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22일 프랑스에서 열린 제57회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마이클 무어 감독이 트로피를 치켜들어 환호하고 있다.
‘화씨 9/11’은 2001년 9ㆍ11 테러 사건을 모티브로 부시 대통령 출범 이후의 실정(失政)과 부시가의 비도덕성을 낱낱이 까발린 작품이다. 영화는 각종 인터뷰와 기존의 TV 뉴스 화면만으로 엮어져 있다. 그러나 극적 효과는 강렬하며, 보는 사람을 박장대소하게 만들 만큼 코믹하다. “나는 이번 작품에서 진지하고 직설적이었다. 코미디는 부시 대통령이 했다”는 마이클 무어의 말처럼, 부시라는 인물 자체가 실소와 분노를 금치 못하게 하는 동력을 제공하고 있다. 이 영화를 보고도 또다시 부시에게 표를 던진다면 미국인은 정말 ‘멍청한 백인들’(무어 감독이 2002년에 출간한 책의 이름이기도 하다)이란 비난을 들어도 할 말이 없을 듯하다.
부시 실정 맘껏 조롱 또 표 주면 ‘멍청한 백인’
영화는 암전된 화면에서 비행기의 폭발음이 들린 후 울고 있는 9ㆍ11 테러 희생자 가족들과 테러 발생 전 졸고 있는 부시 대통령을 대비하면서 시작한다. 플로리다의 한 초등학교에서 귀엣말로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졌다는 보고를 받은 부시 대통령은 황급한 소식을 전해듣고도 아이들에게 계속 책을 읽어준다. 카메라는 사태를 직감하지 못한 채 여전히 느긋한 대통령의 얼굴에 초점을 맞추며 ‘그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월척을 낚고 뿌듯해하는 부시, 골프를 즐기면서 측근들과 환하게 웃는 부시의 모습이 한동안 화면에 나타나면 그 아래로 “9ㆍ11이 발생하기 전 부시는 42%의 시간을 여가활동으로 보냈다”는 내용의 자막이 오른다. “테러를 일으킨 살인자들은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며 진지하게 TV 프로그램과 인터뷰를 한 뒤 여유 있게 필드로 나가 골프 드라이버샷을 날리는 모습도 이어진다. 부시 대통령을 맘껏 조롱하고 냉소한 촌철살인의 장면들이다. 의도적으로 연출한 것이 아니라 부시가 스스로 만들어낸 장면들이다.
이어 그는 2000년 대선 당시 부시 가문이 앨 고어에게서 어떻게 표를 훔쳐갔는지부터 시작해 미국의 제1공적이 된 오사마 빈 라덴과 부시 가문 간의 석유사업으로 얽힌 은밀한 유착관계, 무리한 대(對)테러 전쟁과 석유자원을 노린 부당한 이라크 침공 등 부시 대통령이 취임 이후 추진해온 정책들의 허상과 위선을 조목조목 파헤치며 맹공격을 퍼붓는다.
