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성경륭 국가균형발전위 위원장(왼쪽)
반면 같은 경제분야 대통령 직속 자문기관으로, 경쟁 내지 갈등 관계에 있던 ‘국가균형발전위원회’(이하 균형발전위)는 위상과 영향력이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 ‘대통령 가장 가까이서, 가장 넓은 분야에 걸쳐 자문·조정 역할을 하는 노른자위 조직’ ‘위원회지만 사실상 관련 부처 장악이 가능한 헤드쿼터’. 집권 초기 동북아위를 설명하는 데 동원된 표현들을 그대로 갖다 써도 무리가 없는 상황이다.
두 위원회 간의 ‘고리’ 또는 갈등의 핵 역할을 한 것은 ‘클러스터(Cluster)’다. 클러스터란 △기업, 대학, 연구소 등이 △특정 지역에 모여 △네트워크 구축과 상호작용을 통해 △사업 전개, 기술 개발, 부품 조달, 인력·정보 교류 등에서 시너지를 내는 것을 의미한다. 6월3일 노무현 대통령이 “창원 구미 울산 등 6곳을 혁신 클러스터로 정하고 공공기관 지방 이전 사업과 연계하겠다”고 밝힌 데서도 알 수 있듯, 클러스터는 참여정부 경제정책의 핵심을 이루는 개념이다.
처음 이 개념을 적극 도입해 다듬은 것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의 동북아중심국가건설 태스크포스팀이었다. 주도적 역할을 한 정태인 부팀장이 동북아위 기획운영실장으로 등용되면서 클러스터는 동북아위가 그린 ‘큰 그림’의 밑바탕이 됐다. 문제는 지방분권·국가균형발전 태스크포스팀도 클러스터 개념에 주목한 것. 두 태스크포스팀은 따로 또 같이 클러스터에 대한 학습과 토론을 벌였고, 결국 균형발전위도 클러스터 육성을 지역혁신 정책의 도구이자 목표로 설정하기에 이르렀다.
따로 또 같이 ‘학습과 토론’ 목표 설정
당시 상황을 잘 아는 한 경제계 인사는 “애초 동북아위는 하나의 클러스터 팀을 두 위원회가 함께 운영하는 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균형발전위에서 거부했다. 동북아위에서 클러스터는 5개 주요 과제 중 하나였지만 균형발전위로서는 ‘전부’일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두 위원회의 구성이 본격화하면서 클러스터 전문가라 할 수 있는 상당수의 경제학자들이 동북아위의 NIS(국가혁신체제) 전문위원회에 소속됐다. 반면 균형발전위에는 성경륭 위원장(한림대 사회학과 교수), 이정호 기획조정실장(부경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을 비롯해 상대적으로 다양한 분야의 인사들이 포진했다. 이정호 실장은 이광재 열린우리당 의원의 처남이기도 하다.
균형발전위에서 활동한 한 인사는 “10여명의 기획조정실 팀장 중에 ‘국가균형’ 전문가라 볼 수 없는 당 출신 인사 등도 여럿 포함돼 있다. 위원회 구성도 그렇고, 상당한 정치적 고려의 흔적이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본격적 활동이 시작되면서 눈에 띄는 성과를 보인 쪽은 균형발전위였다. 245개 정부 소속·투자·출연기관 등의 지방 이전을 골자로 한 이른바 ‘대구 구상’, 최대 20여개의 행정신도시 건설 계획 발표, 6개 혁신 클러스터 지정 등굵직굵직한 개발정책들을 토해냈다. ‘국가균형발전특별법’ ‘신행정수도특별법’ ‘지방분권특별법’ 등 3대 특별법 제정을 주도했으며 균형발전특별회계도 마련했다.
국가균형위 활동이 부동산 투기붐을 불러올 수도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반면 동북아위의 움직임은 상대적으로 저조했다. 동북아위의 한 실무진은 “우리 일이라는 것이 이벤트를 할 여지가 거의 없다. 그야말로 미국·일본이 이해해주고, 중국이 도와주고, 유럽까지 관심을 보여야만 뭔가 될까 말까 한 것 아니냐”고 말했다. 클러스터만 해도 지난해 5월 노대통령이 “균형발전을 위한 클러스터는 균형발전위에서, 국가대표 클러스터는 동북아위에서 맡으라”고 교통정리한 이후 동북아위의 역할과 위상은 크게 줄어들었다.
