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수의 연기는 TV 드라마에서 공포, 코믹영화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당시 초등학교에 다니던 딸에게 김혜수는 “예쁘게 생겼네. 제인 마치 닮았다”고 말했다. 지금은 고등학생인 딸은 그 말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딸이 제인 마치 주연의 ‘연인’을 보고 싶다고 했지만 미성년자 불가의, 호환 마마보다 더 무서운 빨간 딱지가 붙은 그 영화를 보여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고, 얼마 전 김혜수 주연의 공포영화 ‘분홍신’ 시사회가 있었다. 나는 딸과 함께 시사회에 갔다.
시사회가 끝난 뒤 극장 무대에서 기자회견이 열렸다. 나는 이 영화가 그녀의 긴 연기 인생 중에서 기억에 남는 대표작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보통 공포영화에 톱스타들이 출연하지 않는 이유는 장르적 성격이 워낙 강해서 연기자들이 묻혀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또 대부분 피를 흘리고 몸이 절단되는 등 배우로서, 특히 여배우로서 이미지에 좋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홍신’은 김혜수가 있기에 ‘분홍신’이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그녀와 그녀의 딸로 출연하는 박연아가 등장할 때, 영화는 생기를 띠기 시작한다.
그녀의 큰 눈 관객들 공포 확대재생산
한 소녀가 숲 속에서 주운 분홍신을 신자, 계속해서 춤을 추게 된다. 견디다 못한 소녀는 울부짖는다. 제발 춤을 멈추게 해달라고. 결국 소녀는 발목을 자른 뒤에야 춤을 멈출 수 있었다는 ‘분홍신’은 동화 중에서도 가장 잔혹한 동화다.
‘와니와 준하’를 만든 김용균 감독은 이 동화를 모티브로 해서 새로운 공포 이야기를 만들었다.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분홍신을 신었던 어느 무용수의 한 맺힌 삶이 분홍신을 통해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이야기는, 비록 연결고리가 매끄럽지 못하지만 김혜수의 연기로 훨씬 빛나게 표현되었다.
김혜수의 얼굴은 관상학적으로 공포영화에 매우 잘 어울리는 구조다. 그녀의 큰 눈은 관객들로 하여금 극중 배역이 느끼는 공포를 확대재생산하는 데 기여한다. 지하철 플랫폼에 단정하게 벗어놓은 분홍신을 어느 여고생이 탐욕스럽게 신자 발목이 절단되는 끔찍한 도입부부터 공포는 시작되지만, 영화의 중심을 튼튼하게 잡고 있는 것은 심리적 공포다. 그리고 그것을 극대화한 이가 바로 김혜수다.
김혜수는 남편이 다른 여자와 통정하는 것을 목격하고 어린 딸과 함께 집을 나와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의사 선재 역을 맡았다. 그녀는 “나는 영화 속에 이미 빠져 있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보기가 어렵다. 그러나 공포영화인데 스토리가 재미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갖고 영화를 봤다”고 말했다.
‘분홍신’은 김혜수 덕분에 비로소 분홍신의 색깔을 갖게 된다.
“촬영 때 너무 고생”… 개봉 첫주 흥행 성적 2위
“공포영화를 찾는 여름 관객들은 재미있으면서도 무섭고 시원한 느낌을 즐기기 위해 온다. 나는 ‘분홍신’이 관객들이 원하는 기대치에 근접하리라 생각한다. 무엇인가를 얻고 느끼고자 하는 관객들이라면, 이 영화가 인간의 본능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욕망에 대해 말하려 하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나 영화 자체로도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공포영화를 원하는 사람들은 충실한 재미를 얻을 것이고, 그 이상을 원하는 관객들이라면 새로운 것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김혜수의 말은 기자회견장 분위기를 압도했다. 그녀는 감독보다 훨씬 더 작품에 대해 날카로운 평가를 내렸다. 영화의 핵심을 짚어나가는 김혜수의 발언에서 연륜을 가진 배우로서의 관록이 느껴졌다.
“김혜수의 연기를 보면, 오랜 연기 경력이 그냥 쌓인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우선 근육 쓰는 게 다르다. 특히 얼굴 근육을 쓰는 게 장난이 아니다. 영화를 봐서 알겠지만, (그녀의 얼굴표정 연기에는) 그냥 연기하는 사람들이 따라갈 수 없는 디테일이 있다.”
그러나 김혜수는 ‘분홍신’ 촬영이 너무나 힘들었다고 했다.
“핏물 뒤집어쓰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정확한 사인을 받고 정확하게 움직여야 되는 중요한 신이다. 천장에 설치된 커다란 양동이에서 피가 쏟아지는 것을 카메라 세 대가 잡고 있었다. 그런데 감독님이 사인하기도 전에 통이 열려서 핏물이 쏟아졌다. 진짜 피가 아닌 줄은 물론 알지만 피의 색깔, 차가운 느낌, 그런 게 나를 힘들게 했다. 더구나 속상한 건 피가 쏟아질 때의 내 표정을 카메라가 잡지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나만 힘들었던 것은 아니다. 나도 다시 씻고, 스태프들도 공사 다시 하고, 그리고 또 찍었다. 엔딩 신도 4박5일 밤낮으로 촬영했는데, 추웠고 공기가 너무 안 좋았다. 그야말로 초긴장 상태에서 촬영했다. 롱테이크가 많기 때문에 엄청난 체력이 소모된다. 그때 아팠다.”
이렇게 고생해서 찍은 ‘분홍신’은 개봉 첫주 흥행 성적이 ‘미스터 앤 미세스 스미스’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배트맨 비긴스’를 3위로 따돌린 괜찮은 성적이다.
김혜수는 언제나 당당하다. 자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내면에는, 그 당당함을 유지하기 위해 흘리는 피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혜수는 지난 20년 동안 많은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하면서 두 번이나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는 등 배우로서는 거의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그러나 일반 관객들은 그녀를 연기파 배우로 평가하지 않는다. 김혜수 하면 머릿속에 먼저 노출 심한 의상을 걸친다는 이미지가 강렬하게 자리 잡는다. 그렇다고 그녀가 베드신을 자주 찍은 것도 아니다. ‘얼굴 없는 미녀’의 베드신이 거의 유일하다. 그럼에도 김혜수의 육감적인 몸과 공식석상에서의 대담한 의상이 그녀를 어떤 특정의 이미지로 굳게 만들었다.
90년대, 김혜수는 배우로서의 정체성 찾기를 시도한다. 그 이전에는 어른들이 권하는 배역을 기계처럼 했다. 극중 캐릭터에 공감할 수 없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그 과정을 거쳐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와 같은 근본적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기 시작했고, 결국 자신 있고 당당한 여배우로서의 자아 찾기에 성공했다.
남성 위주의 가부장제 사회인 한국에서 그녀의 이런 노력이 쉽게 결실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고통스럽고 힘든 과정을 거쳐 김혜수는 30대 중반의 나이를 넘어서서 진짜 배우로 우리 앞에 우뚝 섰다. ‘분홍신’은 그 결과물이다. 나는 이 작품이 그녀 인생의 또 다른 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지금부터 훨씬 더 좋은 작품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기를 바란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20대 초반의 감성에 집중되어 있는 현재의 영화제작 풍토가 시야를 넓혀야 한다.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