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동의 서울시민안전체험관 1층 로비에서 체험자들이 체험학습에 들어가기 전에 이론교육을 받고 있다.
전동차가 들어오면 빈자리 찾아 앉기에 바빴던 사람들이 이제는 슬쩍 출입문 의자 아래 수동개폐기에 시선을 둔다. 이어 객차 벽에 붙어 있는 작동법을 읽는다. 6호선과 3호선을 이용해 상수에서 양재까지 출근한다는 박진희씨(29)는 “안내문을 처음 읽었다”며 “비상시 승무원의 안내에 따라 문을 열라고 되어 있는데 대구 지하철 사고 때 승무원들은 어디에 있었냐”고 꼬집는다. 지하철 참사가 남긴 가장 큰 교훈은, 생명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사실이다.
몸에 밴 안전의식
구조물 안전진단 전문가인 나경준 사장(45·한국진단보강)이 꼬마전구가 달려 있어 불이 켜지는 열쇠고리를 보여준다. 어둠 속에서 글씨를 읽고 길을 찾아나갈 정도의 밝기다. 그의 자동차 안에는 작은 망치와 소화기, 목검이 들어 있다. 망치는 물속에 빠졌거나 자동차 문이 찌그러져 열리지 않을 때 유용하다. 나사장은 “사고 발생 자체를 완벽하게 막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은 위기대처능력을 키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용인대 김태환 교수는 낯선 건물에 들어서면 습관적으로 비상구 위치부터 확인한다. 창문의 크기와 여닫는 방법, 주위 건물도 파악해둔다.
“안전의식은 습관이다. 어릴 때부터 교육과 훈련을 통해 철저히 익히지 않으면 막상 위기상황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대구 지하철 사고에서 노약자와 부녀자, 어린이들의 희생이 컸다. 남자들은 군대나 민방위 훈련을 통해 대피훈련이라도 받지만 여자들은 기회조차 없는 게 문제다.” 김교수의 말이다.
전동차 내부시설을 모두 내연재로 바꾸거나 기관사를 2명씩 배치하려면 많은 비용이 드는 만큼 시간도 오래 걸린다. 그러나 안전교육은 적은 비용으로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번 참사를 겪은 뒤 “평소 ‘전동차 어디쯤 소화기가 있다, 사용법은 이렇다’라고 몇 차례 안내방송만 했어도 손 놓고 죽음을 기다리진 않았을 것”이라고 개탄하는 이도 있다. 또 119화재신고를 접수하면서 “네, 갑니다”만 반복할 게 아니라 상황과 위치를 물은 뒤, 질식한 사람들이 쓰러지기 전에 전동차 문을 열도록 지시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
체험자들이 소화기 사용 후 소화기 안전핀을 고정하고 있다. 죽는 사람도 살린다는 심폐소생술 실습 모습. 풍수해 체험실에서 체험자들이 1초당 12m의 비바람을 맞고 있다.3월6일 정식 개관을 앞둔 서울시민안전체험관(위부터).
1층은 지진과 풍수해 같은 자연재해 체험 코너로 꾸며져 있고 2층에서 화재시 소화기 사용법과 피난, 긴급구조 방법 등을 배운다. 먼저 일반 가정의 부엌 형태로 꾸며놓은 지진체험관. 4인1조로 직접 들어가서 식탁에서 식사를 하는 도중 지진이 난 상황을 체험한다. 강도 7도의 지진. 찬장의 그릇이 떨어지고 벽이 흔들린다. 뭔가를 붙잡지 않으면 몸을 지탱하기 어렵다. 교관은 가스불을 끄고 밸브를 잠근 뒤 전원을 차단하라고 말한다. 또 문이 뒤틀리면 열리지 않아 탈출하기 어려울 수도 있으므로 열린 문에 의자를 대놓으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체험자들은 교관이 아무리 “의자, 의자!” 외쳐도 식탁 밑으로 숨기 바쁘다.