왜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했으며, 이라크의 무고한 민중들과 세계 각국의 군인들이 왜 전쟁터에서 죽어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그의 진지한 인식은 이 영화를 강력한 정치적 테제로 만들어놓는다.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미국에서 영화가 개봉될 경우 부시는 당장 집무실 밖으로 쫓겨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 결코 과장되게 들리지 않을 정도다. 무어 감독에 따르면 ‘화씨 9/11’은 ‘자유가 불타오르기 시작하는 온도’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현재 영화의 미국 내 개봉은 불투명한 상태다. 영화 제작사인 미라맥스의 모회사 월트 디즈니가 “편향적인 정치영화로, 어느 정파도 지지하지 않는 회사의 방침에 어긋난다”며 미라맥스가 배급하는 걸 금지했기 때문이다. 이 달 초 배급금지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화씨 9/11’을 둘러싼 논쟁은 대선에 미칠 수 있는 엄청난 파장 때문에 영화계뿐 아니라 언론계 정계로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디즈니에는 “세제 혜택 축소를 우려한 기업의 정치적 검열”이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2003년 3월 아카데미영화제 시상식에서 마이클 무어 감독은 부시 대통령을 향해 “부끄러운 줄 아시오”라며 독설을 퍼부었다
제작사 미라맥스 “어떤 방법으로든 영화 개봉”
디즈니는 부시 대통령의 동생인 제프 부시가 주지사로 있는 플로리다의 올랜도에 디즈니 테마 파크를 운영하고 있다. “플로리다주의 각종 사업에서 불이익을 당할까 우려하기 때문”이라는 뉴욕타임스의 분석이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이유다. ‘쇼비즈니스계의 피델 카스트로’에 비견될 만큼 디즈니 내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마이클 아이즈너 회장은 지난 대선에서 부시 대통령에게 개인적으로 1000만 달러를 기부했으며, 2001년엔 제프 부시 주지사의 비공식 재정자문 역할도 했다. 9ㆍ11 테러 후 부시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일상생활로 복귀할 것을 요청하는 기자회견에서 “이제 플로리다에 있는 디즈니 월드로 가 가족과 함께 인생을 즐기라”며 디즈니 월드를 꼭 집어 말한 것만 봐도 아이즈너 회장이 부시가와의 인연에 손상을 입히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무어 감독은 “부시의 재집권을 막기 위해 미국 유권자들이 대선 전에 반드시 이 영화를 봐야 한다”며 강한 의지를 내비치고 있다. 무어 감독에게 다행스런 건 제작사인 미라맥스가 어떤 방법으로든 영화의 개봉을 위해 애쓰고 있다는 것이다. 미라맥스는 이 영화 제작에 600만 달러를 썼다. 하비 와인스타인 미라맥스 회장은 모기업인 디즈니에 개인 돈으로 600만 달러를 돌려주고 배급권을 산 뒤 다른 배급업자에게 넘기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가능한 한 독립기념일인 7월4일에 맞춰 영화를 개봉한다는 계획으로 배급권도 극장용 영화, 홈 비디오와 DVD, 그리고 TV 판권으로 작게 쪼개 구매자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복안을 세워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와인스타인 회장이 ‘화씨 9/11’ 개봉을 위해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선 건 지난 수년 동안 아이즈너 회장의 철권통치에 짓눌리면서 받아온 설움을 이번 기회에 앙갚음하기 위해서라고 할리우드 소식통들은 전하고 있다. 사실 디즈니가 이 영화의 배급을 금지하도록 한 결정은 무어 감독도 인정했다시피 이미 1년 전에 내려졌던 것이다. 무어 감독과 와인스타인은 ‘화씨 9/11’이 칸영화제로부터 공식 초청을 받도록 치밀한 계획을 세웠고, 배급금지 사실을 비밀에 부쳤다가 칸영화제가 시작되기 직전에 언론에 터뜨렸다. 와인스타인으로선 숱한 실정으로 지난 주총에서 사퇴압력까지 받았던 아이즈너 회장에게 배급 거부자라는 불명예 낙인에 디즈니의 속사정을 까발리는 미디어의 비난까지 얹어 안겨주는 강펀치를 날린 셈이다.
와인스타인은 1993년 6000만 달러를 받고 자신의 형제가 갖고 있던 미라맥스 주식을 디즈니에 팔았다. 그러나 디즈니의 쥐어짜기 예산집행으로 오스카상을 휩쓴 ‘반지의 제왕’ 제작을 뉴라인 시네마에 넘겨줘야 했고, 브로드웨이에서 빅히트를 치고 있는 뮤지컬 ‘프로듀서스’에 투자할 것을 제안했다가 “브로드웨이 쇼에 투자하는 건 시골 치과의사나 하는 일”이라는 핀잔만 들었다. 와인스타인이 사업확장을 위해 하는 일마다 아이즈너가 사사건건 딴죽을 걸었다. 참다 못한 와인스타인이 미라맥스 주식을 자신에게 되팔 것을 요청했으나 아이즈너는 그 또한 거절했다.
마이클 무어의 저서, ‘멍청한 백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