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시험 채점에 공정성이 떨어진다’는 한 통계자료가 교육계에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경희대 사회과학부 황승연(47) 교수가 지난해 12월 말 국내 21개 4년제 대학 교수 291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공정하고 일관된 기준으로 논술 채점이 이뤄지는가’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44.3%(129명)가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설문에 응한 교수 중 75.3%(219명)는 논술고사 채점 경험이 있었다.
상위권인 한 사립대에서 지난 7년간 논술 채점을 맡아온 K 교수는 황 교수의 설문조사 결과에 깊이 공감했다. “현행 논술시험은 변별력이 거의 없고 채점도 객관적 기준에 의해 공정하게 이뤄진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 K 교수의 고백. 그는 “내 이름을 밝히는 것은 상관없으나 대학에 피해가 돌아올까 두렵다”며 익명을 전제로 인터뷰에 응했다. 대입 논술시험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비판한 K 교수의 솔직한 발언을 가감 없이 지면에 옮긴다.
심리상태와 컨디션에 따라 달라지는 채점 기준
논술 채점은 ‘체력전’이다. 그해 응시인원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한 교수가 4~5일간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지정된 장소에서 1000장에 가까운 답안지를 읽어야 하기 때문. 체력 소모가 큰 작업인 만큼, 노(老)교수보다 젊은 교수들이 주로 채점에 투입된다.
채점을 시작하는 당일 오전, 채점을 담당하는 교수들은 입학본부에서 나눠준 채점 가이드라인부터 읽는다. 가이드라인에는 출제위원이 문제를 낸 의도와 답안지에 어떤 내용이 담겨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담겨 있을 뿐, 점수 기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답안지의 점수 편차도 채점위원으로 참가한 교수가 알아서 정한다.
내 경우 채점을 시작하기 전 학생들의 답안지 20~30편을 무작위로 읽어본다. 학생들의 편차를 가늠해 나름의 점수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다. 우리 학교의 경우 응시자가 문제와 관련된 글을 썼다면 최하 60점은 준다. 나는 60점부터 100점까지 점수대를 5점 구간으로 나눠, 학생들이 평균 70~75점을 받도록 점수를 준다. 정교하게 평가하려면 1점까지 따져야 하지만, 그것은 현실적인 여건상 불가능하다.
한 답안을 꼼꼼하게 다 읽기는 어렵다. 나는 사선으로 글을 읽어 내리며 대강의 전개를 파악한다. 답안지 채점 결과는 교수의 그날 컨디션과 심리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교수의 성향에 따라서 한 답안지에 대한 평가도 천양지차다. 점수가 짠 교수도 있고 후한 교수도 있는데, 채점 마지막 날이 되면 이들이 주는 점수가 비슷해진다. 처음에 점수를 짜게 준 교수들은 뒤로 갈수록 후하게 주고, 반대로 처음에 후하게 준 교수들은 점점 짜게 주기 때문이다. 채점자가 4~5일간 일관된 기준을 갖고 채점에 임하기는 어렵다.
점수 편차가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학교는 최고점과 최저점을 제외한 나머지 점수로 평균을 낸다. 과거에는 5명의 교수가 한 팀을 이뤄 한 답안지를 검토했는데, 요즘은 3명으로 줄어들었다. 이런 여건에서 점수가 얼마나 정확하게 집계될지 의문이다.
나는 학생들의 글을 채점하면서 ‘테크닉이 내용을 압도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컴퓨터 세대인 10대들 중에는 악필이 많아 답안지를 채점할 때 짜증이 밀려든다. 학생들의 글에서 내용상 큰 차이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글의 외양’을 볼 수밖에 없다.
논술시험 변별력 없어
많은 대학이 논술의 중요성을 대외적으로 강조하고 있지만 실상은 다르다. 각 대학 입학처에서 채점위원들에게 ‘논술점수 편차를 크게 두지 말라’는 지침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대학들이 쉬쉬하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학생들의 답안을 살펴보면 눈에 띄는 글은 많지 않다. 비슷한 점수대의 학생들이 지원했기 때문에 논술 수준도 거기서 거기다. ‘논술 때문에 대학에 합격했다’는 학생들이 종종 매스컴을 타지만 이는 극소수다. 현행 논술시험은 1~2명의 특출한 학생을 가려내는 데 그친다.
