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성 선수가 영국의 프리미어리그로 떠난다고 하자 그를 키워준 스승 히딩크가 매우 서운해했다고 한다. 그러나 박 선수와 히딩크의 소속 구단이었던 네덜란드 아인트호벤팀은 사실 이적료로 큰돈을 챙겨서 그리 아쉬울 건 없을 것 같다. 재능 있는 선수들을 적은 비용으로 기용해서 비싸게 넘기는 데 능숙한 네덜란드 구단의 참모습이 다시 한번 확인된 셈이다.
프로축구팀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특유의 이 같은 상술은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 있다.
영어에서 네덜란드를 뜻하는 더치(Dutch)가 들어가는 말이 대개 부정적이 된 것은 네덜란드의 상술과 관계 있다. ‘각자 계산한다’는 뜻의 관용어가 돼버린 더치 페이(Dutch pay)만 해도 ‘더치’가 기분 좋게 쓰인 경우는 아닐 것이다. 그밖에도 잔소리가 많은 아저씨를 ‘더치 엉클(Dutch uncle)’, 여러 사람이 제각기 다른 노래를 함께 부르는 걸 ‘더치 콘서트(Dutch concert)’라고 하는 등이다.
네덜란드인에 대한 적대감이 묻어 있는 이런 표현은 모두 영어를 쓰는 영국 사람들의 심술 때문인데, 여기엔 역사적 배경이 있다. 영국이 해양 강국으로 발돋움하던 17세기 때부터 뛰어난 상술을 바탕으로 한 네덜란드가 국력이 급신장하면서 강력한 경쟁자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라이벌에 대한 반감이 영어 표현에 반영된 것이다. 영국은 인구나 영토 규모 면에서 비교도 안 되는 작은 나라와 부딪치니 네덜란드가 꽤나 당돌하고 맹랑하게 보였을 것이다.
당시 네덜란드가 급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여러 비결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게 개방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창의성과 자유로운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네덜란드는 당시 유럽에서 자유와 관용의 나라로 통했다. 유럽에서 종교와 사상의 자유가 가장 폭넓게 보장되고 있었던 나라가 바로 네덜란드였다.
데카르트가 숨막히는 가톨릭교의 영향 아래 있는 프랑스를 떠나 자유롭게 학문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찾아간 나라가 네덜란드였다. 또 볼테르가 성직자 계급의 위협을 피해 도망 간 곳도 네덜란드였다.
일본 막부가 쇄국정책을 취할 때 왜 유일하게 네덜란드에 대해서만은 문을 열어놨을까. 다른 유럽 국가들이 기독교를 포교하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을 때 네덜란드만은 기독교를 전파하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조선에 표류한 하멜과 벨테브레(박연)가 모두 네덜란드인이었던 것은 이들이 일본을 찾아오던 중 배가 파도에 떠밀려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었다.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이처럼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풍요를 구가한 17세기 네덜란드의 사회상을 보여준다. 네덜란드 화가인 베르메르의 동명 걸작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머리에 푸른색 두건을 두르고 한쪽 귀에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를 소재로 황금시기로 불렸던 당시 네덜란드를 그리고 있다.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화풍의 변화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종전 종교화나 역사화 일변도의 그림은 초상화, 정물화, 풍속화 등으로 다양화됐다. 네덜란드의 신흥 부르주아들은 확고한 자신감과 경제력을 내세워 신이 아닌 자신들의 일상적인 삶을 옮긴 그림을 화가들에게 요구하게 된 것이다.
네덜란드의 자유롭고 열린 분위기는 이후 수세기 동안 이어져왔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가 쓰인 곳이 네덜란드였던 것도 이 나라가 유대인에게 관대해 많은 유대인들이 살았기 때문이다. 대마초를 합법화한 것도 17세기 이래 면면히 이어 내려온 전통의 계승일 것이다.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은 페미니즘 속에 네덜란드풍을 느끼게 하는 영화다. 안토니아라는 여자와 그녀의 딸, 손녀, 증손녀까지 모계혈통 4대의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는 기존의 불평등한 가부장적 가족제도를 부정하는 완전히 개방되고 평등한 공동체를 보여준다. 아무도 가부장적 권력을 갖지 않는 이 가정의 무대가 네덜란드였다는 것은 매우 적절한 배경 선택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지금 이 네덜란드 역시 유럽을 휩쓸고 있는 극우주의의 역풍을 맞고 있다고 한다. 반이민 정책과 인종차별을 공언해온 신나치 정당이 이미 제2당이 돼 있다. 데카르트와 볼테르가 다시 살아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프로축구팀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특유의 이 같은 상술은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 있다.
