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의 유일한 국제선 항공사인 에어캐나다가 중국(홍콩) 재벌 리카싱가(家)에 인수될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경영난에 허덕이며 올 4월부터 법정관리를 받아오던 에어캐나다는 리카싱가가 지배하는 TTI(Trinity Time Investments)사의 구원 제의를 받아들이겠다고 최근 발표했다.
이 제의에 따라 TTI와 TTI의 오너인 빅터 리(39·리카싱의 장남)가 총 11억 캐나다달러(미화 8억4000만 달러)를 에어캐나다에 수혈해 자본 재구성 방식으로 경영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 시나리오가 최종적으로 현실화하려면 채권단의 동의, 연방정부의 외국자본 출자 승인 등 몇 가지 관문을 통과해야 하지만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해당사자들과 정부가 모두 이번 거래를 반기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이번 결정을 세계화의 시각에서 보면 요즘 흔한 국제적 빅딜(기업간 대규모 사업부문 교환)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회사가 일개 민간기업이기 이전에 캐나다라는 국가를 상징하는 이미지를 쌓은 점, 새 지배자본이 의외의 지역 출신이라는 점에서 여러 가지 얘깃거리를 제공한다. 주요 산업을 미국 자본이 지배하는 데 대한 캐나다의 경계심이 이번 거래 과정에서 드러난다. 또 캐나다인들이 과거 업신여기고 거부감을 느꼈던 중국이란 나라와 캐나다 내 중국인 커뮤니티를 조용히 수용해가는 변화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9·11과 사스 파동 위기 극복 못해
캐나다에는 무려 600여개의 항공사가 있다. 땅은 넓지만 인구는 적은 이 나라에서 수많은 미니 항공사들이 육로로는 외부와 연결되기 어려운 오지마을 사람들에게 교통서비스를 제공한다. 캐나다의 이 많은 항공사 중에서 국제선 정기노선에 취항하는 회사는 에어캐나다 하나뿐이다. 최근까지 커네이디언 항공사와 에어캐나다, 두 캐나다 회사가 국제선에서 경쟁했지만 2000년 두 회사는 ‘에어캐나다’라는 이름으로 합병했다. 에어캐나다는 1937년 국영기업으로 출범해 오랫동안 이 나라의 간판 항공사 역할을 했다. 따라서 1989년 민영화된 이후로도 캐나다의 대표적 항공업체로 국제적 성가를 유지했다.
에어캐나다는 합병을 통해 출혈경쟁을 끝내고 해묵은 적자구조를 반전시키려는 갖가지 자구책을 폈으나 9·11사태와 사스 파동 때문에 생긴 항공수요 격감이라는 악재로 인해 더 버티지 못하고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캐나다는 사스 파동 때 진원지인 중국을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많은 환자가 발생한 나라였다.
에어캐나다 인수를 놓고 리카싱가와 미국 뉴욕을 본거지로 한 서버러스 캐피털(이하 서버러스)이란 회사가 경합했다. 에어캐나다는 양쪽의 제안을 검토한 끝에 이번 결정을 내렸다. 서버러스는 적대적 인수합병(M&A)을 포함한 돈놀이 전문 기업이다. ‘서버러스’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지옥을 지키는, 머리 셋에 꼬리는 뱀 모양인 개를 뜻한다.
캐나다의 뉴스 미디어들은 일반적으로 친미적이고, 보기에 따라 사대적인 경향이 농후하지만 이번 에어캐나다의 구원자 결정에 대해 대체로 환영하는 논조다. 에어캐나다의 전·현직 종업원들을 포함한 시민들이 이번 거래에 안도하는 모습을 중점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선진국도 아닌, 개발도상국의 자본이 이 나라의 간판급 항공사를 지배하다니…’ 따위의 개탄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나오지 않는다.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배경이 이 같은 분위기를 만든 것으로 풀이된다.
첫째는 서버러스 식 기업활동 행태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캐나다적 가치관과 이에 충실한 장 크레티앵 정부의 입장이다. 경제·사회적으로 캐나다의 국가틀은 예나 지금이나 자본주의지만, 캐나다는 기업활동의 무제한적 자유를 외치는 신보수주의적 자본주의를 경계해왔다. 이 나라 역대 집권자 중 반미적이었다고 단정할 만한 인물은 거의 없지만 성향에 따라 대미 관계에서 캐나다의 독립성을 중요시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구분이 생겼다. 크레티앵은 전자로 분류된다.