학생들의 답안 중 70~80%가 학원에서 찍어낸 것처럼 정형화된 답안을 쓰고 있다. 예를 들어 환경문제에 대해 많은 학생들이 교토의정서, 오존층 파괴, 아마존강 벌목 등을 소재로 글을 썼다. 천편일률적인 답안은 곧 우리나라 교육수준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가이드라인 없으면 채점자도 못 푸는 논술문제
2008학년도 입시부터 통합교과 논술이 도입되는데, 문제를 출제해야 하는 교수들 처지에서는 걱정부터 앞선다. 한 분야만 공부해온 교수들이 다른 과목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겠는가. 더욱이 대학 교수들은 학생들이 고등학교 교과과정에서 무엇을 배우는지도 모른다.
‘대입 논술시험 문제가 지나치게 어렵다’는 비판에 100% 공감한다. 사실 채점 담당 교수들도 가이드라인이 없으면 논제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각 대학은 ‘논술 문제가 곧 대학의 수준을 보여준다’고 생각하기에 경쟁적으로 문제를 어렵게 출제하려고 한다. 이런 소모적인 경쟁은 모두를 힘들게 할 뿐이다.
일선 교수들은 논술 출제위원이나 채점위원이 되기를 꺼린다.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다. 채점 담당 교수들에게 떨어지는 일당은 몇만 원에 불과하다. 교수들이 채점을 마치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소주잔을 기울이면 이 수당은 금세 사라진다.
논술 채점의 객관성을 담보할 수 없는 현실을 대학 탓으로만 돌리기 어렵다. 교육부의 정책과 현실이 엇박자를 내며 초래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허술한 시스템 속에서 치러지는 대입 논술시험은 시간 낭비, 돈 낭비, 국가 에너지 낭비다. 어렸을 때부터 독서와 토론을 중시하는 교육제도로 개편되지 않는 한, 지금의 논술시험은 무용지물일 뿐이다.
경희대 사회과학부 황승연(47) 교수가 지난해 12월 말 국내 21개 4년제 대학 교수 291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공정하고 일관된 기준으로 논술 채점이 이뤄지는가’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44.3%(129명)가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설문에 응한 교수 중 75.3%(219명)는 논술고사 채점 경험이 있었다.
상위권인 한 사립대에서 지난 7년간 논술 채점을 맡아온 K 교수는 황 교수의 설문조사 결과에 깊이 공감했다. “현행 논술시험은 변별력이 거의 없고 채점도 객관적 기준에 의해 공정하게 이뤄진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 K 교수의 고백. 그는 “내 이름을 밝히는 것은 상관없으나 대학에 피해가 돌아올까 두렵다”며 익명을 전제로 인터뷰에 응했다. 대입 논술시험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비판한 K 교수의 솔직한 발언을 가감 없이 지면에 옮긴다.
심리상태와 컨디션에 따라 달라지는 채점 기준
논술 채점은 ‘체력전’이다. 그해 응시인원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한 교수가 4~5일간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지정된 장소에서 1000장에 가까운 답안지를 읽어야 하기 때문. 체력 소모가 큰 작업인 만큼, 노(老)교수보다 젊은 교수들이 주로 채점에 투입된다.
채점을 시작하는 당일 오전, 채점을 담당하는 교수들은 입학본부에서 나눠준 채점 가이드라인부터 읽는다. 가이드라인에는 출제위원이 문제를 낸 의도와 답안지에 어떤 내용이 담겨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담겨 있을 뿐, 점수 기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답안지의 점수 편차도 채점위원으로 참가한 교수가 알아서 정한다.
내 경우 채점을 시작하기 전 학생들의 답안지 20~30편을 무작위로 읽어본다. 학생들의 편차를 가늠해 나름의 점수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다. 우리 학교의 경우 응시자가 문제와 관련된 글을 썼다면 최하 60점은 준다. 나는 60점부터 100점까지 점수대를 5점 구간으로 나눠, 학생들이 평균 70~75점을 받도록 점수를 준다. 정교하게 평가하려면 1점까지 따져야 하지만, 그것은 현실적인 여건상 불가능하다.
