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제품 값이 1997년 자율화돼 전국 주유소별로 천차만별이다. 5월말 휘발유 1리터당 가격이 1448원이라고 표시돼 있는 서울 시내 한 주유소.
정부는 이에 앞서 4월6일 ‘국제유가 상승에 따른 상황별 대응방안’을 발표, 국제유가 상승이 계속될 경우 석유류 관련 세금을 인하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이 방안은 중동산 두바이유의 10일 평균가격이 배럴당 35달러를 넘을 경우 추가 상승분 ‘일부’를 석유류 관련 세금 인하를 통해 흡수하기로 한 것. 두바이유는 5월21일 10일 평균가격이 35달러를 상회한 이후 하락세로 반전, 35달러 아래로 내려앉았다. 5월28일 현재 가격은 배럴당 34.72달러.
이에 따라 정유업계가 기대하는 석유류 관련 세금 인하 여부는 6월3일 베이루트에서 열리는 석유수출국기구(OPEC) 총회 이후에나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산업자원부 석유산업과 관계자는 “OPEC 총회에서 최근의 기록적인 고유가를 떨어뜨리기 위해 회원국에 부과했던 원유생산량 제한을 풀어 증산을 유도한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어 일단은 OPEC 총회 이후의 국제유가 추이를 살펴본 뒤 다시 석유류 관련 세금 인하문제를 검토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사상 최고가 갱신 행진 수요 감소
정유업계가 석유류 관련 세금 인하에 목을 매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최근 국제유가의 고공행진으로 휘발유 값이 연일 최고치를 기록하면서 휘발유 수요가 줄고 있기 때문. 한국석유공사가 전국 556개 주유소를 대상으로 표본조사를 실시한 결과 5월 마지막 주의 무연 보통휘발유의 전국 평균가격은 1ℓ당 1376.10원을 기록, 사상 최고치를 나타냈다. 이는 그 전주의 최고가(1372.57원)보다 3.53원이 오른 값이다. 대한석유협회에 따르면 올 1~3월 휘발유 소비량은 전년 대비 6.4% 감소했다.
휘발유를 비롯한 석유제품 값은 1997년 1월부터 완전 자율화됐다. 과거에는 정부가 석유제품 값을 결정해 고시했지만 이제는 정유사가 독자적으로 가격변동 요인을 산정한 뒤 그때그때 값을 올리고 내릴 수 있게 됐다는 얘기다. 98년 2월부터는 정유사가 가격 발표 하루 전 산업자원부에 변동 내용을 미리 통보하도록 한 사전신고제마저 폐지됐다.
현재 각 정유회사가 발표하는 석유제품 값은 각사의 직영주유소에 공급하는 세후 공장도 값을 의미한다. 주유소 입장에서는 이 가격을 바탕으로 경쟁 주유소 가격, 손익상황, 경영전략 등에 따라 개별적으로 판매가격을 결정한다. 정유회사의 공장도 가격 인상폭보다 많이 판매가격을 올리는 주유소가 얼마든지 있다는 얘기다. 반대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석유공사가 매주 전국 평균가격을 집계하는 것도 주유소마다 판매가격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은 정유회사들이 국제유가 인상분은 즉각 석유제품 값에 반영하면서도 국제유가 인하시에는 석유제품 값을 제대로 내리지 않는 게 아니냐는 불만을 제기한다. 그러나 정유업계 관계자들은 이는 소비자들의 ‘착각’일 뿐이라고 말한다. 휘발유 가격 인상 때는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하지만 내릴 때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아 소비자들이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
국내 정유사들은 오히려 최근의 국내가격은 유가 인상요인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반박한다. 석유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넷째 주에서 올 4월 넷째 주까지 두바이유는 배럴당 27.96달러에서 32.91달러로 상승, 휘발유 1ℓ당 64.35원의 인상 요인이 생겼다. 같은 기간 미국 달러화에 대한 원화값은 1달러당 1208.46원에서 1172.80원으로 올라 7.13원의 인하 요인이 생겼다. 결국 약 57원의 국내 유가 인상요인이 발생했지만 실제 같은 기간 휘발유 값은 세전 공장도 가격 기준으로 385.78원에서 435.08원으로 인상돼 49원 정도만 반영됐다는 것.
