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동아’는 이번 호부터 ‘김남용의 유럽 자전거 여행’을 격주로 4회에 걸쳐 연재한다. 여행작가인 김씨는 석 달 동안 유럽을 자전거로 여행하기 위해 6월27일 프랑크푸르트로 떠났다. 그는 관광객들이 거의 가지 않는 유럽 여러 나라의 시골을 돌아보며 벼룩시장과 장터에 들르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예정이다.(편집자)
신시청사 종루에서 바라본 로텐부르크 시가지. 멀리 성곽이 보인다.
자전거를 타고 유럽여행을 한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그들에게 납득할 만한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누군가 같은 질문을 한다 해도 역시 적절한 대답을 하지 못할 것 같다.
로텐부르크 시내에서 약간 떨어진 타우버 캠핑장에서 짐보라는 미국인 할아버지를 만났다. 그는 자전거 여행을 하는 이유에 대해 “그냥 할 뿐(Just Do)”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비가 오는데 자전거 여행을 계속할 수 있을까?”라고 또다시 묻자 “누군가 하고 있다(Somebodies do)”라고 답한다.
그래, 누군가 하고 있는 일이라면 나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달린다. 나는 3개월 여정으로 유럽 자전거 여행을 떠나 왔다. 앞으로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벨기에, 네덜란드, 체코 등지를 여행할 예정이다. 중간 중간 필요에 따라 기차를 타겠지만, 주요 경로는 자전거를 이용할 계획이다. 그 여정 속에서 내가 왜 자전거 여행을 시작했는지에 대한 답을 찾고 싶을 뿐이다.
로만티크 가도에서 맛본 ‘로맨틱’
뷔르츠부르크 마리엔베르크 요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정부가 관광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개발한 중세풍 도시들이 350km에 달하는 이 도로를 따라 이어져 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 길을 따라 또 420km의 자전거도로가 만들어져 있다는 점이다. 자전거도로를 따라 펼쳐지는 로만티크 가도의 풍경은 그야말로 ‘로맨틱’하다.
로만티크 가도는 뷔르츠부르크에서 시작한다. 주말에 뮌헨에서 독일인 친구를 만나기로 했기 때문에 프랑크푸르트에서 뷔르츠부르크까지 기차를 이용했다. 뷔르츠부르크는 ‘로만티크 가도의 진주’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도시다. 신상으로 장식한 알테마인 다리에서 바라보는 마리엔베르크 요새가 이곳의 랜드마크다.
자전거를 진 채 무작정 올라간 그곳에서 바라본 뷔르츠부르크는 거대한 포도밭과 중세풍의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특히 이곳은 바로크 양식의 레지덴츠 왕궁과 성 크리안 대성당 등이 유명하다.
프랑크푸르트의 캠핑장은 미리 예약해두었지만 뷔르츠부르크의 캠핑장은 물어물어 찾아가야 한다. 그런데 가르쳐주는 사람마다 그곳까지의 거리와 방향이 제각각이다. 도심에서 6km 떨어진 곳에 있다고 해서 가보면 다시 4km 돌아가라고 하고, 돌아가서 다시 물어보면 강 건너편에 있을 거라고 한다. 그래서 강을 건너면 다시 다리를 건너라고 하고, 다리를 건너오면 좌측으로, 다시 우측으로….
나는 독일인의 거리와 방향 감각이 무딘 줄로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도심에서 남쪽으로 2km 지점에는 사설 캠핑장이, 6km 지점에는 공영 캠핑장이 있다는 것이다.
마리엔베르크 요새에서 바라본 뷔르츠부르크 전경(위). 뷔르츠부르크보다 더 중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소도시 아이벨슈타트(아래 오른쪽). ‘가우반’을 완주한 후 기념사진을 찍은 필자(아래 왼쪽).
그는 매해 4월부터 10월 사이에 레스토랑 등에서 일하고 겨울철을 이용해 유럽을 여행하는데 그렇게 한 지 벌써 3년째란다. 그리고 침낭이 있어서 괜찮단다. 강적이다. 그는 내가 가져온 전지 크기의 독일 전도가 알아보기 어렵게 되어 있다며 바이에른 지방 상세도 한 장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오크젠푸르트라는 곳에 가면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환상적인 자전거도로 ‘가우반’이 있는데 그 도로를 타고 가면 로텐부르크까지 갈 수 있다고도 했다.
하지만 24km를 넘게 달려 ‘가우반’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생각을 바꾸었다. 우리나라에서 연습해보지 않은 비포장길이 나오는 게 아닌가. 정오가 되자 햇빛마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더구나 8km 정도로 예상하고 500ml물통 하나밖에 가지고 오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24km를 달리는 내내 슈퍼마켓이 한 곳도 없다.
궁하면 통하는 법. 처음 들어간 리터자우젠이란 마을에서 슈퍼마켓이 없다는 소리를 듣고 낙심한 내가 불쌍해 보였는지 한 노부부가 탄산음료 한 병을 꺼내 준다. 단숨에 한 병을 비우고 인사를 하고 떠나려는데 노부부가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냉장고에서 콜라 한 병을 다시 꺼낸다. 당케(Danke)! 그 후로는 지나치는 마을마다 들러 탄산음료나 물을 얻어마셨다.