한 답안을 꼼꼼하게 다 읽기는 어렵다. 나는 사선으로 글을 읽어 내리며 대강의 전개를 파악한다. 답안지 채점 결과는 교수의 그날 컨디션과 심리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교수의 성향에 따라서 한 답안지에 대한 평가도 천양지차다. 점수가 짠 교수도 있고 후한 교수도 있는데, 채점 마지막 날이 되면 이들이 주는 점수가 비슷해진다. 처음에 점수를 짜게 준 교수들은 뒤로 갈수록 후하게 주고, 반대로 처음에 후하게 준 교수들은 점점 짜게 주기 때문이다. 채점자가 4~5일간 일관된 기준을 갖고 채점에 임하기는 어렵다.
점수 편차가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학교는 최고점과 최저점을 제외한 나머지 점수로 평균을 낸다. 과거에는 5명의 교수가 한 팀을 이뤄 한 답안지를 검토했는데, 요즘은 3명으로 줄어들었다. 이런 여건에서 점수가 얼마나 정확하게 집계될지 의문이다.
나는 학생들의 글을 채점하면서 ‘테크닉이 내용을 압도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컴퓨터 세대인 10대들 중에는 악필이 많아 답안지를 채점할 때 짜증이 밀려든다. 학생들의 글에서 내용상 큰 차이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글의 외양’을 볼 수밖에 없다.
논술시험 변별력 없어
많은 대학이 논술의 중요성을 대외적으로 강조하고 있지만 실상은 다르다. 각 대학 입학처에서 채점위원들에게 ‘논술점수 편차를 크게 두지 말라’는 지침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대학들이 쉬쉬하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학생들의 답안을 살펴보면 눈에 띄는 글은 많지 않다. 비슷한 점수대의 학생들이 지원했기 때문에 논술 수준도 거기서 거기다. ‘논술 때문에 대학에 합격했다’는 학생들이 종종 매스컴을 타지만 이는 극소수다. 현행 논술시험은 1~2명의 특출한 학생을 가려내는 데 그친다.
학생들의 답안 중 70~80%가 학원에서 찍어낸 것처럼 정형화된 답안을 쓰고 있다. 예를 들어 환경문제에 대해 많은 학생들이 교토의정서, 오존층 파괴, 아마존강 벌목 등을 소재로 글을 썼다. 천편일률적인 답안은 곧 우리나라 교육수준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가이드라인 없으면 채점자도 못 푸는 논술문제
2008학년도 입시부터 통합교과 논술이 도입되는데, 문제를 출제해야 하는 교수들 처지에서는 걱정부터 앞선다. 한 분야만 공부해온 교수들이 다른 과목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겠는가. 더욱이 대학 교수들은 학생들이 고등학교 교과과정에서 무엇을 배우는지도 모른다.
‘대입 논술시험 문제가 지나치게 어렵다’는 비판에 100% 공감한다. 사실 채점 담당 교수들도 가이드라인이 없으면 논제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각 대학은 ‘논술 문제가 곧 대학의 수준을 보여준다’고 생각하기에 경쟁적으로 문제를 어렵게 출제하려고 한다. 이런 소모적인 경쟁은 모두를 힘들게 할 뿐이다.
일선 교수들은 논술 출제위원이나 채점위원이 되기를 꺼린다.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다. 채점 담당 교수들에게 떨어지는 일당은 몇만 원에 불과하다. 교수들이 채점을 마치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소주잔을 기울이면 이 수당은 금세 사라진다.
논술 채점의 객관성을 담보할 수 없는 현실을 대학 탓으로만 돌리기 어렵다. 교육부의 정책과 현실이 엇박자를 내며 초래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허술한 시스템 속에서 치러지는 대입 논술시험은 시간 낭비, 돈 낭비, 국가 에너지 낭비다. 어렸을 때부터 독서와 토론을 중시하는 교육제도로 개편되지 않는 한, 지금의 논술시험은 무용지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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