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농민연대는 8월5일 과천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가 DDA 협상에서 농업 보호 의지를 보여주지 못했다고 규탄하고 있다.
이처럼 농민들은 쌀개방이 가져올 파장을 우려하며 개방 반대를 외치고 있다. 쌀이 농업소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농촌 현실에서 개방 확대는 농촌에 심각한 타격을 줄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현재 미국 중국 오스트레일리아 아르헨티나 이집트 등과 쌀 재협상을 하고 있다.
더욱이 최근 도하개발어젠다(DDA) 합의안 보도를 접한 농민들은 더욱 깊은 시름에 잠겼다. 8월1일 한국을 포함한 세계무역기구(WTO) 147개 회원국이 DDA 협상의 기본 골격 합의안을 채택해, 2003년 9월 칸쿤 각료회의 결렬 이후 소강상태를 보이던 DDA 협상이 본격적으로 재개될 전망이다. 이번 합의안에 구체적인 내용은 빠져 있지만 국내 농업시장의 추가개방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추곡수매제 내년 폐지는 농업 죽이기”
합의안에 따르면 농업 분야 시장개방 때 고율 관세일수록 관세를 많이 감축하는 틀을 유지하되 모든 회원국이 자국이 보호하고 싶은 일정 품목을 ‘민감품목’으로 지정할 수 있다. 또 개발도상국은 적절한 수의 품목을 특별품목(SP)으로 지정할 수 있어, 한국이 ‘개도국 지위’를 확보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이처럼 약간의 떡고물을 안겨주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관세가 높을수록 대폭 인하하게 하는 구간별 감축방식이 채택되고, 저율관세 의무수입물량(TRQ)을 늘리는 방식으로 시장 접근을 허용해 낮은 관세로 들어오는 외국 농산물이 더욱 많아질 전망이다.
우리 농업의 경우 100% 이상 품목이 142개, 300% 이상 품목은 94개에 달하기 때문에 심각한 타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각종 형태의 농업 관련 보조금도 많이 지급하는 나라일수록 큰 폭으로 감축해야 하며 이행기간 첫해에는 보조금 총액의 20% 이상을 삭감해야 한다.
그런데 이 합의문이 나온 지 이틀 만에 한국 정부는 추곡수매제를 2005년부터 폐지한다는 내용의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내놓아 농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 WTO반대국민행동 측은 “과연 국내 보조금 감축 조항이 추곡수매제 폐지로 이어질지 여부조차 불투명한 상태에서 이런 안을 내놓은 것은 농업 죽이기에 앞장선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비난했다.
전국농민연대(상임대표 정재돈·이하 전농)도 8월5일 과천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의 DDA 무능협상을 규탄했다. 전농은 “DDA 농업협상의 기본 골격안 채택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농업 보호 의지를 보여주지 못했고, 통상력도 없어 통상협상과 농정을 현 농정 책임자에게 맡길 수 없다”며 “DDA 농업협상의 결과에 우리의 주장이 반영되기 전에 서둘러 추곡수매제도를 폐지한 것도 지나친 패배주의”라고 지적했다.
평택에서 논을 임대해 농사를 짓고 있는 농민 이상규씨(33)는 “이번 합의안과 정부 태도를 보면 더 이상 농촌에서 농사지을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며 “서운하고 분통만 터진다”고 말했다.
농업 부문에 대한 합의 내용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쌀 재협상에도 변화가 올 수 있음을 예고한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강문성 DDA 연구팀장은 “특별품목의 지정을 허용했다는 점은 쌀의 관세화에서 유리한 환경이 조성될 수 있음을 예상케 한다”고 분석했다.
‘WTO 시대의 농업통상법’의 저자 송기호 변호사는 “정부는 DDA 협상이 2004년 말까지 타결될 것을 전제하고 쌀 협상을 올해 9월 내로 끝내겠다고 했는데 DDA 합의안이 나오면서 일정이 늦춰졌기 때문에 여기에 맞춰 쌀 협상의 판을 새로 짜야 한다”며 “조만간 전농 등과 함께 쌀 협상 일정에 대한 정보 공개를 청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관세상한 설정이 미뤄진 것이다. 강팀장은 “농산물에 대해 높은 관세를 유지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관세율에 상한이 정해지면, 이 수준 이하로 관세를 내려야 하기 때문에 급격한 시장 개방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며 “이러한 논의가 ‘관세 상한의 역할을 추후 평가’한다는 수준으로 후퇴한 것은 우리에게 긍정적인 내용으로 볼 수 있다”고 언급했다.
