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의 한 주상복합 아파트 모델하우스는 청약신청하려는 이들로 북적거린다.
이번 대책은 사실상 서울 강남권 등 투기지역을 대상으로 한다. 그러나 강남권 부동산 시장은 “일단 기다려보자”는 분위기다.
대책 발표 사흘째인 10월31일 오전 대치동 은마아파트 34평형은 7억5000만~8억2000만원, 31평형은 6억4000만~7억2000만원으로 10·29 부동산대책이 발표되기 이전 시세 그대로였다. 34평형짜리 급매물이 7억7000만원에, 31평형짜리 급매물이 6억4000만원에 나왔지만 사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인근 상가에서 부동산중개사무소를 운영하는 부동산중개업자 박모씨는 “매물이 거의 없고 호가에 대한 문의만 많다”며 “은마아파트 상가 내에 30여개의 부동산중개사무소가 있는데 10월에는 한 달 내내 거의 거래가 끊겨 모두들 사무소 운영하기도 어려운 지경이다”고 말했다.
이번 부동산대책이 발표된 뒤 일부 다주택 보유자들 사이에서는 임대주택사업자로 등록하거나 증여하는 등의 방법으로 법망을 빠져나가려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10월 말 현재 강남구의 경우 임대주택사업자로 등록된 개인과 법인이 1700여개. 임대주택사업자로 등록할 경우 취득세와 등록세를 감면받게 된다. 강남구청 주택과 한 관계자는 “평소 1주일에 10여 건 정도 사업자 등록이 이뤄지는데 10·29 부동산대책 발표가 임박한 10월 마지막 주에는 30여 건으로 늘어났다”고 말했다. 또 대치동의 한 부동산중개업자는 “증여를 통해 다주택 보유자에 대한 중과세를 피해가려는 사람들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부동산 시장의 거품을 없애겠다는 정부의 이번 대책이 거의 먹혀들지 않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국회 시정연설에서 토지공개념까지 거론하며 폭등하는 부동산 가격을 잡겠다고 공언한 뒤에 나온 정부의 대책치고는 미흡하다는 분위기다. 결국 ‘강남 불패 신화’는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다주택 보유자들 임대사업자 등록 등으로 발빠른 대응
정부는 10월29일 주택시장 안정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강남 불패 신화가 처음 등장한 것은 2년 전. 분당 안양 부천 등지의 교육평준화로 인해 대치동 등 강남권 학원가가 부상하고 재건축 붐이 일기 시작한 것과 때를 같이한다. 때마침 강남권의 아파트 등 부동산은 항상 공급이 달린다는 게 정설로 받아들여지면서 강남 불패 신화는 더욱 굳어졌다. 2년 전에 비해 강남권의 아파트 가격은 2~3배 급등했다.
정부의 강도 높은 부동산 대책에도 불구하고 부동산 시장은 관망세가 이어지고 있다.10월29일 오후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송파구 잠실 주공5단지 아파트 상가 내 중개업소들.
이 가운데 부동산 시장을 왜곡하는 가장 큰 요소는 작전세력이다. 수백억원을 굴리는 전주와 몇 억원씩 모아 수십억원의 투자펀드를 구성해 돈 되는 곳을 찾아 몰려다니는 이들이다. 가수요를 형성해 가격을 상승시키기도 하고, 특정 아파트 단지의 물건을 일시에 거둬들이기도 하는 이들은 경기변동이나 정책 등에 발빠르게 대응하며 단기간에 수천만원씩 챙겨 가기도 한다. 모 부동산개발회사 대표는 “실수요자가 늘 대기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움직임이 가격을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며 “배후에서 가격을 결정하는 투기세력을 반드시 뿌리뽑아야 한다”고 말했다.
