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한 장면(위).반유대주의를 부추길 수 있다는 이유로 논란이 되고 있는 영화 ‘예수의 수난’의 홈페이지.
CNN은 ‘예수의 미스터리(The Mystery of Jesus)’란 프로그램을 통해 예수와 관련된 인종적 논란을 소개하는 등 몇 차례에 걸쳐 `예수 그리스도 특집을 방송했고, MSNBC는 ‘영화를 둘러싼 미국 사회의 논쟁’을 특집 프로그램으로 내보냈다. 히스토리 다큐멘터리 채널은 영화 ‘예수의 수난’이 실제 사실과 부합하는 점이 무엇이며, 영화에서 각색된 내용은 무엇인지를 조명하기도 했다. 감독 겸 제작자인 멜 깁슨과 예수 역을 맡은 배우 짐 캐비즐을 비롯한 영화 관계자들을 각종 프로그램에서 경쟁적으로 출연시키고 있음은 물론이다.
신문도 마찬가지다. 1~2개 면을 통째로 할애한 대서특필에서부터 쟁점, 인터뷰, 각계 반응 등 단발로 처리한 기사에 이르기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예수의 수난’에 관한 기사를 싣고 있다.
커가는 논란 미 전역이 시끌시끌
사실 ‘예수의 수난’은 예수의 죽음에 대한 유대인들의 책임 시비와 사실적인 수난 장면 묘사로 제작 초기 단계부터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반(反)유대인 감정을 부추길 수 있다는 이유로 할리우드의 영화사들이 작품을 외면해 깁슨은 제작비 2500만 달러를 사비로 충당해야만 했다. 할리우드에선 유대인 인맥이 없으면 성공하기 힘들다고 할 정도로 디즈니를 제외한 대부분의 메이저 영화사들이 유대인의 영향 아래에 있다.
지난해 8월 가편집본이 나온 뒤에는 유대인 단체들의 거센 항의로 유대교 랍비 3명과 가톨릭학자 6명으로 구성된 긴급위원회가 대본과 가편집본을 토대로 영화의 종교적 성향에 대한 검토작업을 벌이기까지 했다. 영화가 완성되기도 전부터 신문, 잡지, TV, 라디오 등 온갖 미디어에 의해 쉼 없이 뉴스거리로 취급돼오다 마침내 영화가 개봉되면서 논란의 정점에 서게 된 것이다.
‘예수의 수난’에는 체포된 예수가 재판을 받을 때 빌라도는 예수를 석방하려 하지만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인들이 예수의 처형을 끈질기게 요구하는 장면이 나온다. 예수 처형에 대한 유대인의 역할 묘사가 반유대적 정서를 자극할 우려가 있다는 게 유대인들의 주장이다. 당초 영화에는 유대인이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말한 성경 구절이 들어 있었으나, 유대인 단체들의 항의가 거세지자 깁슨은 개봉을 앞두고 그 구절을 삭제하기도 했다.
또 하나의 논란은 영화의 폭력성 때문이다. ‘예수의 수난’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숨지기 전 12시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예수에게 가해지는 무자비한 태형과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의 손목 등 고문과 처형 장면이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잔혹하고 끔찍하다는 것이다. ‘나사렛의 예수’(1977년)를 만든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은 “깁슨은 피와 잔인한 싸움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 같다. 쏟아진 피가 유대인들의 잘못이라는 것 말고 관람객들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이 무엇이겠는가”라며 “‘예수의 수난’은 유대인들에 대한 묘사에서 수세기나 후퇴한 작품”이라고 평했을 정도다. 지나치게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묘사 또한 유대인에 대한 증오에 불을 지필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깁슨은 “내 영화는 평화와 사랑과 관용의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모두를 사랑한다”며 “자기희생으로 내 고통을 해소해준 예수에게 감사의 뜻으로 바치는 영화”라고 강변하고 있다. ‘매드 맥스’ 시리즈에 이어 ‘리셀 웨폰’ 등으로 떼돈을 벌었던 깁슨은 1980년대 말 술, 마약에 빠져 ‘정신적 파산’ 상태로 지내다 91년 성경을 통해 구원의 길을 찾았다고 고백했다. 그 모든 반대에도 영화를 개봉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의 수난이 자신을 치유했다는 확신과 종교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깁슨은 다른 종교와의 화해를 선포하고 유대교에 대한 박해를 사과한 1962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 결정을 인정하지 않는 전통주의 가톨릭을 믿고 있어, 비난세력들은 그의 고백을 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유대인들은 “우리가 수천년간 받아온 반유대주의의 고통을 이 영화가 재현할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유대인 종교지도자들뿐만 아니라 드림웍스를 이끌고 있는 제프리 카젠버그와 데이비드 게펜이 사석에서 이 영화에 대한 분노를 나타내는 등 비난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쏟아져나오고 있다. 유대계 신문인 뉴욕타임스가 ‘예수의 수난’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음은 물론이다. 상당수가 유대인인 할리우드 유력 인사들도 몹시 불편해하고 있어 깁슨이 당분간 할리우드에서 일자리를 구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을 정도다.