법률·교육·의료 분야도 협상 가속도
농업 부문에서 또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점은 미국이 자국 농업정책의 손해를 감수하고서도 모든 형태의 수출보조금을 점진적으로 철폐한다는 기본 목표에 합의한 것. 이는 EU(유럽연합)가 25개국으로 확대되면서 미국이 자국의 농업이 타격받을 수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비농산물 분야에서는 관세가 높을수록 높은 감축률을 적용하는 관세감축 방식이 채택돼 공산품 교역량이 많은 한국으로서는 대체로 유리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WTO반대국민행동은 “이런 결과로 인해 제3세계에 대한 공산품 수출이 반드시 증대할 것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며 “우리나라 공산품 시장 역시 대폭 개방해야 하는 상황임을 직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즉 농산물이 손해를 보더라도 공산품 수출이 늘어나 전체적으로 이익이 될 거라는 논리는 어폐가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칠레 자유무역협정(FTA)이 체결된 뒤 4개월 동안 칠레와의 교역에서 오히려 무역적자가 심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산업자원부에 따르면 올 상반기 들어 우리나라의 대(對)칠레 수출증가율은 14.0%에 그친 반면 수입은 무려 94.6% 증가했다. 올 상반기 대칠레 수출액(확정치)은 2억9894만3000달러, 수입액은 9억9581만6000달러로 6억9687만3000달러의 적자를 기록한 것. 물론 원자재 값의 급상승 등의 영향이 있었지만 애초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법률과 교육, 의료 등 서비스 분야에서는 회원국들에 양허안(시장개방 이행계획서)을 제출하도록 촉구하기로 해 앞으로 이 분야에서 시장개방 문제가 본격화할 전망이다. 이 분야는 특히 선진국 자본이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고, 양허안을 놓고 국가별로 일대일 협상을 벌이는 단계에까지 와 있어 이번 합의안을 계기로 서비스 협상에 더욱 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뒤집어보면 의료 교육 기간산업 문화 물 생태 등 한 국가의 기본적 권리마저도 심각한 자본의 공격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
투자, 경쟁정책, 무역원활화, 정부조달 투명성 등이 논의되는 ‘싱가포르 이슈’는 수출입 절차 간소화를 골자로 하는 ‘무역원활화’ 분야만 협상을 시작하고 나머지 분야는 개도국의 반발이 심해 DDA 협상 의제에서 제외됐다.
농업 분야의 민감한 사항은 앞으로 협상에서 결정하기로 해 9월부터 시작될 DDA 세부원칙(modalities) 협상에 어려움이 예상된다. 앞으로 2005년 12월 홍콩에서 제6차 각료회의가 열리고, 이 회의 전까지 DDA 협상은 분야별로 세부원칙과 주요 이슈를 협상하게 된다.
지난해 칸쿤 회의 이후 개도국들의 목소리가 커져 도하라운드가 최종 타결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가능성도 높다.
WTO반대국민행동 측은 “(정부가) 진정한 국익을 위해 협상에 임 한다면 최소한 국민의 먹을거리와 공공서비스, 국가 기간산업, 생명체에 대한 교역 중단은 요구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DDA 기본 골격 합의 주요 내용
·고율관세일수록 더욱 많이 감축
·모든 회원국 일정수 관세항목 민감품목 지정 허용
·관세 감축과 저율관세 수입물량 연계
·관세 상한의 역할에 대해서는 추후평가
·개도국 적절한 수 품목 특별품목 지정 가능
·국내 보조가 높은 보조 지급국 큰 폭 감축, 이행기간 첫해 무역
왜곡 보조금 총액 20% 이상 감축
·생산 제한을 전제로 한 보조금 다소 융통성 도입
·모든 형태 수출보조 향후 결정시점까지 철폐
·관세 감축 비선형 인하방식 채택
(관세가 높을수록 높은 감축률 적용)
·회원국 2차 양허안 2005년 5월까지 제출
·1차 양허안 미제출국 양허안 조속 제출
·무역원활화는 협상 개시
·투자, 경쟁정책, 정부조달 투명성 등은 DDA 협상 작업 계획에서 제외
자료: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