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26일 오른쪽 민주당 의원석이 비어 있는 가운데 국회 본회의에서 특검법이 통과되고 있다.
민주당은 줄곧 특검법 통과 자체에 반대해왔으나 한나라당과의 언론 비공개 막후접촉에선 법안 문안을 놓고 협의를 해왔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법안의 국회본회의 상정 직전 스스로 특검 수사기간을 축소하고, 특검법 명칭도 중립적 표현으로 완화했는데 이는 사실 민주당측 요구를 받아들인 결과라는 주장이다. 민주당은 2월26일 특검법 국회 표결 당시 집단 퇴장해 법안처리를 사실상 묵인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아왔었다.
그러나 특검법 통과 이후 민주당이 특검법 무효를 주장하고 청와대도 특검법 일부 조항 수정을 요구해오자, 한나라당은 이러한 요구를 차단하기 위해 민주당과의 협의 과정을 공개한 것으로 보인다.
수사기간 축소 명칭 변경 요구는 수용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권한대행은 3월2일 ‘주간동아’와의 인터뷰에서 “특검법이 국회에 상정되기 전 민주당 지도부 핵심 채널에서 △특검 수사기간을 줄여줄 것 △특검 명칭을 변경해 줄 것 △특검 수사내용의 비밀을 보장해줄 것 △특정인 불기소를 법조문에 명시해줄 것 등 네 가지 조항을 수정해달라고 제의해와 그중 세 가지를 받아들였다”고 밝혔다. 한나라당은 특검 수사기간을 180일에서 120일로, 특검 명칭 중 ‘대북 뒷거래 의혹’을 ‘대북 비밀송금 의혹’으로 변경한 수정안을 제출했다. 박대행은 비공개 수사 문제와 관련, “언론의 속보경쟁으로 인해 수사 도중 수사내용이 공개되는 일이 없도록 법적으로 보장했다. 이 부분도 민주당 요구가 수용된 것”이라고 말했다.
박대행은 또 “문서로 오간 것은 아니지만 민주당과 한나라당 지도부가 구두로 수차례에 걸쳐 협의, 조율했다”며 “한나라당은 민주당의 네 가지 요구 중 특정인 불기소의 법조문 명문화는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그는 “특정인이 김대중 전 대통령을 의미하느냐”는 질문에는 “밝히기 곤란하다”며 답변을 피했다. 한나라당이 민주당의 특정인 불기소 비공개 제의를 거부한 이 같은 정황에 비추어볼 때 특검 수사가 실제로 시작될 경우 김대중 전 대통령은 수사대상이 됨은 물론 기소대상에서도 예외가 되지 않을 것이 확실해졌다. 향후 파장이 예상되는 대목이다.
한나라당 관계자는 “물밑 접촉에서 한나라당이 민주당 요구를 일정 정도 수용한 데다 총리인준안 통과를 위해선 야당의 협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민주당이 특검법 통과를 강력하게 반대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그간의 과정을 설명했다.
그러나 3월 초 들어 청와대는 ‘특검법안 조항의 추가 수정’을 정치권에 요구하고 있다. 한나라당은 공개적으로는 대통령 거부권 행사에 대해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여권의 재협상 요구가 불쾌하다는 반응이다. 특검은 향후 국내외 정세에 일대 파란을 예고하고 있다. 그만큼 여권 내부의 움직임도 다급해지고 있다.
▷ 청와대-민주당 갈등설
민주당 핵심 당직자 A씨는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송경희 청와대 대변인이 일을 망치고 있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특검법 통과 다음날인 2월27일 송대변인은 대통령 주재 수석비서관 회의에 참석한 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대통령은 국회 결정을 존중할 것이다”라고 답했다. 대다수 언론은 일제히 “노대통령이 특검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보도를 접한 한나라당은 대통령 거부권 포기를 기정 사실화했다. 민주당은 크게 당혹해하며 노대통령의 진의 파악에 나섰다. A씨는 “우리가 알아본 바로는 노대통령은 거부권 행사와 관련해 아직 아무런 결심도 하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고 말했다. “송대변인이 거부권 행사 여부와 같은 중대한 사안에 대해 섬세하지 못한 발언을 해서 대통령의 의중을 언론에 잘못 전달했다”는 불만이었다. 다음날 청와대는 “대통령은 아직 결심을 하지 않았다”고 밝혀, 전날 송대변인의 브리핑을 사실상 정정했다. 청와대는 그 다음날엔 한 단계 더 나아가 특검법 일부 조항의 수정 필요성까지 언급했다. 송대변인에 대한 민주당의 불만은 “뿌리가 있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청와대 비서진 인선 이후 민주당 당직자들이 소외감을 피력하고 있는 데다 노대통령 측근들은 특검 수용을 주장하는 발언을 잇따라 내놓아 당내 신-구 주류 간에 미묘한 갈등 양상이 빚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청와대가 거부권 행사를 포기할 경우 민주당 구주류와 중도파에서 불만이 터져 나올 공산이 큰 것. 청와대는 지금 거부권 행사 혹은 포기 가능성을 모두 열어둔 채 깊은 고민에 빠져 있다.
▷ 미묘해지는 노무현-김정일 관계
특검은 본질적으로 북한의 해외 자금거래 창구에 대해 정밀조사를 할 수밖에 없다. 그 창구를 통해 북으로 돈이 건네졌기 때문이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남측으로부터 받은 돈의 규모나 성격(뇌물성인지 사업자금인지 등)도 규명된다. 무엇보다 송금된 돈이 북한정부로 들어갔는지, 김위원장의 비자금으로 들어갔는지 여부도 조사대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들 때문에 특검 수사는 김위원장으로선 매우 불쾌한 일이 될 수밖에 없다.
김위원장 입장에선 특별검사와 한국정부는 동일인이다. 특검법상 특별검사는 한국 대통령이 임명하는 직책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정부가 자신의 치부를 낱낱이 조사하고 있는 상황에서 김위원장이 한국정부와의 대화에 선뜻 응할 것인지에 대해 불투명한 전망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특검 수사시기(2003년 4월초∼7월말)는 한반도 북핵 위기가 가장 고조되는 시점과 겹쳐질 가능성이 높다. 4월10일은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가 국제법적 실효성을 얻게 되는 시점이며, 영변 핵 시설의 폐연료봉이 재처리된다면 그 시기는 올 봄 예정된 미국의 대(對)이라크전쟁 개전에 맞춰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는 이 기간 동안 미국과 북한을 모두 설득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같은 시기 특검이 실시될 경우 한국정부 말이 김위원장에게 제대로 먹혀들겠느냐는 것이 여권의 우려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은 “대북 관계의 투명성을 높이고 한미동맹과 러시아, 중국, 일본 등 국제사회와의 공조를 굳건히 하는 것이 전쟁을 막고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도록 하는 데 더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박대행은 “특검은 국내 실정법 위반 부분을 수사하고 비공개가 보장되는 만큼 특검과 북핵을 연계하는 주장은 근거 없다”고 일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