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목동의 자원순환테마전시관 판매장에서 녹색상품을 고르는 주부.
이곳 판매장은 하루 평균 200여명의 주부들이 찾는다. 원하는 물품을 사려면 오전에 들러야만 헛걸음을 피할 수 있다는 게 판매직원의 귀띔이다. 오후가 되면 그날 공급된 물품이 동나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가게에서 만난 주부 조영란 씨는 “백화점이나 대형할인점에서 파는 유기농 먹거리에는 그다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제철 과일이나 채소가 아닌데도 유기농이라면서 파는 경우가 있어요. 그렇다면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했다는 얘기잖아요. 여기서는 제철 먹거리만 구할 수 있고, 인터넷에서 생산자 정보를 볼 수 있으니 안심이 돼요. 여기 과일은 옛날 맛이 난다고 할까요. 아주 새콤달콤한 게, 먹어보면 달라요.”
“제철 과일과 채소 옛날 맛”
조 씨는 먹거리뿐 아니라 생활용품도 이곳에서 친환경 제품으로 사다 쓴다. 그러나 일부 용품의 경우 기존에 써오던 것에 비해 ‘불편’한 것도 사실이다. 가령 세탁비누는 일반 제품보다 거품이 훨씬 덜 나기 때문에 충분히 깨끗하게 빨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마음이 편하거든요. 수질을 오염시키지 않으니까요. 합성세제를 사용해 흰 거품과 검은 때가 섞인 물이 흘러 내려가는 걸 볼 때마다 죄 짓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2∼3년 전부터 우리 사회에 불기 시작한 ‘참살이(웰빙)’가 ‘로하스(Lohas)’로 진화하고 있다. 로하스란 ‘건강과 지구의 지속 가능성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들의 생활양식(Lifestyles of Health and Sustainability)’의 준말. 개인적인 건강을 추구하는 참살이를 뛰어넘어 사회가 함께 참살이하자는 ‘사회적 참살이’를 의미한다. 몸의 건강뿐 아니라 ‘땅의 건강’을 생각하는 유기농 먹거리 소비에서부터 제조 과정이나 사용 후 환경에 유해한 폐기물을 발생시키지 않는 친환경 공산품, 재활용 제품 사용 확산 등이 로하스적 소비생활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친환경 용기’인 옹기 그릇을 사용하는 정미영 씨 가족.
정미영 씨는 네 살과 두 살짜리 아들을 둔 주부다. 아이들의 아토피성 피부염 때문에 유기농 먹거리에 관심을 가져온 정 씨는 1년 전부터 생활 전반으로 ‘로하스’적인 소비생활을 확대해가고 있다. 정 씨 가족은 샴푸나 린스, 보디클린저를 쓰지 않는다. 대신 친환경 물비누를 사용한다. 이 물비누는 물비누를 푼 물에서 물고기가 살 수 있을 정도로 독성이 거의 없는 제품이란다. 정 씨는 또 인사동에서 옹기 밥그릇과 반찬그릇을 구입해 사용하고 있다. 옹기는 깨지면 그대로 흙으로 돌아가는 전통적인 친환경 제품이다. 환경호르몬이 배출되고 잘 썩지 않는 쓰레기를 유발하는 컵라면은 정 씨 집에서 아예 ‘금지 품목’이다.
주부 김현주 씨는 지난해부터 우유팩을 재활용한 휴지를 구입해 사용하고 있다. ‘식목일에 나무 한 그루 심지 못하는 대신 재생지를 쓰겠다’는 마음이다. 재생휴지는 형광물질이 들어가 있지 않아 인체에도 안전하고 먼지가 거의 나지 않아 일반 제품보다 청결하다는 게 김 씨의 설명. 설거지용 수세미도 합성수지 제품이 아닌 천연 수세미를 구입해 쓴다. 김씨는 “천연 수세미가 합성수지 수세미보다 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릇을 물에 불린 뒤 설거지하면 충분히 깨끗하게 씻을 수 있다”면서 “친환경 세제에 익숙하다 보니 시댁에 가서 설거지할 때 합성세제의 하얀 거품에 기겁하게 된다”고 말했다.
주부 고영 씨는 4년 전 9ℓ짜리 절수형 양변기를 구입했다(보통 양변기는 10∼15ℓ). 6ℓ짜리 절수형 양변기도 시중에 나와 있지만 가격이 50만원을 웃돌아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사실 고 씨가 9ℓ양변기를 구입하기 전 집에 설치하고 싶어했던 제품은 ‘새마을호 양변기’였다. 진공으로 오물을 빨아들이는 이 양변기는 한 번에 0.9ℓ의 물밖에 사용하지 않는 최첨단 친환경 양변기. 고씨는 “수소문 끝에 이 양변기를 생산하는 업체를 찾아내 연락했지만, 가정집에 설치하기는 기술적으로 어렵다는 답변을 듣고 매우 섭섭했다”면서 “물 절약을 위해 정부가 값싼 보급형 절수 양변기를 공급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천연 염색한 옷을 아들이게 입힌 주부 심상미씨.
