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5일 기자회견에서 현대투신증권 매각을 발표하고 있는 윤용로 금융감독위원회 감독정책2국장(맨 왼쪽).
이를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보는 쪽에서는 각종 규제로 그룹이 금융 계열사의 ‘단물’을 빨아먹기 어려워진 데다, 그 상당수가 만성적 영업 부진에 시달리고 있음을 그 이유로 든다.
때를 같이해 재계, 시민단체,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와 재정경제부(이하 재경부), 금융감독위원회(이하 금감위) 등에서는 △금융사 보유 동 계열사 주식에 대한 의결권 제한 여부 △금융사에 대한 그룹 계열분리 청구제 △재벌의 지주회사 전환 △재벌의 은행 소유 금지 등을 둘러싼 논쟁이 뜨겁다. 정부가 어떤 정책을 택하든 은행·보험·증권 등 금융권 전체의 구조조정 빅뱅은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의결권 제한 재도입, 계열분리청구제 시행 등이 이루어질 경우 재벌 계열 금융사의 새 주인 찾기는 더욱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상자기사 참조).
과거 재벌에게 있어 금융 계열사는 반드시 가지고픈 무엇이었다. 그래서 삼성-LG-SK-현대-대우 등 주요 재벌은 법으로 금지된 은행을 제외하고는 증권, 생명보험, 카드, 투신운용 등 대부분의 제2금융권 시장에 앞 다투어 진출했다.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김상조(한성대·경영학) 소장은 재벌이 금융사 소유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직·간접적 이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첫째, 금융 계열사는 재벌의 자금줄 역할을 해왔다. 평상시는 아니지만 ‘특단의 조처’가 필요할 때면 돈을 맡긴 고객의 의지와 상관 없이 부당 지원에 나서곤 했다. 둘째, 재벌 총수의 경영권 보호를 위한 안전판 노릇을 했다. 기관투자자로서 그룹 계열사 주식을 매입, 사실상 총수 우호지분으로 활동한 것이다. 삼성그룹처럼 아예 자금이 풍부한 금융사(삼성생명)를 그룹 지배의 핵심고리로 삼은 곳도 있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글로벌 경제에 본격 편입되면서 재벌-금융사 간 ‘밀착’에 대한 정부, 주식시장, 시민단체의 감시도 본격화했다.
또 하나의 요인은 금융산업 환경의 급격한 변화다. 선택과 집중을 통한 대형화, 전문화가 대세인 것. 우리나라에도 신한금융지주, 우리금융지주 등 매머드급 금융전문그룹이 생겨났다. 미래에셋증권 한정태 부장은 “금융사 경영의 효율성과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다양한 서비스를 다양한 고객에게 다양한 형태로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 핵심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은행이다. 금융거래는 물론 보험, 증권, 투자, 개인자산 관리 등을 모두 아우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벌은 금융 소유가 금지돼 있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금융 계열사의 경우 ‘그룹 챙기기’에 우선 순위를 두다 보니 경쟁력도 낮은 편이다. 이들 중 ‘업계 1위’가 드문 것이 그 증거다.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한 한 재벌 계열 증권사 간부는 “계열사 내 위상 자체가 달라졌다. 이전에는 금융자본이 실물경쟁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었다. 차입경영이 대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자금) 공급이 수요를 앞지르는 시대다. 특히 산업기반이 탄탄한 재벌일수록 더 그렇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상조 소장은 “재벌 금융 계열사 의결권 제한 및 계열분리청구제 도입이 불발에 그칠 경우 재벌의 금융업 진출은 계속될 것이다. 그룹 지배에 그보다 유용한 수단은 없기 때문이다. 두 제도에 대한 정부의 결정이 주목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금융 철수론’이 일고 있는 LG-SK-현대 그룹의 상황은 어떠한가.
서울 강남 LG카드 본사.
국내 최초로 지주회사체제를 출범시킨 LG그룹에는 모두 5개의 금융 계열사가 있다. 현행 지주회사법은 비금융기업 지주회사와 금융지주회사를 구분, 전자가 금융기업을 자회사로 두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때문에 LG의 지주회사 개편 과정에서 LG투자증권, LG카드 등은 지주회사인 ㈜LG의 자회사로 편입되지 못했다. 대신 LG투자증권이 금융 부문 지주회사 역할을 맡게 됐다.
이 와중에 LG카드 사태가 터졌다. 지주회사 체제는 LG카드 부실로 인한 불똥이 그룹 전체로 튀는 것을 막아줬다. 대신 LG투자증권이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됐다. 현재 LG는 1조원 증자를 추진 중이다. 실권주(신주 인수권자가 청약기일까지 청약하지 않거나 납입일에 돈을 내지 않아 인수되지 않은 주식)가 발생하면 LG투자증권이 이를 모두 인수하는 총액인수방식이다. 그뿐 아니다. LG카드는 이미 매각 외에 다른 회생방법이 없는 것으로 판정이 났다. 이 경우 대주주 책임론에 따라 LG투자증권 역시 계열분리 매각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아울러 LG카드가 부실금융회사로 지정되면 구본무 회장은 관련 법률에 따라 대주주로서 경제적 책임을 지지 않는 이상, 신규 금융업 진출이 원천 봉쇄된다.
