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지방의 얼음 속에 갇혔다 살아 돌아온 두 명의 탐험가가 인간은 절망 속에서 더 강인해진다는 사실을 증명해보이고 있다. 그 주인공은 영국 BBC방송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지난 1000년 동안의 최고 탐험가 10인 가운데 5위에 오른 어니스트 섀클턴과 불굴의 용기를 보여준 러시아 탐험가 발레리안 알바노프. 섀클턴은 자서전 ‘SOUTH’에서, 알바노프는 탐험기 ‘위대한 생존’에서 그 교훈을 펼쳐보이고 있다.
얼음에 갇힌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537일이라는 긴 기간을 보내며 탁월한 리더십으로 대원을 모두 구조해낸 섀클턴의 남극탐험 이야기는 이 시대 리더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에베레스트를 처음 정복한 에드먼드 힐러리 경이 “재난이 일어나고 모든 희망이 사라졌을 때 무릎 꿇고 섀클턴의 리더십을 달라고 기도하라”고 말했던 것도 그런 연유다.
섀클턴은 1914년 고국인 영국이 전운에 휩싸인 혼란을 뒤로 하고 전인미답의 남극대륙을 최초로 횡단하기 위해 영국을 떠난다. 1년여간의 힘든 준비과정을 거쳐 5000여명의 지원자 가운데 과학자와 노련한 선원 27명이 그와 함께 인듀어런스호에 몸을 실었다. 시작은 순조로웠다. 하지만 목적지를 150km 앞두고, 남위 74도 지점의 악명 높은 웨들해에서 부빙(浮氷)에 갇혀버리고 만다.
부빙 위에 표류한 10개월 동안 식량은 바닥났다. 대원들은 물개와 펭귄을 잡아 허기를 달래고 참혹한 동상으로 발이 썩어가는 역경에 처한다. 결국 얼음의 압력으로 배가 부서져버리자 대원들은 세 대의 보트에 나눠 타고 항해를 계속한다.
섀클턴이 탄 보트는 5개월을 헤매다 엘리펀트 섬에 도착했지만 다시 나머지 대원들을 구조하기 위해 길을 떠나야 했다. 길이 6m에 불과한 구명용 보트를 타고 세상에서 가장 거칠고 험하다는 드레이크 해협을 통과해야 했고, 인간이 한 번도 들어가본 적 없는 사우스조지아 섬의 내륙을 두 명의 대원과 함께 도끼 한 자루와 로프 하나로 헤쳐나가야 했다.
결국 섀클턴은 애초 목표였던 남극대륙 횡단에는 실패했지만 자기 희생과 동료애를 발휘해 단 세 명을 제외한 모든 대원들을 구해냈다. 물론 그가 일군 성과는 과학분야에서도 적지 않았다. 탐험에 동반했던 생물학자, 기상학자, 물리학자 등이 고래의 생태와 대기 전위의 변화, 방사능 물질 수집 등 수많은 과학적 성과를 이뤄냈다.
1912년 러시아 탐험선 세인트 안나호도 23명의 선원을 태우고 북극의 얼음바다를 향해 서슴없이 나아갔다. 그러나 배는 페테르부르크항을 떠난 지 3개월 만에 부빙에 갇혀버렸고 선원들은 그곳에서 추위와 싸우며 18개월을 보내야 했다. 선원들은 곧 한계에 부닥쳤다. 반란의 기운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 식량은 많이 남아 있었지만 석탄과 목재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선원들의 건강이 크게 나빠졌다. 선원들은 ‘하얀 죽음’(white deathㆍ얼음 속에서의 죽음을 상징)에 자신들을 내맡겨둘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때 항해사 발레리안 알바노프가 죽음의 행군을 감행한다. 그는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배를 버리고 썰매와 카약에 의지해 남쪽의 프란츠 조지프 랜드를 향해 430여km의 얼음황무지를 횡단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의 뜻에 동의하는 13명의 동료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고난의 행군은 섀클턴의 그것 못지않았다.
“벌써 두 달 동안 한 번도 씻지 못했다. 어느 날은 육분의(六分儀·배의 위치나 천체의 고도를 재는데 쓰는 기기)에 달린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때가 하도 두껍게 덮여 얼굴을 못 알아볼 정도로 달라져 있었던 것이다.”
바다코끼리에게 쫓기던 일, 살얼음을 밟아 물에 빠져 몸이 마비돼가던 일, 경도 측정 기구가 망가져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할 수 없던 일 등을 겪으면서도 알바노프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는 배신했다 돌아온 동료 두 명을 너그럽게 감싸 안고, 우왕좌왕하는 동료들을 얼음처럼 차가운 이성으로 이끌어나갔다. 그러나 살아남은 이는 그와 선원 콘라드뿐이었다.