캐나다는 에너지·방송·항공·운송 등 국가의 독립성과 관련되는 산업에 대한 외국자본의 지배를 막기 위해 출자상한선을 두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외국’이란 현실적으로 미국을 지칭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항공·운송 기업에서 외국자본의 출자상한선은 25%다. 이번 거래의 주역인 빅터 리는 중국과 캐나다 국적을 다 갖고 있기 때문에 이 제약을 벗어날 것으로 보인다. 만약 에어캐나다의 구원자로 서버러스가 지정됐더라면 이 규정을 피해가기 위한 여러 편법이 동원돼야 할 상황이다.
이번 거래에 대해 캐나다인이 안도하는 두 번째 배경은 리카싱가가 캐나다와의 인연을 쌓기 위해 오랫동안 공을 많이 들인 점이다. 1960년대 홍콩에서 조화 만드는 공장을 운영한 것에서 출발해 오늘날 세계적 대기업을 일군 리카싱씨(75)는 홍콩의 주권이 중국에 귀속되기 10여년 전부터 중국 치하의 홍콩에서 기업 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고 판단, 여러 돌파구를 마련해두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아들들의 캐나다 국적 취득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리카싱가는 또 이 나라에 직접 투자해 활발히 사업을 벌였다. 1980년대 캘거리에 본사를 둔 허스키 석유회사를 인수해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경영하고 있으며, 밴쿠버 다운타운 개발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돈을 벌어가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곳 지역사회에 환원한 것이다.
리카싱家 2세들 캐나다 국적 취득
캐나다엔 총 인구의 약 4%인 120만명 가량의 중국계 주민이 산다. 비(非)백인 인구 중 가장 많은 수다. 미국에선 최대 소수인종이 흑인과 중남미계지만 캐나다에서는 중국계와 인도계가 각각 1, 2위다. 캐나다에 사스 환자가 많이 발생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중국인들은 19세기 후반 캐나다에 처음 발을 들였다. 1858년 캐나다의 서해안에서 사금이 발견되자 노다지를 노리고 ‘꾼’들이 몰려들었는데, 주로 미국인이었지만 중국인들도 섞여 있었다. 중국인들은 이보다 9년 전에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벌어진 골드러시를 노리고 태평양을 건너기도 했다. 그러나 그 판의 백인들로부터 인종차별을 받고 캘리포니아 지역의 골드러시 자체가 시들해지면서 중국인들은 캐나다로 눈을 돌렸다.
1880년대 캐나다가 전국 횡단철도를 건설하자 또 한 차례 중국인들이 몰려왔다. 인구가 400만명에 불과한 데다 그나마 대부분 동부에 몰려 살던 당시 캐나다의 상황을 고려할 때 횡단철도의 서쪽 구간을 맡을 건설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시공회사는 바다 건너 중국인을 ‘수입해’ 문제를 해결했다.
캐나다보다 10여년 앞서 완공된 미국의 횡단철도 건설에도 중국인들이 크게 기여했다. 당시 미국 횡단철도의 동쪽 구간은 백인들 중 가장 빈민층을 형성했던 아일랜드계 인력이 주로 맡았고, 백인 정착자가 거의 없던 서부 구간은 중국인들이 주로 맡았다. 아일랜드의 농민들은 1840년대 대기근을 맞아 사생결단의 각오로 신대륙으로 이주했다. 철도공사판의 아일랜드계 인력은 다른 백인 노동자보다 더 열악한 대우를 받고 중국인들은 그 아일랜드인보다도 못한 조건에서 일했다.
미국에서 시작된 중국인들에 대한 차별은 캐나다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근로조건만 나빴던 게 아니라 백인들은 일상에서 중국인들을 멸시했다. 중국인들의 매독은 백인의 그것보다 독성이 더 강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중국인들은 차별을 피해 따로 모여 사는 일종의 ‘게토’를 형성했다.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와 캐나다의 밴쿠버에서 원조 격인 차이나타운이 들어선 것은 이 같은 아픈 역사의 귀결이다.
