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갑수 문화평론가 dylan@unitel.co.kr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표현의 자유를 논해야 할 오늘날의 핵심 대상은 영화와 텔레비전과 게임이고 그 내용은 폭력성과 선정성의 문제로 보이는데, 이게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결론에 다다른 것이다. 입 달리고 눈 달린 사람이라면 다 한마디씩 하는 사안이니 뭐 새로운 얘깃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시 한번 보라. 어쩐지 돈독에 취해 돌아가는 듯하지 않은가. 막 가자는 것 아닌가. 이대로 되겠는가.
돈벌이에 혈안이 돼 있으면서 무슨 예술적 고뇌를 운운하는가
원래의 생각은 이랬다. 인간에게는 문명 이전의 동물적 본성이 남아 있는 법이다. 문명화 과정은 인간을 제도로써 꽁꽁 옭아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야수성을 배출해줄 통로가 필요하다. 스포츠가 바로 그것이고 창작예술의 상당 부분이 그 몫을 담당한다. 이때 필요한 게 상황 논리다. 한국의 사회 상황을 보자면 유교 가부장제와 군사통치 문화라는 이중의 억압이 작용해왔다. 한국인들은 이 이중의 억압에 완전히 세뇌되어 자유로운 감정표출이 무엇인지조차 잊어버린 상태다. 따라서 충격적인 방법으로라도 상황을 돌파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모든 표현행위에 완전한 자유를 부여하는 것이다. 더불어 선진사회일수록 반인륜적 예술행위가 발달해 있는데, 그것은 윤리의 경계를 넘나들어야 인간내면의 지평이 넓어지기 때문이다. 완전무결한 표현의 자유는 성장과 성숙의 지표이다…. 이것이 종래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런 생각이 잘못된 게 아닌가 느껴지는 일이 봇물 터지듯 밀려들어 온다. 일진, 이진 학생들이 보통아이들에게 일과처럼 폭력을 행사한다고 한다.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여학생들이 상말을 일상어처럼 입에 달고 산다. 하지만 어디선가 청소년 시절의 통과의례를 매스컴이 과장하는 것이라는 반박이 들려온다. 매 맞는 아내와 자식에게 얻어맞는 아버지와 학대받는 노인으로까지 가정폭력이 확대된다. 이 역시 실제로 늘어난 게 아니고 사례 보고가 증가했을 따름이라는 반박이 따른다. 기회만 닿으면 일단 ‘하고 보자’는 러브호텔 풍속은 거론하기조차 새삼스러운데 이 또한 성 개방 예찬에 맞물려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어느 쪽이 옳은가. 생각을 좁혀본다. 먼저 문제를 사회구조와 역사에서 찾지는 말자. 그런 거대 논리가 논점을 오히려 희석시킨다. 내가 볼 때 문제의 주요 출발점은 미디어의 상업주의에 있다. 움베르토 에코가 정의한 바에 따르면, 포르노란 줄거리에 통합되지 못하는 장면이 단지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길게 이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른바 대박 한국영화들은 어떤가. 오로지 치고받고 찌르고 쏘는 그 잔혹 화면이 작품의 예술성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그거 15분 가위질했다고 펄펄 뛰며 고소를 남발하는데 나중에 복원 화면을 보니 포르노, 즉 없어도 그만인 눈요깃감일 뿐이었다. 오늘 저녁 당장 아무 텔레비전 채널에서나 드라마를 보라. 언제 어디서나 소리 지르고 던지고 히스테리 부리는 장면이 나온다. 불가피한 예술적 선택일까? ‘신지식인’으로 예찬받으며 성장한 글로벌 상품 게임 쪽은 어떤가. 시종일관 때려 부수고 쳐 죽이지 않는가.
폭력 영화, 히스테리 드라마가 폭력과 히스테리를 부르는 게 아니고 작품은 단지 현실의 반영일 뿐이라는 변명이 횡행한다. 실물경제이론에 비춰볼 때 그 말은 거짓이다. 오늘날은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 당대의 문화권력자들, 그러니까 영화감독, 드라마 제작자, 게임 생산자들은 고민 좀 해야 한다. 그리고 솔직해져야 한다. 적어도 지난 시대에 소설가, 화가, 음악가, 연극인들이 지녔던 책무감을 한번 되짚어보는 성의는 필요하지 않을까. 사실상 돈벌이에 혈안이 되었으면서 짐짓 표현의 자유, 예술적 고뇌를 운운하고 있진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