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노벨상 시상식 장면.
매년 10월이 되면 전 세계인들의 시선은 북유럽의 두 나라 스웨덴과 노르웨이를 향한다. 바로 노벨상 수상자를 발표하기 때문이다. 노벨상 가운데 물리 화학 의학 3가지 과학상은 언어적 장벽으로 인한 특정 문화권의 불이익이나 정치적 고려가 적고, 대체로 실제 업적의 중요도에 따라 수상자가 정해지기 때문에 그 권위에 도전할 만한 상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노벨 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올해 역시 선정된 7명의 과학자 중 우리나라 과학자는 한 명도 없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는 ‘역시나’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런 아쉬움을 뒤로 하고 이번 과학 분야 노벨상의 특징과 내용을 살펴보자.
이번 수상자들의 전공을 박사학위를 기준으로 나눠보면 물리학 4명, 화학 1명, 의학 2명으로 물리학상 수상자가 3명, 화학상과 생리의학상 수상자가 각각 2명씩 선정됐다. 그렇다면 이들의 전공과 수상 분야는 어떻게 연결될까?
초전도체와 초유체라는 물질의 특별한 상태를 이론적으로 설명한 업적을 인정해 주어진 물리학상을 탄 세 사람은 모두 물리학자다. 그런데 세포막에 존재하며 물질의 이동통로가 되는 채널의 구조와 기능을 밝혀 화학상을 받은 두 사람은 모두 의학박사다. 최근 가장 주목받는 진단설비인 자기공명영상(MRI) 촬영장치를 개발한 공로로 생리의학상을 받은 두 사람은 각각 물리학과 화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공지식만으론 획기적 업적 한계
이처럼 올해 노벨상 수상자들은 기존의 학문 영역 구분이 더 이상 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과학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얻는 전공지식만으로는 더 이상 획기적인 연구결과를 내놓기 어렵다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미 모든 과학 분야가 상당히 진보된 상태이기 때문에 다른 영역간 교류와 협력을 통해서만 새로운 발견이 가능한 시대가 된 것이다.
화학상 수상자 중 한 사람인 로더릭 매키넌이 이런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매키넌은 원래 생화학을 전공했지만 의학으로 진로를 바꿔 의학박사가 됐고 실제로 수년간 의사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이온 채널이란 세포막에 존재하는 단백질에 관심을 갖게 됐다.
채널이란 도넛처럼 가운데가 뚫린 단백질이다. 세포막에는 여러 종류의 채널이 있는데 이곳을 통해 각종 물질이 들어오거나 나가면서 세포의 생리활성을 조절하고, 세포들은 서로의 정보를 전달하는 통로로 이온 채널을 이용한다. 이 이온 채널의 비정상적 활동으로 인해 많은 질병이 생기는데, 이온 채널의 기능은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었으나 정확히 어떤 경로를 통해 이온이 이동하는지는 밝혀지지 않은 상태였다.
따라서 많은 과학자들이 이온 채널의 구조를 밝히려고 노력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나의 과학자로서의 경력은 서른 살에 시작됐다”는 매키넌의 말처럼 그는 단백질의 정확한 구조를 밝혀내는 수단인 ‘X선 결정법’을 이때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X선 결정법은 물리학과 화학에 대한 고도의 지식이 필요한 분야다. 그리고 그로부터 불과 수년 뒤인 1998년, 매키넌은 마침내 이온 채널의 3차원 입체구조를 밝혀냈다.
2003년 노벨상 과학 부문 수상자. ① 폴 로터버(생리의학상) ② 피터 맨스필드 (생리의학상) ③ 비탈리 긴즈버그(물리학상) ④ 앤터니 레깃(물리학상) ⑤ 알렉세이 아브리코소프(물리학상) ⑥ 로더릭 매키넌(화학상)
MRI의 원리는 물질을 이루는 기본단위인 원자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핵공명’이라는 현상을 응용해 질병을 찾아내는 것이다. 외부에서 자기장을 걸어주면 원자핵이 공명을 일으켜 신호를 내보낸다. 도대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이런 원자 속의 움직임과 이에 비하면 어마어마한 크기인 인체의 상태가 어떻게 연결될까. 인체의 70%가 물로 이루어졌고, 각 장기에 따라, 혹은 질병 유무에 따라 물의 함량이 다르다는 사실로부터 물분자의 공명신호가 인체정보를 줄 수 있을 것으로 추측한 로터버 박사는 자기장의 세기를 일정하게 변화시키면 핵공명 신호를 2차원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현재 각 병원에서 MRI를 찍어 각 층별로 단면사진으로 얻게 된 것이 바로 로터버 박사의 업적이다.
물리학상 수상자를 보면 생존자에게만 수여하는 노벨상의 진가가 잘 나타난다. 1950년대 초저온에서 물체의 전기저항이 사라지는 현상인 초전도체의 원리를 이론적으로 규명한 러시아 레베데프 물리연구소의 비탈리 긴즈버그는 현재 87세의 고령이다. 무려 50년을 기다린 끝에 노벨상을 거머쥔 것이다. 40대에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우리나라의 천재 물리학자 이휘소 박사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올해 노벨상을 수상한 세 분야의 업적은 과학적 측면뿐 아니라 실제 응용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특히 MRI의 경우 이미 진단의학의 혁명으로 여겨지고 있다. 신체 장기를 건드리지 않고도 몸 내부를 눈금 보듯이 정확하게 읽을 수 있는 이 기술은 환자와 의료인 모두에게 큰 축복이다.
국내의 경우도 도입된 지 15년이 지난 현재 500대가 발병 여부 진단에 쓰이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는 대략 2만2000대가 연간 6000만건의 검사를 수행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최근에도 MRI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해 물 함량이 1% 정도 다른 정상조직과 비정상조직의 차이를 알아낼 수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경우 물의 함량 변화가 수반되는 뇌질환이나 다른 방법으로는 원인을 찾기 어려운 통증질환의 원인을 밝히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올 수상 업적 응용면에서도 뛰어나
이와 함께 세밀한 2차원 영상을 얻으면 3차원 영상을 구성할 수 있기 때문에 몸을 열어보지 않고서도 질병 부위의 위치와 질병 진행 상황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 따라서 MRI를 통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좀더 정밀한 수술이 가능해지고, 그만큼 의료사고도 줄 전망이다.
화학상을 수상한 채널의 구조와 기능을 규명한 업적도 의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신장에서 물을 회수하는 데는 물 채널이, 근육을 움직이거나 신경신호를 전달하는 데는 이온 채널이 관여하기 때문이다. 스웨덴 노벨재단은 “많은 질병이 물 채널이나 이온 채널의 기능 저하나 이상의 결과로 발생한다”며 “이들의 연구결과는 새로운 약물을 개발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물리학상을 수상한 업적 중 하나인 초전도체 역시 응용범위가 넓다. 생리의학상을 안겨준 기기인 MRI의 핵심부품 중 하나가 바로 초전도체고, 현재 일본 야마나시현에서 시험운행되고 있는, 무려 시속 550km를 주파하는 초전도 자기부상열차도 머지않아 실용화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