영어에서 네덜란드를 뜻하는 더치(Dutch)가 들어가는 말이 대개 부정적이 된 것은 네덜란드의 상술과 관계 있다. ‘각자 계산한다’는 뜻의 관용어가 돼버린 더치 페이(Dutch pay)만 해도 ‘더치’가 기분 좋게 쓰인 경우는 아닐 것이다. 그밖에도 잔소리가 많은 아저씨를 ‘더치 엉클(Dutch uncle)’, 여러 사람이 제각기 다른 노래를 함께 부르는 걸 ‘더치 콘서트(Dutch concert)’라고 하는 등이다.
네덜란드인에 대한 적대감이 묻어 있는 이런 표현은 모두 영어를 쓰는 영국 사람들의 심술 때문인데, 여기엔 역사적 배경이 있다. 영국이 해양 강국으로 발돋움하던 17세기 때부터 뛰어난 상술을 바탕으로 한 네덜란드가 국력이 급신장하면서 강력한 경쟁자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라이벌에 대한 반감이 영어 표현에 반영된 것이다. 영국은 인구나 영토 규모 면에서 비교도 안 되는 작은 나라와 부딪치니 네덜란드가 꽤나 당돌하고 맹랑하게 보였을 것이다.
당시 네덜란드가 급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여러 비결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게 개방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창의성과 자유로운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네덜란드는 당시 유럽에서 자유와 관용의 나라로 통했다. 유럽에서 종교와 사상의 자유가 가장 폭넓게 보장되고 있었던 나라가 바로 네덜란드였다.
데카르트가 숨막히는 가톨릭교의 영향 아래 있는 프랑스를 떠나 자유롭게 학문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찾아간 나라가 네덜란드였다. 또 볼테르가 성직자 계급의 위협을 피해 도망 간 곳도 네덜란드였다.
일본 막부가 쇄국정책을 취할 때 왜 유일하게 네덜란드에 대해서만은 문을 열어놨을까. 다른 유럽 국가들이 기독교를 포교하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을 때 네덜란드만은 기독교를 전파하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조선에 표류한 하멜과 벨테브레(박연)가 모두 네덜란드인이었던 것은 이들이 일본을 찾아오던 중 배가 파도에 떠밀려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었다.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이처럼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풍요를 구가한 17세기 네덜란드의 사회상을 보여준다. 네덜란드 화가인 베르메르의 동명 걸작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머리에 푸른색 두건을 두르고 한쪽 귀에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를 소재로 황금시기로 불렸던 당시 네덜란드를 그리고 있다.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화풍의 변화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종전 종교화나 역사화 일변도의 그림은 초상화, 정물화, 풍속화 등으로 다양화됐다. 네덜란드의 신흥 부르주아들은 확고한 자신감과 경제력을 내세워 신이 아닌 자신들의 일상적인 삶을 옮긴 그림을 화가들에게 요구하게 된 것이다.
네덜란드의 자유롭고 열린 분위기는 이후 수세기 동안 이어져왔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가 쓰인 곳이 네덜란드였던 것도 이 나라가 유대인에게 관대해 많은 유대인들이 살았기 때문이다. 대마초를 합법화한 것도 17세기 이래 면면히 이어 내려온 전통의 계승일 것이다.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은 페미니즘 속에 네덜란드풍을 느끼게 하는 영화다. 안토니아라는 여자와 그녀의 딸, 손녀, 증손녀까지 모계혈통 4대의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는 기존의 불평등한 가부장적 가족제도를 부정하는 완전히 개방되고 평등한 공동체를 보여준다. 아무도 가부장적 권력을 갖지 않는 이 가정의 무대가 네덜란드였다는 것은 매우 적절한 배경 선택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지금 이 네덜란드 역시 유럽을 휩쓸고 있는 극우주의의 역풍을 맞고 있다고 한다. 반이민 정책과 인종차별을 공언해온 신나치 정당이 이미 제2당이 돼 있다. 데카르트와 볼테르가 다시 살아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