위의 두 실패한 탐험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간명하다. 인간 정신의 위대함은 성공 속에서가 아니라 시련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는 것.
SOUTH/ 최종옥 옮김/ 655쪽/ 2만3000원
위대한 생존/ 홍한별 옮김/ 283쪽/ 9800원
얼음에 갇힌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537일이라는 긴 기간을 보내며 탁월한 리더십으로 대원을 모두 구조해낸 섀클턴의 남극탐험 이야기는 이 시대 리더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에베레스트를 처음 정복한 에드먼드 힐러리 경이 “재난이 일어나고 모든 희망이 사라졌을 때 무릎 꿇고 섀클턴의 리더십을 달라고 기도하라”고 말했던 것도 그런 연유다.
섀클턴은 1914년 고국인 영국이 전운에 휩싸인 혼란을 뒤로 하고 전인미답의 남극대륙을 최초로 횡단하기 위해 영국을 떠난다. 1년여간의 힘든 준비과정을 거쳐 5000여명의 지원자 가운데 과학자와 노련한 선원 27명이 그와 함께 인듀어런스호에 몸을 실었다. 시작은 순조로웠다. 하지만 목적지를 150km 앞두고, 남위 74도 지점의 악명 높은 웨들해에서 부빙(浮氷)에 갇혀버리고 만다.
부빙 위에 표류한 10개월 동안 식량은 바닥났다. 대원들은 물개와 펭귄을 잡아 허기를 달래고 참혹한 동상으로 발이 썩어가는 역경에 처한다. 결국 얼음의 압력으로 배가 부서져버리자 대원들은 세 대의 보트에 나눠 타고 항해를 계속한다.
섀클턴이 탄 보트는 5개월을 헤매다 엘리펀트 섬에 도착했지만 다시 나머지 대원들을 구조하기 위해 길을 떠나야 했다. 길이 6m에 불과한 구명용 보트를 타고 세상에서 가장 거칠고 험하다는 드레이크 해협을 통과해야 했고, 인간이 한 번도 들어가본 적 없는 사우스조지아 섬의 내륙을 두 명의 대원과 함께 도끼 한 자루와 로프 하나로 헤쳐나가야 했다.
결국 섀클턴은 애초 목표였던 남극대륙 횡단에는 실패했지만 자기 희생과 동료애를 발휘해 단 세 명을 제외한 모든 대원들을 구해냈다. 물론 그가 일군 성과는 과학분야에서도 적지 않았다. 탐험에 동반했던 생물학자, 기상학자, 물리학자 등이 고래의 생태와 대기 전위의 변화, 방사능 물질 수집 등 수많은 과학적 성과를 이뤄냈다.
1912년 러시아 탐험선 세인트 안나호도 23명의 선원을 태우고 북극의 얼음바다를 향해 서슴없이 나아갔다. 그러나 배는 페테르부르크항을 떠난 지 3개월 만에 부빙에 갇혀버렸고 선원들은 그곳에서 추위와 싸우며 18개월을 보내야 했다. 선원들은 곧 한계에 부닥쳤다. 반란의 기운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 식량은 많이 남아 있었지만 석탄과 목재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선원들의 건강이 크게 나빠졌다. 선원들은 ‘하얀 죽음’(white deathㆍ얼음 속에서의 죽음을 상징)에 자신들을 내맡겨둘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때 항해사 발레리안 알바노프가 죽음의 행군을 감행한다. 그는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배를 버리고 썰매와 카약에 의지해 남쪽의 프란츠 조지프 랜드를 향해 430여km의 얼음황무지를 횡단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의 뜻에 동의하는 13명의 동료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고난의 행군은 섀클턴의 그것 못지않았다.
“벌써 두 달 동안 한 번도 씻지 못했다. 어느 날은 육분의(六分儀·배의 위치나 천체의 고도를 재는데 쓰는 기기)에 달린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때가 하도 두껍게 덮여 얼굴을 못 알아볼 정도로 달라져 있었던 것이다.”
바다코끼리에게 쫓기던 일, 살얼음을 밟아 물에 빠져 몸이 마비돼가던 일, 경도 측정 기구가 망가져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할 수 없던 일 등을 겪으면서도 알바노프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는 배신했다 돌아온 동료 두 명을 너그럽게 감싸 안고, 우왕좌왕하는 동료들을 얼음처럼 차가운 이성으로 이끌어나갔다. 그러나 살아남은 이는 그와 선원 콘라드뿐이었다.
위의 두 실패한 탐험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간명하다. 인간 정신의 위대함은 성공 속에서가 아니라 시련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는 것.
SOUTH/ 최종옥 옮김/ 655쪽/ 2만3000원
위대한 생존/ 홍한별 옮김/ 283쪽/ 9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