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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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이 불우이웃을 돕는다고?

국정원 양지나눔회 ○○원서 봉사활동 … 최고 통치자 아닌 국민에게 눈 맞추기

  • 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입력2005-11-30 14: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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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정원이 불우이웃을 돕는다고?

    장애 노인들이 생활하는 복지기관을 찾아 김장 담그기에 나선 국정원 양지나눔회 회원들.

    목하 국정원이 정치권과 검찰의 ‘칼날’을 받느라 죽을 지경이다. 정치권은 국정원법을 개정해 근본에서부터 국정원을 바꾸겠다며 덤비고, 검찰은 도청 문제를 갖고 국정원을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 검찰 수사는 이수일 전 국정원 2차장의 자살로 일시적 제동이 걸렸지만, 국정원을 향한 세간의 눈총은 따갑기 그지없다.

    이러한 때 국정원 직원들이 불우이웃 돕기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처음엔 피식 웃음이 나왔다. ‘간첩이나 잘 잡을 것이지 정보기관이 무슨 불우이웃 돕기를….’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국정원 개혁 논란이 시끄럽게 진행되고 있는데도 꿋꿋이 불우이웃을 돕고 있다면 그들도 뭔가 생각한 것이 있지 않겠는가.’

    아주머니 요원들 배추 절이기

    휴일인 11월19일 아침, 마감 때문에 새벽 3시에 누인 몸을 간신히 일으켜 국정원 양지나눔회 회원들이 ‘출동’했다는 성남시의 ○○원을 찾아갔다. 도시와 농촌이 만나는 곳은 늘 어설픈 느낌으로 다가오는데, ○○원이 바로 그러한 곳에 있었다. 이른 시간 탓으로 낮게 뜬 태양이 사금파리 같은 햇살을 쏘고 있고, 무서리에 치인 풀은 변색된 색깔로 청강(淸强)한 햇살을 반사하고 있었다. 그 차가운 햇살을 뚫고 큰 고무통을 굴리며 오는 사내들이 보였다.

    ‘양지나눔회’라고 쓰인 조끼를 갖춰 입은 국정원 직원들이었다. 이들은 전날 주문해둔 500포기의 배추를 씻어 소금에 절이기 위해 고무통을 굴려오는 것이었다. 차에서 내려 ○○원 마당으로 들어서자 같은 조끼를 입은 남녀 요원들이 배추를 쪼개 수돗물에 씻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감 있는 자세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배추를 죽죽 쪼갠 뒤 소금에 절이는 아주머니들과 ‘하명’을 기다리듯 어정쩡하게 둘러서 있는 아가씨들이 대비되는 모습으로 다가왔다.



    곁에 있던 한 회원을 붙잡고 “직원 부인들도 온 모양이죠”라고 묻자, 그는 “아닙니다. 아주머니로 보이는 분들은 우리 직원입니다. 직원 부인이 온 경우는 없을걸요”라고 대답했다. ‘국정원에는 아주머니 직원들도 있구나….’ 그제야 국정원 직원들도 우리와 비슷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림살이에 이력이 난 40대 여성 직원들은 씩씩하게 배추를 절이지만 많은 것이 서툴고 조심스러운 처녀 요원들은 몸을 사린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원은 불교 복지기관으로 기초생활수급권자이면서 병원에는 더 이상 입원해 있을 수 없는 노인 50명이 생활하고 있다. 노인들은 대부분 치매나 중풍 환자인지라 거동이 매우 불편하다. 이들을 돌보기 위해 사회복지사와 생활지도원 10명이 12시간 맞교대로 일하고 있다.

    국정원이 불우이웃을 돕는다고?

    양지나눔회 회원들이 거동이 불편한 장애 노인들을 목욕시키고 있다.

    5명이 50명의 노인을 돌본다는 것은 엄청난 격무가 아닐 수 없다. 노인들을 위한 식사와 설거지, 빨래 및 청소를 하는 데도 5명의 인력은 빠듯하게 돌아간다. 때문에 노인 목욕이나 김장 담그기 같은 ‘큰일’에는 서툴러도 좋으니 외부 지원을 학수고대한다.