“인터넷 주문을 통해 한 달에 35만원 정도 구입합니다. 생협에서 팔지 않는 물품은 아예 소비하지 말자는 생각이에요. 그래서 동네 슈퍼에 갈 일조차 별로 없어요. 아이들도 콜라 대신 산야초(각종 야초들을 1년간 황설탕에 버무려 숙성한 것)를 희석한 음료수를 즐겨 마시니까요.”
한살림 대치동 판매장의 유기농 먹거리 판매대.
친환경 먹거리를 먹고 자란 심 씨의 두 아들은 동네에서 ‘병원 안 가기로 유명한 어린이’로 소문이 났다. 심 씨의 친언니 심상희 씨도 23개월 된 아들 지원이를 친환경 먹거리로 키운다. 지원이는 인공수정 시험관으로 얻은 귀한 아들. 상희 씨는 “산양유가 모유와 가장 성분이 닮았다고 한다”면서 “모유가 잘 나오지 않아 산양유를 매일 배달해 먹였더니 잔병치레 한번 하지 않고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고 말했다.
심 씨가 친환경 제품의 구입에 신경 쓰는 만큼 구입한 물품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노력한다. 무청은 모아서 시래깃국을 끓여먹고, 김칫국물도 모아서 김치말이 국수를 만든다. 쌀뜨물은 기름기를 씻어내는 데 유용하다. 폐식용유는 한데 모아두었다가 빨랫비누를 만든다. 심씨는 “폐식용유로 만든 비누는 때가 잘 씻겨 걸레를 빨 때 특히 좋다”고 자랑했다. 제품을 담은 각종 용기들은 다시 생협으로 보내져서 재활용된다.
주부 신소영 씨는 천생리대 예찬론자다. 사실 여성들이 사용하는 일회용 생리대가 유발하는 환경오염과 인체에 미치는 피해는 무시 못할 수준이다. 일회용 생리대의 연간 소비량은 약 29억개로 추정되는데, 소재의 99%가 폴리프로필렌이나 폴리에틸렌 등의 화학섬유와 플라스틱이다. 또한 일회용 생리대는 가려움증과 습진, 발진 등을 일으키는 주범으로 지목되곤 한다. 신씨는 천기저귀를 사용해 아들을 키우면서, 아들에게만 ‘친환경’을 강요할 수 없다는 생각에 천생리대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생리혈이 샐까봐 걱정하는데 화장실 갈 때 조심해야 하는 점 이외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양이 많지 않은 날에는 하루 한 장으로도 충분하고요. 오히려 발진이나 가려움증, 냄새 등이 없어져서 몸에도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아기 엄마들은 그냥 천기저귀를 잘라서 쓰면 되지요.”
환경을 생각하는 이런 소비 움직임은 비단 개인과 가정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가정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의 대규모 소비를 하는 정부와 기업들도 ‘녹색 소비’에 나서고 있다.
올해 7월부터 시행되는 친환경 상품 구매 촉진에 관한 법률은 정부의 녹색 소비를 확대하겠다는 취지로 제정됐다. 이 법률 시행에 따라 정부기관과 공공기관 등은 앞으로 의무적으로 환경마크 상품, 재활용 상품, 에너지절약 상품 등 ‘녹색 상품’을 구입해야 한다. 정부는 기존의 2600억원(2003년 기준) 규모의 ‘녹색 구매’가 5000억원으로 두 배가량 증가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 법이 본격 시행되는 2007년부터는 1조원 이상, 2009년에는 1조5000억원 이상으로 녹색 구매가 크게 늘 것으로 기대된다.
미국에선 30%가 로하스족
한편 롯데백화점은 지난해 9월부터 사원 7000여명의 명함을 모두 재생지 명함으로 교체했다. 또 지난해 6월부터 석유계 오일을 식물성 콩기름으로 대체해 환경친화형 전단을 제작하고 있다. 콩기름 잉크는 인쇄할 때 공해를 일으키지 않고 건조한 뒤에도 인체에 무해하다. 이 ‘콩기름 전단지’는 환경마크를 획득했다. 수자원공사 또한 2003년부터 사내 소모품에 대해 녹색 구매를 시작했다. 화장지, 비누, 형광램프, 세제, 절수형 수도꼭지, 사무용지, 토너카트리지, 컴퓨터용 모니터, 복사기, 차량용 타이어 등 녹색 구매 의무 품목을 정해놓고 녹색상품만을 구입해 쓰고 있다. 2003년 4억4000만원에 달했던 녹색 구매액은 2004년 8억3000만원으로 껑충 뛰었다.
'로하스'를 실천하는 한살림 환경위원회 회원들(왼쪽)과 천생리대 예찬론을 쳐고 있는 주부 신소영씨.
그러나 아직까지는 우리나라에서 ‘로하스’를 실천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로하스 제품이 생활용품 일부에만 제한적으로 생산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마저 정보를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녹색연합 심근정 간사는 “가정 소비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가전제품 등은 로하스적 소비를 꿈도 못 꾸는 형편”이라며, “지금 할 수 있는 친환경적 소비는 극히 제한된 수준이란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고 충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