이프스타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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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향수 성분인 아이리스꽃을 최초로 사용한 크리스찬 디오르 남성 향수 ‘디오르 옴므’.
덕분에 최근 패션업계는 물론 향수업계의 화두는 단연 남자다. 불과 4~5년 전, 세계적인 프랑스 뷰티 브랜드가 ‘나는 소중하니까요!’를 전 국민에게 유행시키며 20대 여성들의 조명을 받았던 것에 비하면 한마디로 격세지감이다. 하지만 이 시간 동안 스스로의 소중함을 깨달은 건 남성들이었다. 당시 뷰티와 패션업계에선 여심을 잡으면 남성 고객은 덤으로 따라오는 것으로 여길 만큼, 남자들의 스타일링엔 여성의 취향이 압도적으로 작용했다. 그러던 것이 현재는 확실한 역전세를 보이고 있다. 해외 명품 브랜드의 마케팅팀에 근무하는 한 남성은 자신의 향기에 대해 무척이나 뚜렷한 주관을 갖고 있었다.
“일단 올드한 느낌의 향은 질색이에요. 브랜드 인지도가 아무리 높고 평판이 좋아도 일단 식상한 듯한 향은 관심 밖입니다.”
주관이 확실한 그의 향수 선택은? DKNY의 ‘비 딜리셔스 맨’이었다. 사과 모양의 상큼한 패키지로 큰 인기를 얻은 DKNY 여성 향수의 남성 버전이다. 달콤하면서도 어딘지 커피 내음이 감도는 따뜻한 액센트가 특징인 이 향수를 그가 선호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흔하지 않거든요.”
그의 향수 취향이 그려진다. 잡지와 브랜드의 향수 샘플링을 통해 누구보다도 향에 대해 이모저모 꿰고 있는 것이다. 그는 취향이 다른 여자 친구가 사주는 향수가 달갑지 않다고 살짝 고백했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 이제 남성 향수는 여성에게 호감을 얻기 위한 것에서 한 걸음 더 진보해 자신을 표현하는 일종의 후각적 시그니처이자 자아의 표식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리고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첨단 디지털 시대에 젊디젊은 남자들이 후각의 힘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어느 싱글녀는 ‘생식생물학’ 이론을 접목했다. 남녀관계를 과학적인 시각에서 실험, 분석하는 생식생물학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에게 호감을 느낄 때 분명 서로 다른 관점이 존재함에도 공통적으로 후각의 이끌림에 강하게 반응한다는 점을 입증할 수 있다는 이론이다. 이 결과를 놓고 어느 집요한 과학자가 DNA 분석을 해봤더니, 신기하게도 서로 유사하지 않은 유전자를 가진 사람의 체취에 무려 80% 이상이 호감도를 나타냈단다.
또 다른 실험에서는 낯선 남성과의 첫 만남에서 여성들이 상대에게 공통적으로 호감을 느끼는 순위가 눈빛 다음으로 체취라는 것도 밝혀졌다. 페로몬을 처음 발견한 미국 여류 과학자의 실험에 따르면, 직장에서 여성 동료들에게 별 인기가 없었던 한 남자에게 페로몬 향수를 뿌리게 했더니 일주일 사이에 호감도가 무려 75% 상승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향수란 후각의 리비도를 더욱 문명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마음에 든다고 무작정 코부터 들이대는 불상사를 연금술에서 시작된 과학의 힘으로 순화한 결과가 10온스의 작은 유리병에 든 향수인 것이다.
누군가는 과학이 향수의 신비로움을 해친다고 불평할 수도 있다. 향기는 신비로움을 입고 있어야 제 맛이라 믿는 이들이 그럴 것이다. 그러나 늘 궁금했다. 과연 살짝 뿌리기만 했는데 흔들리는 이 마음, 저 작은 한 방울의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그리고 정말 남자들의 향기가 여자들을 매혹시킬 수 있을까? 답은 ‘그렇다’다. 신화보단 이성의 영역인 좌뇌를 믿고, 후각보단 시각의 힘을 믿는 디지털 시대의 영리한 신인류에게도 이것은 예외 없는 진리다.
남자와의 첫 만남 때 호감 순위 ‘눈빛 다음이 체취’
향수! 이 봄, 테스토스테론의 지배를 받는 남자들의 특권이자, 성의 구분을 훌훌 털고 자신의 라이프스타일과 본능적 감각을 스타일링할 줄 아는 남자들의 취향에 대한 가장 쿨한 답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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