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둘러싼 가정 중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회자되는 건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한 치만 더 낮았더라면’일 듯하다. 파스칼의 말로 알려진 이 가정은 클레오파트라의 절세 미모를 빗댄 말이지만 당시 상황을 따져보면 설령 그랬더라도 역사가 크게 달라졌을지는 의문이다. 물론 클레오파트라가 자신의 매력으로 로마의 실력자인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 몇 가지 중요 사건들에 변수가 된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설령 ‘클레오파트라가 없었다 해도’ 카이사르가 로마 패권을 차지한 것이나 이후 옥타비아누스가 사실상 제정시대를 여는 등 역사의 흐름엔 큰 변화가 없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가정보다는 덜 대중적이지만 진짜 역사의 물줄기가 바뀔 가정은 따로 있다. 바로 ‘알렉산더 대왕이 요절하지 않았더라면’이다. 만약 그가 10년만 더 살아서 영토 확장을 계속했더라면…. 그 후의 역사, 그리고 지금의 세계 지도가 어떻게 달라졌을지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는 33세의 너무도 아까운 나이에 죽었다. 공교롭게도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의 나이와 같다. 예수는 어떤 의미에서 지상에서의 소임을 거의 다 마치고 죽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야심 찬 여정의 도중에 미완의 상태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 죽음은 두고두고 미련을 남겼다. 알렉산더의 죽음에 대해 숱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은 그 ‘만약’의 경우의 역사 전개에 대한 호기심의 크기를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곧 개봉될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알렉산더’는 그의 죽음을 말라리아 감염에 의한 것으로 그리고 있지만, 그의 업적만큼 방대한 그에 대한 저술에서는 독살 가능성이 꽤 그럴싸하게 제시되고 있다.
그가 13년간의 정복전쟁을 통해 이룬 성취는 요샛말로 하자면, 동서양을 통합한 글로벌화였다. 그러나 그가 이룬 거대제국은 그의 사후 급속히 와해됐다. 오히려 그의 진정한 업적은 그가 결과적으로 서구 문명사의 단절을 잇는, 지적 자산의 수호신 구실을 했다는 점이다. 영화 ‘알렉산더’가 최근 복원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시작된다는 것은 그걸 생각하면 매우 상징적이다. 그의 이름을 딴 도시 알렉산드리아가 인류의 문명사에 미친 영향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지중해변에 자리잡은 항구도시 알렉산드리아는 기원전 당시로선 경이적인 인구 100만명의 메트로폴리스였다. 이 도시가 세워진 건 알렉산더가 죽고 난 뒤고, 건설자는 그의 부하였던 프톨레마이오스였지만 사실상 이 도시는 단지 그의 이름을 붙였다는 것 이상으로 ‘알렉산더의 도시’였다. 알렉산더의 헬레니즘 이상이 이곳에 넘쳐흘렀기 때문이다. 고대 알렉산드리아는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의 인종과 문화가 뒤섞인 세계 도시였다. 그리고 알렉산더의 헬레니즘의 꿈의 집약체가, 이 도시에 세워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었다. 기원전 290년에 문을 연 이 도서관은 그리스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페르시아 인도 등 고대 동서양의 두루마리와 파피루스 문헌 80여만권을 소장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지구상의 모든 민족들의 책’을 수집해 보관할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클레오파트라 시절 카이사르 군대에 의해서 일부 훼손된다. 이집트 내전 때 항구에 정박한 빈 배에 불을 붙였다가 불이 도서관에 옮겨붙어 타버린 것이다. 60년대 스펙터클물인 ‘클레오파트라’에서 여주인공으로 분한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카이사르에게 이를 항의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사실 클레오파트라가 카이사르의 마음을 빼앗은 것은 미모와 함께 재치와 교양이었다. 클레오파트라의 매력은 상당 부분 그의 선조가 세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책들에서 나왔을 것이다. 이 도서관은 당대 헬레니즘 문명의 터전에서 머무르지 않고, 시대를 넘어 중세와 근대의 다리가 됐다. 하지만 그 계승은 연속적 과정이 아닌 시간과 공간의 우회로를 통했다는 점에서 극적이다. 만약 이 도서관의 방대한 자료가 현세까지 그대로 보존됐다면 고고학은 한층 쉬워졌을 것이다. 아니, 고고학의 영역 자체가 많이 줄어들었을지도 모른다.
