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에 갇힐 것인가, 유신을 넘어설 것인가’박근혜 대표의 행보가 주목된다.
열린우리당(이하 우리당) 신기남 의장은 8월5일부터 예정에 없던 휴가를 다녀왔다. 그의 여행가방엔 역사학자 최상천씨가 쓴 책 ‘알몸 박정희’가 들어 있었다. ‘알몸 박정희’는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내면세계를 분석하면서 친일 의혹을 노골적으로 부각시킨 ‘박정희 보고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박 전 대통령의 허물과 잘못을 사과하라는 청와대와 우리당의 요구에 발끈하고 있는 상황에서 신의장이 이 책을 가족들과 함께 떠난 휴가지에까지 가져간 이유는 무엇일까. 맛보기 수준에서 이뤄진 우리당의 박대표 흠집내기는 어느 시점에서 다시 본격화할 것인가.
박정희 전대통령의 친일 논란도 큰 부담
박대표를 둘러싼 ‘정체성 논란’은 정수장학회를 소재로 이제 겨우 1라운드가 치러졌을 뿐이다. 박 전 대통령의 후광에 힘입어 정치권에 연착륙한 박대표의 행보에서 박 전 대통령의 모습이 연상되는 현실은, 한편으론 박대표의 든든한 정치적 자산이면서 다른 한편으론 출구를 찾기 힘든 ‘아킬레스건’이기도 하다.
‘유신 논란’은 조만간 고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관련 문제로 다시 한번 불거질 전망이다. 국무총리 산하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위원장 변정수)는 최근 김 전 부장의 민주화운동 관련 여부를 분과위원회에서 재심의하기로 했다. 민주화운동 인정 여부와 재심의 시점은 명확치 않으나 박대표로선 김 전 부장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등장한다는 것 자체가 달가운 일이 아니다.
박대표가 박 전 대통령의 잘못과 허물을 책임져야 하는지는 논란의 대상이다. 그럼에도 박 전 대통령의 과오는 박대표가 어떤 식으로든 떠안을 수밖에 없어 보인다. 예컨대 박 전 대통령의 친일 의혹은 박대표와 전혀 무관한 일이다. 그럼에도 친일 논란이 일어나는 현실 자체가 박대표에게는 부담으로 다가온다. 여야 의원 171명은 ‘일제 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을 벌써 제출해놓았다.
여당이 개정안을 정략적으로 내세웠다는 비판이 가시지 않는 가운데 9월부터 시작되는 정기국회에서 개정안이 원안 그대로 통과된다면 박 전 대통령은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대상에 포함된다. 과반수를 확보한 여당이 역풍을 ‘작심’하면 법안 통과는 언제든 가능하다.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박대표가 만약 대선후보로 선출되면 TV 프로그램에서 박 전 대통령의 일제 강점기 행적을 의도적으로 편집해 방송하는 것만으로도 박대표가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게다가 우리당 일각에선 70년대 후반 박대표의 동선을 복기하고 있다. 유신정권 시절 박대표가 어떤 일을 했느냐에 따라 더욱 자극적인 공격 소재가 될 수 있다. 한나라당 이재오 의원은 “유신정권의 피해자들은 대부분 살아 있다. 나만 해도 고문 후유증으로 얼굴이 실룩거린다. 박대표는 유신정권의 2인자였고 실체적 역할을 했다. 여당이 박대표의 과거를 하나 둘씩 들춰내기 시작하면 그때 가서 어쩌자는 것인가”라고 지적했다.
이의원의 지적대로 우리당 의원들은 유신 시절 경험담을 들춰내면서 박대표의 아픈 곳을 찌른다.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이 목숨 걸고 민주주의를 위해 싸울 때 그는 독재 권력의 중심에서 단맛을 향유하고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새마음봉사단 발대식이 전주에서 열렸다. 전주시내 고교생들이 체육관에 동원됐다. 박대표가 대통령 찬가가 울려퍼질 때 나왔는데 선녀가 하강하는 줄 알았다” 등등.
1975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큰딸인 박근혜 대표와 함께 투표하고 있다.
‘내 사람’ 부재도 약점… 넘어야 할 산 적지 않아
최씨가 창설한 구국여성봉사단은 박대표가 총재를 역임한 새마음봉사단의 전신이고, 최씨는 90년 박서영씨가 육영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하기 직전 박근혜 이사장 체제에서 재단을 좌지우지했다. 자매간의 운영권 다툼이 일어난 이유도 최씨의 비리의혹과 전횡을 서영씨 측에서 문제 삼았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다. 최씨는 유신 말기 이권에 개입하고 인사청탁 등을 일삼다 중앙정보부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 최씨와 관련한 중앙정보부의 보고를 받은 박 전 대통령은 크게 노했으나 중앙정보부의 주장보다 박대표의 주장을 더 신뢰했다고 한다.
최씨의 인척으로 알려진 J씨는 박대표의 최측근 인사다. J씨는 박대표의 자택을 출입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외부인 중 한 명이다. J씨는 박대표가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미래연합을 결성했을 때 비서실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99년 정수장학회 구조조정 과정에서 J씨와 관련한 소소한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다. 박대표와 최씨 가문의 인연은, 최씨가 유신 말기 누린 권력과 관련해 박대표 공격 소재로 악용될 수 있다.
박대표는 당내에서도 넘어야 할 산이 적지 않다. 우선 “알맹이가 없다” “비전이 없다”는 비판을 잠재울 지도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박대표의 구체적인 구상은 아직 나온 바 없다. 박대표에게 비판적인 3선 그룹은 최근 목소리를 높이면서 이명박 서울시장이나 손학규 경기도지사 쪽에 시선을 보내는 분위기다. 그렇다고 김덕룡 강재섭 박희태 의원 등 5선 그룹이 ‘박대표의 사람’들도 아니다. 김덕룡 원내대표의 향후 행보를 주목해야 한다는 말도 그래서 나온다.
박대표는 ‘정통성 논쟁’을 통해 당내 입지를 일부 강화할 수 있었다. 이제부터는 당이 나서 박대표를 보호할 태세다. 우리당 내부에서 “국민들은 먹고사는 문제로 고민하는데 쓸데없이 정쟁을 벌였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유신독재라는 과오에도 불구하고 여론조사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과거로 돌아간 논쟁은 우리당에 오히려 악재가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유신에 갇힐 것인가, 유신을 넘어설 것인가.’ 박대표의 선택이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