그렇게 비포장도로의 끝에 도착하자 로텐부르크까지 다시 24km 구간의, 새로 생긴 자전거도로가 나왔다. 초반 3km 정도만 비포장길이고 나머지는 포장길이다. 타우버 강변을 따라 한적한 도로를 기분 좋게 달려가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지형이 높아지는가 싶더니 수시로 오르락내리락한다.
그렇게 거의 탈진상태에서 찾아온 로텐부르크의 캠핑장은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오비이락-라면 끓이면 비 내린다
로텐부르크 캠핑장은 프랑크푸르트 캠핑장, 뷔르츠부르크 캠핑장과 비교해보면 시설과 환경면에서 으뜸이다. 세면장과 샤워실, 화장실, 취사장 등이 모두 청결하다. 또 쌀을 팔 정도로 없는 게 없는 매점도 있다. 가격면에서도 하루에 7.5유로(약 9000원)로 프랑크푸르트보다 1.2유로나 싸다.
그래서인지 로텐부르크 캠핑장은 많은 독일인들로 붐볐다. 그들은 자가용에 캠핑카(캐러밴)를 매달거나 자전거 따위를 싣고 와서는 마치 작은 집을 짓듯이 텐트나 천막으로 자기 공간을 만든 후 작은 테이블까지 펼쳐놓는다.
나 또한 그들 속에서 모처럼 느긋한 기분으로 라면 끓일 물을 올려놓는데,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한다. 비가 오자 독일인들은 천천히, 그러나 정해진 순서에 따라 자리와 테이블을 접어 캠핑카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나는 ‘한국인’이다. 고작 이 정도 빗방울에 자리를 접을 수 없다 싶어 라면을 끓여 막 한 젓가락을 뜨는데, 아니 이게 웬 날벼락! 천둥 번개가 치더니 곧 굵은 빗방울이 텐트를 무너뜨릴 듯이 퍼붓는다.
프랑크푸르트의 벼룩시장. 필자에게 ‘가우반’의 위치를 알려준 베테랑 여행자 해리 슈스터. 타우버 여행장에서 만난 미국인 여행자 짐보. 깔끔한 시설이 마음에 드는 로텐부르크 캠핑장.(왼쪽부터)
로텐부르크의 정식 명칭은 ‘로텐부르크 오브 데어 타우버(Rothenburg ob der Tauber)’, 즉 타우버 강 위의 로텐부르크다. 이름답게 캠핑장에서 2km 정도 급한 경사를 올라가야 한다. 마르크트 광장에 있는 신시청사 옆의 종루에 오른다. 등에 진 소형 배낭조차 걸릴 정도로 좁은 계단을 다 통과하자 곧바로 좁은 전망대가 나온다. 그곳에서 보는 로텐부르크의 구시가지와 시가지를 둘러싼 중세 성곽은 왜 로텐부르크를 ‘중세의 보석’이라 하는지, 왜 내가 달려오고 달려갈 길을 ‘로만티크 가도’라 하는지 충분히 느끼게 해주었다.
로텐부르크에는 유명한 인형과 장난감 박물관, 크리스마스 박물관, 그리고 아이로니컬하게도 독일 유일의 중세 범죄박물관 등이 있다. 특히 구시청사 3층에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3시까지 매 시간마다 시계 양쪽 창에서 인형이 나와 포도주를 마시는 장면을 연출하고는 사라진다. ‘마이스터트룽크’라 불리는 이 장면은 30년 전쟁 당시 프랑스 티토 장군이 3.25ℓ의 포도주를 한 번에 마시면 로텐부르크를 파괴하지 않겠다고 하자 로텐부르크 시장이 이를 마셔 도시를 구했다는 전설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여행하며 버려야 하는 것들
여행은 버림의 연속이다. 한국을 떠날 때 자전거 뒷바퀴에 매는 전용 배낭(패니어) 한 쌍과 45ℓ짜리 중형 배낭, 그리고 33ℓ짜리 소형 배낭을 가지고 왔다. 하지만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하면서 배낭을 자전거에 싣거나 어깨에 메고 여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도시를 뒤져 앞바퀴용 패니어를 추가로 구입했다. 그리고 그날 밤, 큰 배낭을 프랑크푸르트에 버렸다.
마리엔베르크 요새를 힘겹게 오르내린 다음날, 젖은 옷가지 몇 벌을 뷔르츠부르크에 버렸다. 그리고 로텐부르크에 온 날 나는 작은 배낭 속에 자전거를 담는 큰 헝겊가방과 필름 카메라를 넣고 우체국을 찾아갔다. 비록 필름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는 ‘손맛’을 포기하지 못해 아직 결심하지 못했지만, 다른 것은 한국으로 돌려보낼 생각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는 과연 얼마나 많은 것들이 필요한 걸까? 이번 여행을 하면서 그것을 알게 될 것 같다. 하루하루 조금씩 짐을 덜면서.
여행중 가장 힘든 점은 몸에 쌓이는 피로가 아니라 ‘외로움’과 ‘그리움’이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보낸 이틀 동안 나는 풀벌레 소리에 깜짝 놀라 텐트 안을 두리번거리곤 했다. 그 울음소리가 꼭 휴대전화 진동소리 같아서 누군가 내게 전화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휴대전화도, 나를 찾아온 사람도 그 자리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