한 경제학자는 “동북아위는 전문가들이 다수 포진해 정책 부작용에 대한 다각적 토론이 많은 대신 의사결정이 다소 느리다. 반면 균형발전위는 성위원장의 강력한 리드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고 설명했다. 균형발전위에서 활동한 한 인사도 “토론을 통해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결정된 사안에 대한 성위원장의 설명을 듣고 이를 지역에 홍보하는 것이 우리 역할이었다”고 토로했다.
동북아위의 배 전 위원장에 비해 성위원장이 노대통령과 훨씬 친밀하고 편한 관계였던 점도 두 위원회의 위상에 영향을 끼친 듯하다. 성위원장이 대통령을 독대하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았고, ‘효과’도 확실했다.
전시행정 집착 이해 부족 비판도
어쨌든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자 산업자원부, 건설교통부 등 관련 부처 공무원들이 현안을 들고 균형발전위를 찾는 일이 잦아졌다. 균형발전위에서 검토한 결과 국가 균형발전이라는 국정과제에 부합한다는 점이 인정되면 성위원장의 대통령 직보에 따라 그만큼 사업 진행이 빨라졌기 때문이다.
균형발전위의 이 같은 행보는 안팎의 비판을 불러왔다. 균형발전위 소속의 한 인사는 “대통령 직보 체제라는 게 견제가 불가능하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라며 “균형발전위가 제시한 여러 국토개발안이 많은 부작용이 예상되는데도 이에 대한 정부 내 토론이나 여론 수렴이 너무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한 국책연구소 연구원은 “균형발전위는 지방분권과 지역개발을 외치지만 지금 내놓고 있는 정책들을 보면 오히려 중앙집중을 강화할 가능성이 크다. 행정신도시건 클러스터건, 결국 중앙정부가 특정 지역을 ‘지정’해 일종의 특혜를 주는 것 아니냐”고 주장했다.
물론 반론도 있다. 균형발전위 측은 “단순한 경제개발이 아니라 지역혁신 역량 강화를 통해 국가 역량을 강화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동북아위의 한 고위 관계자도 “다른 걸 다 떠나 지역 공무원들에게 ‘우리 고장이 살 길은 우리가 찾아야 한다’는 책임감을 심어준 것만 해도 큰 성과다. 또 ‘지역이 중요하다, 지역중심 경제로 간다’는 점만큼은 국민들에게 확실히 심어주지 않았느냐”고 옹호했다.
그렇더라도 “균형발전위가 전시행정에 집착한다, 클러스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비판까지 피해갈 수는 없을 듯하다. 균형발전위의 한 인사는 “클러스터를 너무 도식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아 우려된다. 도시를 만들고 건물을 짓고 대학에 연구센터를 만들어주는 것이 클러스터의 모든 것은 아니다. 때로는 그 고장의 특성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 오히려 기존의 연구센터를 없애는 것이 과제가 될 수도 있다”고 조언했다.
어쨌거나 동북아위는 처음 출발했을 때와 전혀 다른 형태의 조직이 됐다. 어찌 보면 현재 상태가 대선 후보 시절 노대통령이 공약한 ‘동북아 구상’에 더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6월1일 노대통령은 세계 한인회장 초청 다과회에서 “내 원래 구상은 동북아 중심이 아니라 동북아시대였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제 동북아위에서 클러스터 업무는 완전히 사라졌다. 이를 대신 맡게 된 것은 과학기술부. 지금은 또다시 과학기술부와 동북아위 사이에 “어디까지가 우리 일이냐”는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상태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가 인정한 국가체제 혁신의 기린아 클러스터. ‘그릇’은 마련된 만큼, 이젠 그 안에 어떤 내용을 채울 것인가에 대한 심도 깊은 고민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