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불효자는 웁니다’ 등 대중극들의 장면.
지난 연말부터 공연되기 시작한 각종 ‘악극’들의 제목이다. 대학로에 즐비한 소극장들은 썰렁하다 못해 춥기까지 한데 이 같은 악극들의 인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정도다.
특히 지난 연말부터 불어닥친 악극 열풍은 유별난 데가 있다. ‘봄날은 간다’를 공연한 극단 ‘가교’에 따르면 2001년까지 60% 선이던 악극의 객석점유율이 올해 90%를 넘어섰다. 이 같은 인기 때문에 일단 2월 중순에 막을 내린 ‘아씨’와 ‘봄날은 간다’는 각각 5월과 6월에 앙코르 공연을 할 예정이다.
악극은 전형적인 신파극이다. 구성지게 흐르는 오래된 가락들, 과장되어 뻣뻣하게까지 보이는 배우들의 연기, 분장 역시 너무 진해 우스꽝스럽다. 시어머니에게 구박받는 며느리, 기생과 대학생의 슬픈 사랑 등이 신파극의 단골 줄거리다.
3월1일부터 31일까지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공연되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도 이 같은 신파극의 범주에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에 속고…’를 공연하는 이윤택 연희단거리패 대표는 ‘신파극 대신 대중극이라고 불러달라’고 주문했다.
“신파(新派)라는 말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연극에 유입된 서구의 ‘가정비극’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가정비극은 후기 낭만주의의 연극이죠. 따라서 우리는 지금까지 ‘신파극’이라고 불러왔던 장르를 근대극, 또는 근대 대중극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주의 경향의 연극인 신극이 지식인을 대상으로 한 문학적인 연극 장르라면, 대중극은 철저히 대중 위주의 연극이죠.”
관객 대부분 50대 이상 ‘향수 자극’
이대표는 방송국들이 주최하는 최근의 악극에 대해 비판적이다. 너나 할 것 없이 과거의 악극을 엉성하게 흉내내는 데에 그치고 있다는 것. “물론 관객들은 즐거워하지만 문제는 그 관객들이 모두 50대 이상이라는 점입니다. 젊은 세대부터 노년층까지, 그야말로 모든 ‘대중’이 함께 볼 수 있는 작품이 필요합니다.”
‘대중극의 모델로 내세우고 싶다’는 이대표의 말대로 ‘사랑에 속고…’는 과거 대중극의 스타일을 정교하게 복원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연극 외에도 바이올린과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악사와 ‘막잡이’라고 불렸던 광대, 캉캉춤 댄서들이 등장해 흥을 돋운다. 여기에 더해 “홍도야! 네가 사람을 죽이고 오빠의 오랏줄에 묶여 가다니,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더란 말이냐!” 하고 감정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로 읊조리는 변사까지 등장한다.
막과 막 사이에 등장하는 막간극과 막간가수는 대중극의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사랑에 속고…’에서 막간가수로 출연한 원희옥은 일찍이 백조가극단에서 노래했던 ‘진짜 막간가수’ 출신. 칠순이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옛 노래 ‘외로운 가로등’을 구성지게 부른다. 이 같은 막간 볼거리와 연극이 합쳐져 그야말로 ‘버라이어티 쇼’를 이룬다.
1995년에 ‘사랑에 속고…’를 처음 공연했던 이윤택은 당시 악극단 배우들의 육성이 담긴 자료 테이프를 들어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관객을 휘어잡는 방법이며 또렷한 발성 등이 감탄할 수준이었다는 것. 그는 과거 동양극장 시절 배우들의 연기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을 만큼 탁월했다고 말한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무대에 선 이윤택 연희단거리패 대표.
연극 관계자들도 악극 인기로 대표되는 대중극의 부활 경향을 대체로 인정하는 편이다. 연극평론가인 김미도 교수(서울산업대 문예창작학과)는 “악극이 우리 정서에 맞는 것은 사실이다. 개인적으로도 악극의 인기를 긍정적으로 본다”고 말했다.
“대중극은 어느 나라에서나 정통극보다 더 큰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다만 현재의 가장 큰 문제는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지 못하고 과거 작품만을 되풀이해 공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방송국들이 매년 연말마다 악극을 제작하고 있는데 좀더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한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악극에서 트로트 류의 노래만 부르지 말고 조용필이나 양희은의 가요도 부르는 식으로 말이죠.”
반면 국민대 이혜경 교수(연극영화과)는 “악극이나 대중극의 내용은 젊은 세대에게 맞지 않는다”며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대중극을 보면서 울고 웃으려면 요즘 관객들의 정서에 맞아야 하는데 최근의 대중극은 너나 할 것 없이 30년대 관객의 정서에 맞추어진 작품이라는 것.
“‘사랑에 속고…’만 해도 여자의 행복은 남편에 의해 좌우되고, 여자가 여자를 괴롭히는 전형적인 구세대의 가치관을 담고 있죠. 과거의 청중들은 이런 내용을 보고 공감해 울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오늘의 젊은 세대들이 이런 연극을 보고 울 수 있을까요? 새로운 작품을 창작한다 해도 대중극의 형식은 30년대 수준이기 때문에 내용과 형식이 들어맞지 않을 겁니다.”
대중이 열화 같은 호응을 보낸다는 점에서 볼 때 대중극은 분명 성공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그 성공이 ‘장년층의 향수 자극’에 머물러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사랑에 속고…’의 최종 리허설이 진행되던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예술의전당을 청소하는 중년의 아주머니들이 객석 한구석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리허설을 구경하고 있다.
한창 리허설에 몰두하던 이윤택이 그 아주머니들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저기 아주머니들 좀 보세요. 이거 분명 대박이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