작전세력·부녀회 담합도 부동산 시장 왜곡에 큰 몫
이들은 일반 아파트보다 개포동과 잠실 등지의 재건축 대상 소형 아파트를 대량 매집하거나 전매가 가능한 주상복합 아파트 분양권 등을 대거 사들인 뒤 프리미엄을 얹어 비싼 값에 판다. 일반 아파트의 경우에도 특정 단지의 매물을 집중적으로 매입하는 수법을 이용해 가격을 조정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건설사는 분양 원가를 공개하지 않으면서 폭리를 취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실제로 건설 원가는 최고급 아파트라 해도 평당 350만원 선을 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분양가는 이의 3~4배를 뛰어넘는다. 부동산 시장의 거품을 없애기 위해서는 분양 원가 공개가 필수적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인 것도 이 때문이다. 주민들이 아파트 부녀회를 중심으로 담합해 시세보다 낮은 값에 매물을 내놓는 주인을 ‘왕따’시키고, 폭언과 협박까지 서슴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상 부녀회가 아파트의 호가를 조정하는 기능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각종 언론에 부동산 시세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인터넷 부동산 정보 사이트들에게 부동산중개업자와 부녀회 등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시세 정보 조정을 요구하는 등 압력을 가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부동산 정보 사이트인 ㄷ사이트 시세팀장은 “부녀회나 부동산중개사무소 등으로부터 시세를 조정하라는 압력을 받는 게 사실이다”며 “그러나 주변 업소 탐문 등을 통해 가격의 타당성을 따지기 때문에 시세가 부당하게 평가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이들 사이트측이 밝히는 시세는 부동산중개업자가 거래를 성사시킬 수 있는 가격대와 앞으로 예상되는 가격대를 감안해 책정한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인터넷 부동산 정보 사이트 3곳에 분양가가 5억1000만원인 삼성동의 한 아파트 시세를 16억원으로 올려 은행에서 거액을 대출받은 일당이 경찰에 적발되기도 했다. 10월24일 서울경찰청 수사과는 강남지역의 미분양 빌라형 아파트를 비싸게 분양한 것처럼 꾸며 은행에서 48억원을 대출받아 이중 9억원을 챙긴 혐의로 조모씨(43)를 구속하고, 박모씨(38)와 공인중개사 이모씨(46) 등을 불구속 입건했다.
강남 불패 신화 앞에서 허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국민들은 이들 외에 부동산정책 담당자들에게까지도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지난 9월 국정감사 자료를 통해 건설교통부 과장급 이상 간부의 33%가 강남·서초·송파구에 주택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공개되자 그간 정부의 부동산대책이 미흡했던 이유를 그 탓으로 몰아세우기도 했다. 물론 이들이 강남권에 주택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지난 1년간 정부가 내놓은 양도세 강화, 세무조사 등 10여건의 부동산 시장 안정대책이 오히려 집값 상승을 부추겼다는 점에서 이들에게 쏠리는 눈길이 곱지만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강남 불패 신화를 근저에서부터 깨뜨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부동산개발업자들은 공급 부족을 해소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처방이라고 조언한다. 부동산개발회사인 토코마 김구철 사장은 “강남 부동산 시장에 거품이 많이 형성돼 있다고 하지만 실수요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상쇄하고 있다”며 “재건축 등을 통해서는 물량이 크게 늘어나기 어렵기 때문에 가구 수를 늘리거나 인근지역으로 강남의 외연을 넓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동산개발업체인 내외주건 김신조 사장도 “소득 수준이 일정 궤도에 오른 이들은 아무리 강북 뉴타운 같은 곳이 생겨나도 그보다는 강남을 선호할 것”이라며 “수급 불균형을 해소하는 본질적인 대책을 세워야 담합이니 조작이니 하는 말이 없어진다”고 말했다.
주택 가격 상승을 부추기고, 땅값 상승을 초래하는 부동산 투기는 근절돼야 한다. 그것은 결국 임금인상, 제품 단가 상승, 더 나아가 국가경쟁력 약화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원인을 투기꾼 몇 명 단속하는 수준으로 해결하려 해선 안 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강남의 한 부동산중개업자는 “투기를 조장하는 꿀단지를 근본적으로 없애지 않고 투기꾼을 파리 쫓듯이 손 내저어 쫓는 방식의 대책은 무의미하다”고 말했다.
박재열 이사는 “정부가 내놓는 대책을 보면 부동산 가격의 하락도 원치 않고, 상승도 원치 않는 것 같은데, 그런 의도라면 이번 대책은 주효했다”며 “그러나 12월 중순부터 시작되는 이사철에는 가격이 다시 상승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추가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신조 사장도 “이번 대책만으로는 지난해와 올해만큼은 아니겠지만 강남 불패 신화는 계속될 것이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