개봉을 전후해 종교계에서 비난이 쏟아져나왔던 데 비해 비교적 조용하던 영화계에서도 3월9일 구체적 반격이 나왔다. 주인공은 유대 영화인의 대표격인 스티븐 스필버그였다. 스필버그는 그의 히트작 ‘쉰들러 리스트’의 DVD 출시를 앞두고 기념행사를 열었다. 유니버설 스튜디어에 있는 주차장에서 텐트를 치고 연 조촐한 행사였지만 ‘쉰들러 리스트’ 이후 만들어진 학살자 추모재단의 활동에 초점을 맞춘 것이어서 분위기를 숙연하게 했다. 영화 출연 배우들뿐 아니라 영화에 묘사됐던 대학살 생존자들과 재단을 통해 관용에 대해 배우고 있는 고등학생들이 다수 참여한 자리로 눈물의 포옹과 함께 생존자들의 증언이 담긴 비디오를 보는 순서도 있었다. ‘예수의 수난’이 불러일으키고 있는 논쟁 탓인지 여느 행사와 달리 100여명의 내·외신 기자들이 몰려들었고, 그의 견해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이 집요하게 이어졌다. “아직 영화를 보지 못했다. 영화를 보면 제일 먼저 깁슨에게 코멘트를 전할 것”이라며 대답을 회피하던 스필버그는 “‘쉰들러 리스트’가 개봉된 지 10년이 됐는데 세계는 다시 매우 슬픈 곳이 되었다. 사람들은 진정 역사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지 못하는 것 같다”는 말로 ‘예수의 수난’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학살자 추모재단은 그동안 56개국에서 생존자 5만2000명의 증언을 모았는데, 이번 ‘쉰들러 리스트’ DVD에는 생존자들의 코멘트를 담은 77분간의 다큐멘터리 ‘리스트의 목소리(Voice from the List)’가 함께 실려 있다.
‘예수의 수난’은 3월18일 독일을 시작으로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등 유럽에서도 개봉될 예정이다. 독일 종교계와 문화계 유력인사들도 “관객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는 피만 보고 예수 희생의 메시지는 보지 못할 위험성이 크다”고 폭력성과 반유대주의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영화를 둘러싼 반유대주의 논쟁이 조만간 미국을 넘어 유럽으로 확대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종교계의 대대적인 영화 보기 운동에 힘입어 개봉 전 이미 예상됐던 대로 ‘예수의 수난’은 북미지역에서 2주 연속 흥행 1위를 기록하면서 개봉 12일 동안 총 2억1390만 달러의 입장 수입을 올렸다. 개봉 2주째가 되면 입장객이 50% 이상 눈에 띄게 줄어드는 추세와 달리 ‘예수의 수난’은 개봉 3주째에 들어서도 많은 관람객이 찾고 있다. 더군다나 교인들을 대상으로 단체 관람을 실시하는 교회가 늘고 있으며, 일부 교회는 영화 관람 희망자들에게 표를 무료로 나눠주는 등 개신교와 가톨릭 신자들을 중심으로 영화 관람 붐이 더욱 확산되고 있어 한동안 ‘예수의 수난’ 열풍이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