영화 ‘장미의 전쟁’에서 수사 윌리엄은 수도원의 도서관이 불타자 필사적으로 책을 구하려고 하는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살아남았더라면 윌리엄이 목숨을 걸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도서관은 7세기에 이슬람 제국의 침공으로 파괴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파괴라기보다는 ‘흡수’됐다고 보는 게 맞다. 무슬림들은 도서관의 그리스와 라틴어 서적을 번역해 아랍 문명을 꽃피우는 바탕으로 삼았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유럽의 문명에 행운으로 반전됐다. 십자군전쟁을 거치면서 다시 유럽에 전해져 르네상스의 부흥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알렉산더를 ‘르네상스의 아버지’로 불러줘도 안 될 건 없을 것 같다.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가정보다는 덜 대중적이지만 진짜 역사의 물줄기가 바뀔 가정은 따로 있다. 바로 ‘알렉산더 대왕이 요절하지 않았더라면’이다. 만약 그가 10년만 더 살아서 영토 확장을 계속했더라면…. 그 후의 역사, 그리고 지금의 세계 지도가 어떻게 달라졌을지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는 33세의 너무도 아까운 나이에 죽었다. 공교롭게도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의 나이와 같다. 예수는 어떤 의미에서 지상에서의 소임을 거의 다 마치고 죽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야심 찬 여정의 도중에 미완의 상태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 죽음은 두고두고 미련을 남겼다. 알렉산더의 죽음에 대해 숱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은 그 ‘만약’의 경우의 역사 전개에 대한 호기심의 크기를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곧 개봉될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알렉산더’는 그의 죽음을 말라리아 감염에 의한 것으로 그리고 있지만, 그의 업적만큼 방대한 그에 대한 저술에서는 독살 가능성이 꽤 그럴싸하게 제시되고 있다.
그가 13년간의 정복전쟁을 통해 이룬 성취는 요샛말로 하자면, 동서양을 통합한 글로벌화였다. 그러나 그가 이룬 거대제국은 그의 사후 급속히 와해됐다. 오히려 그의 진정한 업적은 그가 결과적으로 서구 문명사의 단절을 잇는, 지적 자산의 수호신 구실을 했다는 점이다. 영화 ‘알렉산더’가 최근 복원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시작된다는 것은 그걸 생각하면 매우 상징적이다. 그의 이름을 딴 도시 알렉산드리아가 인류의 문명사에 미친 영향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지중해변에 자리잡은 항구도시 알렉산드리아는 기원전 당시로선 경이적인 인구 100만명의 메트로폴리스였다. 이 도시가 세워진 건 알렉산더가 죽고 난 뒤고, 건설자는 그의 부하였던 프톨레마이오스였지만 사실상 이 도시는 단지 그의 이름을 붙였다는 것 이상으로 ‘알렉산더의 도시’였다. 알렉산더의 헬레니즘 이상이 이곳에 넘쳐흘렀기 때문이다. 고대 알렉산드리아는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의 인종과 문화가 뒤섞인 세계 도시였다. 그리고 알렉산더의 헬레니즘의 꿈의 집약체가, 이 도시에 세워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었다. 기원전 290년에 문을 연 이 도서관은 그리스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페르시아 인도 등 고대 동서양의 두루마리와 파피루스 문헌 80여만권을 소장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지구상의 모든 민족들의 책’을 수집해 보관할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클레오파트라 시절 카이사르 군대에 의해서 일부 훼손된다. 이집트 내전 때 항구에 정박한 빈 배에 불을 붙였다가 불이 도서관에 옮겨붙어 타버린 것이다. 60년대 스펙터클물인 ‘클레오파트라’에서 여주인공으로 분한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카이사르에게 이를 항의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사실 클레오파트라가 카이사르의 마음을 빼앗은 것은 미모와 함께 재치와 교양이었다. 클레오파트라의 매력은 상당 부분 그의 선조가 세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책들에서 나왔을 것이다. 이 도서관은 당대 헬레니즘 문명의 터전에서 머무르지 않고, 시대를 넘어 중세와 근대의 다리가 됐다. 하지만 그 계승은 연속적 과정이 아닌 시간과 공간의 우회로를 통했다는 점에서 극적이다. 만약 이 도서관의 방대한 자료가 현세까지 그대로 보존됐다면 고고학은 한층 쉬워졌을 것이다. 아니, 고고학의 영역 자체가 많이 줄어들었을지도 모른다.
영화 ‘장미의 전쟁’에서 수사 윌리엄은 수도원의 도서관이 불타자 필사적으로 책을 구하려고 하는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살아남았더라면 윌리엄이 목숨을 걸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도서관은 7세기에 이슬람 제국의 침공으로 파괴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파괴라기보다는 ‘흡수’됐다고 보는 게 맞다. 무슬림들은 도서관의 그리스와 라틴어 서적을 번역해 아랍 문명을 꽃피우는 바탕으로 삼았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유럽의 문명에 행운으로 반전됐다. 십자군전쟁을 거치면서 다시 유럽에 전해져 르네상스의 부흥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알렉산더를 ‘르네상스의 아버지’로 불러줘도 안 될 건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