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때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목판본으로 인쇄한 천문도.
이성계가 자신이 하늘의 명, 즉 천명(天命)을 받아 나라를 세웠다는 것을 공표하기 위해 이 천문도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요즘은 투표를 통해 한 표라도 더 받은 사람이 대권을 쥐지만, 옛날이야 어디 그런 것이 있을 수 있었는가. 먼저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하고는 이런저런 수단을 동원해 집권을 합리화하면 그뿐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중국에 이보다 좀더 오래된 석각(石刻ㆍ돌에 새긴 것) 천문도가 하나 있어서 우리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석각 천문도로 기록되고 있다. 또한 이 자랑스런 문화재에는 이를 만든 11명의 이름이 함께 새겨져 있다. 그 가운데 세 사람의 이름이 눈에 띄는데, 글을 쓴 권근(權近, 1352~1409), 천문계산을 한 유방택(柳方澤, 1320~1402), 그리고 글씨를 쓴 설장수(薛長壽, 1341~99)가 그 주인공이다.
과학사로 친다면 당연히 천문학자였던 유방택이 중심이지만, 그동안 그에 대해서 알려진 내용이 거의 없었다. 필자 역시도 공부하던 중에 우연히 그의 이름을 발견하고 메모해놓은 카드가 전부일 뿐이다. 그것은 조선 후기의 역사책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 나오는 기록으로 충남 서산에 있는 인정서원(仁政書院)에 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는 간단한 내용이다. 그때만 해도 그가 언제 어디서 태어나, 어떤 벼슬을 했는지 등을 전혀 알지 못한 상태였다.
2월 말, 아마추어천문학회 이태형 회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서산에서 유방택의 후손들이 그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얻어본 자료 가운데 그에 대한 행장(行狀)이 있는데, 거기서 비로소 나는 그가 태어나고 죽은 해를 알았다. 또한 유방택의 본관이 서산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이를 근거로 하여 조사해보니 그의 후손들의 활동상이 조금씩 밝혀져 흥미로웠다. 하지만 정작 그에 대한 자료는 찾기가 어려웠다. 유방택이 고려 말에 천문관서인 서운관(書雲觀)의 판사(判事)를 지냈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활약을 한 천문학자였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는 국보인 ‘천상열차분야지도’를 위해 천문계산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 과학사에 중요한 인물임이 틀림없다. 더구나 고려 말에 천문기관의 수장을 역임했고 조선왕조 초기에 대표적 천문학자로 활약했으니, 그는 고려 말 시작된 중국 역법 배우기에 주도적 위치에 있던 인물임이 분명하다. 그렇게 시작된 천문연구는 세종 24년(1442)의 위대한 성과 ‘칠정산(七政算)’으로 발전하기에 이른 것이다. 칠정(七政)이란 칠요(七曜)와 같은 뜻으로, 해와 달과 다섯 행성을 뜻한다. 중국의 베이징이 아닌 서울을 기준으로 그것을 계산할 수 있게 되면서, 세종 때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맞는 역법(천문계산법)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는 곧 처음으로 일식, 월식 등을 완벽하게 예보할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한다.
늦은 감이 있지만 서산이 낳은 위대한 천문학자 유방택을 고향 사람들이 알아주기 시작했다니,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른 지역에서도 이와 비슷한 노력을 한다면,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이 더 튼튼한 전통을 만들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