    ○○원 안쪽의 작은 목욕탕에서는 일단의 양지나눔회 회원들이 거동 못하는 노인들을 목욕시키고 있었다. 젊은 남성 회원들이 둘씩 짝지어 ‘놓치지나 않을까’ 하며 노인을 안고 목욕탕으로 들어가 옷을 벗겨놓으면, 반바지 차림의 다른 회원들이 조심스럽게 노인을 안고 욕실에 들어가 머리를 감기고 온몸을 씻겨주는 것이었다. 목욕을 시켜주는 회원들은 노부모가 있음직한 40, 50대였다. 익숙한 솜씨로 노인을 목욕시키던 한 회원은 이렇게 말했다.

    “노인 냄새요? 물론 납니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한테서도 납니다. 저 또한 늙으면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노인을 떨어뜨리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적당한 물 온도를 맞추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언어장애를 가진 분들이다 보니 뜨거워도 뜨겁다는 표현을 못해 미리 딱 맞는 온도를 맞춰놓아야 합니다.”

    자신과 주변 돌보며 사는 평범한 이웃

    양지나눔회 회원들은 대부분 종교생활을 열심히 하거나 집안에 장애인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권력보다는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며 사는 평범한 이웃이었다. 점심 때가 되기 전 일이 끝났다. 마침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을 데리고 온 회원이 있어 붙잡고 말을 걸었다.

    “나는 중풍으로 쓰러진 장모를 모시고 살고 있다. 매주 성당에 다니는데 성당에서는 신자들과 함께 불우 어린이 돕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해 6월 우리 회사에서도 양지나눔회를 만든다기에 기꺼이 참여했다. 불우한 이웃을 돕고 나면 미사를 마치고 나왔거나 운동을 막 끝낸 것 같은 개운함이 밀려온다. 내 맘과 몸이 편안해지는데 왜 이 일을 마다하겠는가. 마침 우리 아이도 같이 와보고 싶다 하기에 데리고 왔다.”

    일을 끝낸 회원들은 떠나고 몇몇이 남아 ○○원 사무국장과 함께 간단한 토론에 들어갔다. 사무국장은 “복지시설에서는 수용돼 있는 분뿐만 아니라 일하는 사람도 소외돼 있다”며 복지재단의 현실을 털어놓았다. 복지재단은 보건복지부의 지원을 받기 때문에 이들이 받는 봉급은 ‘빤’하다.

    사무국장은 “사회복지사와 생활지도원은 보너스 없이 월 100만~150만원 정도를 받는다”고 말했다. 상당한 박봉이 아닐 수 없는데 12시간 맞교대로 일하다 보니 하루 8시간 노동을 규정한 근로기준법을 어긴다는 시비가 나올 수 있다. 실제로 강원도의 한 복지시설에서는 운영하는 사람은 사(使)가 되고 일하는 사람은 노(勞)가 돼 격심한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대화의 논의가 깊어지자 양지나눔회 회원도 참여했다.

    “과거엔 대부분 휴전선 너머에서 우리 사회를 흔드는 요인이 발생했다. 경제가 발전하자 부(富)의 분배를 놓고 갈등하는 형국이 추가되고, 남북 관계가 호전되면서부터는 더욱 복잡한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다. 전선(戰線)이 한두 개일 때는 위험을 효과적으로 틀어막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국정원 자체가 흔들릴 정도로 전선이 다양해졌다. 물론 국정원의 위기는 국정원의 도청이 초래한 것이지만, 그 근본을 살펴보면 국정원을 흔들어 우리 사회의 근간을 바꿔보겠다는 세력의 기도도 깔려 있다.”

    한 회원은 “국정원이 국민에게 신뢰를 받으려면 작은 사건에서부터 국민과 눈높이를 맞추는 노력이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라고 반문한 뒤, “봉사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복지기관의 어려움을 풀어줄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낸다면, 국민들은 우리를 인정해줄 것이고 우리는 국가의 안위를 지키게 된다”라고 자답했다.

    과거 국정원은 대통령 1인을 위한 기관으로 활동했다. 그러한 국정원에서 국민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장애 노인을 돕기 위한 양지나눔회가 자발적으로 생겨나 활동에 들어갔다. 활동 과정에서 이들은 부수적으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허점까지 찾아냈다. 단순한 봉사활동이 사회문제를 예방하는 효과까지 얻어낸 것이다.

    ‘몸을 낮춰야 한다.’ 국정원 안에 권력자가 아닌 국민과 눈높이를 맞추려는 직원이 늘어날 때, 국정원은 진정으로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하는 조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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