현대그룹-현대증권 매각 논쟁 언제까지…
요즘 LG투자증권 못지않게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 현대그룹 산하 현대증권이다. 현대증권 역시 현대투자증권 경영 실패에 대한 대주주 책임론에 따라 매각이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현대증권 경영진은 물론 노조까지 나서 정부의 매각 압력에 강력히 저항하고 있는 형국이라 앞날을 예측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왕자의 난’으로 분열되기 전 현대그룹은 총 11개의 금융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러나 1999년 그룹이 생명보험업에 진출하면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정몽구-몽헌-몽일 3형제는 아버지인 정주영 회장의 뜻에 따라 각 300억원씩을 투자, 현대생명을 설립했다. 현대생명은 한국생명, 조선생명 등 군소 생보사를 인수해 덩치를 불려나갔지만 함께 가져온 부실에 눌려 극심한 자금난을 겪어야 했다. 여기 더해 ‘왕자의 난’으로 사실상 방치됨으로써 걸음마도 떼보지 못한 채 문을 닫았다.
이후 현대그룹 금융사들은 현대자동차 계열, 현대(아산)그룹 계열, 현대해상(대주주 정몽윤) 등으로 사분오열됐다. 간판 금융사였던 현대투신증권, 현대투신운용, 현대증권은 현대그룹 소유가 됐다. 11월25일 이중 현대투신증권과 현대투신운용이 외국계 생명보험사인 푸르덴셜에 매각됐다. 문제는 매각 가격이 5000억~7000억원으로, 정부가 현대투자증권 부실 해소와 재무건전성 충족을 위해 투입해야 할 공적자금 2조4000억~2조5000억원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상황이 이렇자 정부는 “현대투자증권 대주주인 현대증권을 매각해 그 대금 5000억~6000억원으로 공적자금을 메우겠다”는 뜻을 밝혔다. 정부는 그 근거로 금감위의 ‘부실금융기관 대주주의 경제적 책임부담 기준’과 고 정몽헌 회장의 매각 약속을 들고 있다. 이를 위해 정부는 이미 10월 초부터 현대증권을 매각하지 않으면 선물업 신규 허가를 내주지 않겠다고 하는 등 현대증권 경영진에 강압에 가까운 압력을 행사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현대증권의 한 임원은 “현대증권은 건실한 회사다. 현금으로든 채권 매입을 통해서든 법이 정한 부실에 대한 책임을 질 의사도 있다. 그런데 왜 억지로 매각하려 드는가. 정몽헌 회장의 ‘약속’이라는 것 역시 법적 구속력이 없다. 또 책임분담금을 낸다 해도 정부가 ‘현대증권 몫’으로 정해놓은 2500억~3000억원은 너무 많다. 우리는 1000억원 정도를 적정선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현정은 현대엘리베이터 회장 역시 “현대증권은 절대 내놓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현대증권 노조도 금감위 항의 방문을 시작으로 투쟁 수위를 점차 높여가고 있다.
이러한 현대증권 노조의 움직임은 LG투자증권 노조의 그것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LG투자증권 노조는 12월3일 기자회견을 열고 “LG 카드 부실 책임은 구본무 회장 등 대주주의 부도덕과 경영 실패에 있다. 그 책임을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가하려는 시도에 분노한다. 소액주주들과 함께 LG투자증권을 지켜낸 뒤 그룹에서 독립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비춰볼 때 매각 가능성은 LG투자증권 쪽이 더 높아 보인다. 서로 다른 이유에서긴 하지만 대주주와 노조 모두 ‘결별’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증권 출신의 한 유명 애널리스트는 “그러나 현대증권 매각은 쉽지 않을 것이다. 매각의 주체도, 매각 대상으로 거론되는 세력도 없지 않은가. 그 지난한 작업을 누가 총대 메고 나서겠는가”라고 반문했다.
SK그룹-눈물 머금고 금융업 철수 준비
SK그룹은 이미 올 중순부터 사실상의 금융업계에서의 철수를 준비해왔다. SK에는 5개의 금융사가 있다. SK네트웍스(구 SK글로벌) 사태 후 대대적 구조조정이 진행되면서 이중 SK증권, SK생명, SK투신운용이 매물로 나왔다. 이들 3사의 대주주가 그룹 지주회사 격인 SK네트웍스이기 때문이다. SK캐피탈은 SK텔레콤이 전액 출자한 회사인 덕에 매각 위기를 모면했다.
11월9일, 우선 SK투신운용이 미래에셋증권에 매각됐다. 다음 타자는 SK증권이다. 그러나 손길승 회장을 비롯한 최고경영진은 SK증권에 대한 미련을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다 한다. 그러나 SK그룹 사태의 주원인 중 하나가 JP모건과의 SK증권 주식 이면거래임을 감안하면 이는 피할 수 없는 수순이다. 무엇보다 SK 계열사들은 금융업 특성에 맞춘 ‘규모의 경제’를 이루지 못해 만성 적자와 영업 부진에 시달려왔다. 그 자체로 이미 구조조정 대상인 것이다.
SK가 다시 금융업에 손을 댄다면 SK텔레콤을 통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SK텔레콤이 향후 주 수익원으로 상정하고 있는 것이 바로 금융업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