정부는 그동안 소비자들이나 정유사, 자동차회사 등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고유가 정책을 유지해왔다. 자동차 이용을 억제, 대기오염이나 교통혼잡 등 사회적 비용을 줄이려는 세계적인 추세에 부응하고 교통세 등으로 거둬들인 세수를 활용해 선진 외국에 크게 뒤떨어진 교통 관련 인프라를 건설할 수 있기 때문. 또 기름 소비를 억제함으로써 무역수지 개선 효과를 거둘 수도 있다.
현재 국내 석유제품에는 관세 및 수입부과금, 교통세(LPG에는 특소세), 교육세(교통세의 15%), 주행세(교통세의 18%, LPG의 경우 주행세 대신 판매부과금), 부가가치세 등 6가지의 세금이 부과되고 있다. 4월 평균 국내 휘발유 1ℓ당 소비자가격 1353원 가운데 총 867원의 내국세 외에 원유도입시 1%의 관세(기본관세율은 5%이지만 유가 급등에 따라 4월30일부터 한시적으로 인하)와 1ℓ당 8원(4월30일부터 14원에서 인하)의 수입부과금 등이 부과되고 있다는 얘기다. 휘발유 값의 66%가 각종 세금인 셈이다.
현재 휘발유에 붙는 교통세는 1ℓ당 559원. 올 3월1일 주행세를 인상(교통세의 14.95%에서 18%로)하는 대신 교통세를 572원에서 559원으로 인하했다. 지난해 10월 버스 택시에 대해서도 화물차와 동일하게 유가보조금을 추가 지급하기로 한 데 따른 결과다. 사업용 버스 택시 화물차 등에 대한 유가보조금은 주행세수를 재원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주행세율을 인상하고 교통세율을 인하하는 세목간 조정작업을 한 것.
“1ℓ당 150원 내리면 1200원 수준”
현재 휘발유 교통세의 법정세율은 교통세법에 따라 630원이다. 그러나 실제 적용되는 세율(실행세율)은 법정세율의 +-30% 범위 안에서 이 법 시행령으로 조정한다. 지방세법에 규정돼 있는 주행세 역시 법정세율은 11.5%이지만 실행세율은 법정세율의 30% 범위 안에서 시행령으로 조정한다. 국제유가가 높을 때 정부가 휘발유 가격안정을 위해 취할 수 있는 대표적인 대책이 바로 교통세율 인하다. 정유업계와 자동차업계가 최근 들어 교통세율 인하를 요구하는 것도 바로 이런 차원이다.
5개 정유사가 회원인 대한석유협회 이원철 상무는 “국내 휘발유 가격은 세금 비중이 높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최상위권이며 일본보다 20% 높은 수준”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교통세를 1ℓ당 409원으로 150원 내리면 교육세와 주행세 등이 함께 인하돼 1ℓ당 약 219원의 세금이 줄고 서울시내 소비자 값은 1ℓ당 1200원 수준으로 안정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유업계는 휘발유 교통세 인하를 통해 내수도 살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업계 관계자는 “교통세 인하를 통해 휘발유 값이 내려가면 국민생활의 부담을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국민의 활동량이 늘어나게 되고 돈도 쓰게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렇게 되면 경기가 살아나 결과적으로 세금도 많이 걷힐 것이기 때문에 교통세 인하로 인한 세수 감소는 문제 될 게 없다는 주장이다.
정유업계에서는 가짜 휘발유가 판치는 이유가 석유류 관련 세금이 높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업계 관계자는 “지금은 정부의 단속이 심해져 판매량이 줄긴 했지만 한때 세녹스가 많이 팔렸던 이유도 석유류 관련 세금이 부과되지 않아 값이 쌌기 때문이었는데, 이는 높은 세금에 대한 일종의 ‘조세 저항’ 차원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교통세를 1ℓ당 150원 내릴 경우 생기는 연간 세수 감소액 2조270억원도 가짜 휘발유 단속을 강화하면 상당 부분 만회할 수 있다고 추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