초기의 박해를 견뎌낸 중국인의 후예 중 상당수는 오늘날 캐나다 주류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엘리트적 지위에 올라 있다. 이 나라에서 공직 서열 제1위이며, 연방총리보다 형식적으로는 더 높은 총독이 중국계의 후예인 에이드리언 클락슨이란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제의에 따라 TTI와 TTI의 오너인 빅터 리(39·리카싱의 장남)가 총 11억 캐나다달러(미화 8억4000만 달러)를 에어캐나다에 수혈해 자본 재구성 방식으로 경영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 시나리오가 최종적으로 현실화하려면 채권단의 동의, 연방정부의 외국자본 출자 승인 등 몇 가지 관문을 통과해야 하지만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해당사자들과 정부가 모두 이번 거래를 반기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이번 결정을 세계화의 시각에서 보면 요즘 흔한 국제적 빅딜(기업간 대규모 사업부문 교환)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회사가 일개 민간기업이기 이전에 캐나다라는 국가를 상징하는 이미지를 쌓은 점, 새 지배자본이 의외의 지역 출신이라는 점에서 여러 가지 얘깃거리를 제공한다. 주요 산업을 미국 자본이 지배하는 데 대한 캐나다의 경계심이 이번 거래 과정에서 드러난다. 또 캐나다인들이 과거 업신여기고 거부감을 느꼈던 중국이란 나라와 캐나다 내 중국인 커뮤니티를 조용히 수용해가는 변화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9·11과 사스 파동 위기 극복 못해
캐나다에는 무려 600여개의 항공사가 있다. 땅은 넓지만 인구는 적은 이 나라에서 수많은 미니 항공사들이 육로로는 외부와 연결되기 어려운 오지마을 사람들에게 교통서비스를 제공한다. 캐나다의 이 많은 항공사 중에서 국제선 정기노선에 취항하는 회사는 에어캐나다 하나뿐이다. 최근까지 커네이디언 항공사와 에어캐나다, 두 캐나다 회사가 국제선에서 경쟁했지만 2000년 두 회사는 ‘에어캐나다’라는 이름으로 합병했다. 에어캐나다는 1937년 국영기업으로 출범해 오랫동안 이 나라의 간판 항공사 역할을 했다. 따라서 1989년 민영화된 이후로도 캐나다의 대표적 항공업체로 국제적 성가를 유지했다.
에어캐나다는 합병을 통해 출혈경쟁을 끝내고 해묵은 적자구조를 반전시키려는 갖가지 자구책을 폈으나 9·11사태와 사스 파동 때문에 생긴 항공수요 격감이라는 악재로 인해 더 버티지 못하고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캐나다는 사스 파동 때 진원지인 중국을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많은 환자가 발생한 나라였다.
에어캐나다 인수를 놓고 리카싱가와 미국 뉴욕을 본거지로 한 서버러스 캐피털(이하 서버러스)이란 회사가 경합했다. 에어캐나다는 양쪽의 제안을 검토한 끝에 이번 결정을 내렸다. 서버러스는 적대적 인수합병(M&A)을 포함한 돈놀이 전문 기업이다. ‘서버러스’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지옥을 지키는, 머리 셋에 꼬리는 뱀 모양인 개를 뜻한다.
캐나다의 뉴스 미디어들은 일반적으로 친미적이고, 보기에 따라 사대적인 경향이 농후하지만 이번 에어캐나다의 구원자 결정에 대해 대체로 환영하는 논조다. 에어캐나다의 전·현직 종업원들을 포함한 시민들이 이번 거래에 안도하는 모습을 중점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선진국도 아닌, 개발도상국의 자본이 이 나라의 간판급 항공사를 지배하다니…’ 따위의 개탄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나오지 않는다.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배경이 이 같은 분위기를 만든 것으로 풀이된다.
첫째는 서버러스 식 기업활동 행태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캐나다적 가치관과 이에 충실한 장 크레티앵 정부의 입장이다. 경제·사회적으로 캐나다의 국가틀은 예나 지금이나 자본주의지만, 캐나다는 기업활동의 무제한적 자유를 외치는 신보수주의적 자본주의를 경계해왔다. 이 나라 역대 집권자 중 반미적이었다고 단정할 만한 인물은 거의 없지만 성향에 따라 대미 관계에서 캐나다의 독립성을 중요시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구분이 생겼다. 크레티앵은 전자로 분류된다.
