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준씨가 최근 펴낸 책 ‘언어사중주’.
본업이 교수인 한 미술애호가의 개인전인지라, 이 전시는 제대로 평가를 받을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미술판에서의 평가는 악평인 경우에도 대단히 배타적으로 ‘작가’들에게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럴 때 작가란 미술대학을 나와 견고한 미술계 학연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거나, 드물게 대가한테서 도제 수업을 받은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나 꽤 많은 작가들이 ‘비밀리에’ 이 전시장을 들렀고, 또 적잖은 작가들은 쓴 입맛을 다신 것으로 전해진다. 이 ‘아마추어’ 작가의 미술적 행위-이번이 이미 네 번째 개인전이다-가 가볍게 웃고 격려해줄 만한 취미가 아니라 현대 미술의 정곡을 찌르는 어떤 것을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눈치 빠른 작가와 관객들이라면 그의 작업이 ‘폼생폼사’하는 ‘전문작가’들의 신비주의적 작업과 자기만족에 대한 도전이라는 점도 깨달았을 것이다.
‘전쟁의 재구성’전.
시각이미지 평론가 이정우씨는 “최근 열린 전시 중 ‘전쟁의 재구성’이야말로 가장 훌륭하다”고 평하기도 했다.
Dance, acrylic on canvas.
‘전쟁의 재구성’이 예술적 증명이라면, 그가 동료들과 함께 새로 펴낸 책 ‘언어사중주’는 말을 통해 어떻게 생각하고 예술품을 만들 것인가에 대한 해설서다. 8월 말에 ‘화가처럼 생각하기’가, 그리고 연말에 두어 권의 책이 더 나오는데 이 책들은 모두 김재준씨의 생각하기에 대한 방식, 그리고 예술 창작의 과정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책 ‘언어사중주’ 통해 예술품 해설
그의 책들 가운데 가장 먼저 나온 ‘언어사중주’는 중고생들과 학부모들에게 주는 실질적이고 귀중한 정보다. 그는 고등학생을 위한 책을 펴낸 이유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열심히 공부하는 시기가 고등학교 때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개인전을 통해 보여준 작품 ‘60억을 수용하는 경기스타디움 건축 모델’.
다시 3악장은 ‘머리는 좋은데 공부 안 하는 아이들’ ‘노래방에서 배우는 함수의 개념’ ‘수학은 미술이다’ ‘국회의원은 왜 부패하는가’ 등의 소재로 이뤄져 있다. 언뜻 수학과는 무관해 보인다. 그러나 저자는 수학이든 미술이든 국회의원의 부패 같은 사회 문제도 ‘높은’ 위치에서 보면 서로 ‘통역’이 되며 ‘재구성’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정말 말하고 싶은 것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지요. 말은 많이 하지만 정말 하고 싶은 말을 가진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지난 세기 말에 여기저기에서 세계 현대 100대 작가를 선정하곤 했는데, 그것이 마치 한 사람의 포트폴리오처럼 보이더군요. 자신의 말을 가진 작가들이 많지 않다는 거죠.”
A pingpong diplomacy, pen on paper.
“여기서 작가와 아마추어를 가르는 기준은 문제는 이 같은 작업을 즐겁게, 평생 할 수 있는가, 아니면 우연한 결과로 끝내버릴 것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경제학자이면서 음식평론가 미술 컬렉터이고, 예술품 시장의 분석가이자, 개념주의적 비디오 작가인 그는 숫자의 재구성을 통해 인류학과 정치학, 사회학자 들, 심지어 작곡의 영역을 관통하여 접속한다. 최근엔 인류학자와 ‘왜 한국과 일본의 여성들은 피부 미용 화장품에 많은 돈을 투자하는가’를 연구하는 중이며, 실내악 4중주를 쓰고 있기도 하다.
김재준씨가 경기장을 모방한 전시장에서 관객들에게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단, 한번이라도 생각하기와 말하기에 대한 갈등을 절박하게 느껴보지 않았다면, 그의 미술 작품과 책들이 주는 섬뜩함을 느끼지 못할 수 있다. 그것이 앞으로 그가 풀어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물론 ‘언어사중주’는 논술고사에 대비한 실용서로서 충분히 훌륭하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