캐나다는 에너지·방송·항공·운송 등 국가의 독립성과 관련되는 산업에 대한 외국자본의 지배를 막기 위해 출자상한선을 두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외국’이란 현실적으로 미국을 지칭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항공·운송 기업에서 외국자본의 출자상한선은 25%다. 이번 거래의 주역인 빅터 리는 중국과 캐나다 국적을 다 갖고 있기 때문에 이 제약을 벗어날 것으로 보인다. 만약 에어캐나다의 구원자로 서버러스가 지정됐더라면 이 규정을 피해가기 위한 여러 편법이 동원돼야 할 상황이다.
이번 거래에 대해 캐나다인이 안도하는 두 번째 배경은 리카싱가가 캐나다와의 인연을 쌓기 위해 오랫동안 공을 많이 들인 점이다. 1960년대 홍콩에서 조화 만드는 공장을 운영한 것에서 출발해 오늘날 세계적 대기업을 일군 리카싱씨(75)는 홍콩의 주권이 중국에 귀속되기 10여년 전부터 중국 치하의 홍콩에서 기업 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고 판단, 여러 돌파구를 마련해두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아들들의 캐나다 국적 취득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리카싱가는 또 이 나라에 직접 투자해 활발히 사업을 벌였다. 1980년대 캘거리에 본사를 둔 허스키 석유회사를 인수해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경영하고 있으며, 밴쿠버 다운타운 개발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돈을 벌어가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곳 지역사회에 환원한 것이다.
리카싱家 2세들 캐나다 국적 취득
캐나다엔 총 인구의 약 4%인 120만명 가량의 중국계 주민이 산다. 비(非)백인 인구 중 가장 많은 수다. 미국에선 최대 소수인종이 흑인과 중남미계지만 캐나다에서는 중국계와 인도계가 각각 1, 2위다. 캐나다에 사스 환자가 많이 발생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중국인들은 19세기 후반 캐나다에 처음 발을 들였다. 1858년 캐나다의 서해안에서 사금이 발견되자 노다지를 노리고 ‘꾼’들이 몰려들었는데, 주로 미국인이었지만 중국인들도 섞여 있었다. 중국인들은 이보다 9년 전에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벌어진 골드러시를 노리고 태평양을 건너기도 했다. 그러나 그 판의 백인들로부터 인종차별을 받고 캘리포니아 지역의 골드러시 자체가 시들해지면서 중국인들은 캐나다로 눈을 돌렸다.
1880년대 캐나다가 전국 횡단철도를 건설하자 또 한 차례 중국인들이 몰려왔다. 인구가 400만명에 불과한 데다 그나마 대부분 동부에 몰려 살던 당시 캐나다의 상황을 고려할 때 횡단철도의 서쪽 구간을 맡을 건설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시공회사는 바다 건너 중국인을 ‘수입해’ 문제를 해결했다.
캐나다보다 10여년 앞서 완공된 미국의 횡단철도 건설에도 중국인들이 크게 기여했다. 당시 미국 횡단철도의 동쪽 구간은 백인들 중 가장 빈민층을 형성했던 아일랜드계 인력이 주로 맡았고, 백인 정착자가 거의 없던 서부 구간은 중국인들이 주로 맡았다. 아일랜드의 농민들은 1840년대 대기근을 맞아 사생결단의 각오로 신대륙으로 이주했다. 철도공사판의 아일랜드계 인력은 다른 백인 노동자보다 더 열악한 대우를 받고 중국인들은 그 아일랜드인보다도 못한 조건에서 일했다.
미국에서 시작된 중국인들에 대한 차별은 캐나다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근로조건만 나빴던 게 아니라 백인들은 일상에서 중국인들을 멸시했다. 중국인들의 매독은 백인의 그것보다 독성이 더 강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중국인들은 차별을 피해 따로 모여 사는 일종의 ‘게토’를 형성했다.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와 캐나다의 밴쿠버에서 원조 격인 차이나타운이 들어선 것은 이 같은 아픈 역사의 귀결이다.
초기의 박해를 견뎌낸 중국인의 후예 중 상당수는 오늘날 캐나다 주류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엘리트적 지위에 올라 있다. 이 나라에서 공직 서열 제1위이며, 연방총리보다 형식적으로는 더 높은 총독이 중국계의 후예인 에이드리언 클락슨이란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