연기 피난과 긴급구조 체험은 한층 진지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화재로 유독가스가 발생하고 어둠 속에서 탈출하는 상황이 대구 지하철 사고와 유사했기 때문이다. 조명이 꺼진 실내에 매캐한(그러나 무해한) 연기가 퍼지면 차례로 탈출을 시도한다. 체험에 앞서 교관이 탈출요령을 가르쳐준다. 연기는 위로 올라가므로 자세를 낮추고 물에 적신 수건으로 코와 입을 가린다. 수건이 없을 때는 종이로라도 가리는 것이 좋고, 호흡은 짧고 얕게 해서 유독가스가 폐 깊숙이 들어가지 않도록 한다. 천장이 낮은 미로 속을 기어가다 어두운 복도가 나오고 벽체가 떨어지거나 바닥이 흔들릴 때 짧은 비명이 새 나온다. 복도 끝에 다다르자 두 개의 문이 나온다. 이때 손잡이를 만져 뜨거운 쪽 문은 절대 열지 않는다. 문을 여는 순간 불길이 역류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에 질식해 쓰러져 있는 아이 모형이 보인다. 교관은 고층건물 화재시 엘리베이터는 굴뚝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절대 사용하지 말라고 지시한다.
소화기 체험관에서는 소화분말 대신 물이 든 소화기를 가지고 사용법을 배운다. 김영석 주임은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해보는 게 낫다”며 “대구에서는 전동차에 비치된 소화기를 사용해보지도 못했다”며 안타까워했다.
서울시는 삼풍백화점 붕괴, 화성 씨랜드 화재 등 잇따른 대형참사 때마다 인명피해가 커지는 원인이 안전대처능력 부족에 있다고 판단, 90년대 중반부터 안전체험관 건립을 추진해왔다. 그러나 97년 IMF 위기로 중단되는 바람에 2003년에야 개관할 수 있었다. 능동 안전체험관은 일본 도쿄의 혼조 방재관을 모델로 삼았는데, 일본에는 교육장으로 활용되는 방재체험관이 160여개에 이른다.
경찰청도 교통안전체험관 건립을 추진중이다. 기존 교통공원이 야외 시설물이어서 계절적 한계가 있고, 자동차는 위험하니 피해야 한다는 식으로만 가르쳐 체험이 부족하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아이들이 미니카를 직접 운전하면서 표지판 보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체험 중심의 교육관을 마련할 계획. 2002년 한 해 8000억원이나 걷힌 교통범칙금 중 일부가 교통안전체험관 건립에 사용된다. 제주도에서도 자동차, 비행기, 선박 등 교통안전 체험 중심의 안전공원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 이처럼 안전문제는 주입식 이론교육 대신 반복적인 체험학습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데 이견이 없다. 이와 함께 교육인적자원부는 사회·도덕 교과서에 재해, 재난에 관한 정보를 싣고, 교사 교육도 강화한다는 방침을 세워놓고 있다.
“지금부터 제3○○차 민방위 훈련을 시작하겠습니다. 가상 적기의 출현을 알리는 공습경보 발령과 함께 시민 여러분은….” 대구 지하철 참사 이후 안보 위주의 민방위 훈련이 도마에 올랐다. 한 중학교 교사는 “1년에 한두 번 사이렌이 울리면 복도에 나갔다가 교실로 돌아오는 식의 훈련을 아직도 되풀이하고 있다”며 “학교에는 대피할 장소도 없는데 형식적인 훈련만 하다 보니 정작 위기에 대한 의식이 없다”고 전한다.
몇 년 전부터 생활 주변의 안전사고에 대처하는 ‘생활민방위’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되었고 이미 행정자치부(이하 행자부)가 현행 민방위제도와 운영 전반에 대한 재편작업에 착수한 상태다.
행자부는 지난해 11월 생활민방위 시범마을 163곳을 지정했으며 올해 지도자 교육이 끝나는 대로 재해·재난 발생 가능성(산사태, 산불, 댐, 저수지 주변, 상습 침수지, 하천변)에 따라 장비 지급과 훈련 내용을 달리할 방침이다. 즉 산불의 위험이 많은 마을에는 무전기와 같은 기본 장비 외에 등짐펌프, 자가발전기, 진화복, 기계톱 등 특수장비를 제공하고 산불대처훈련을 집중적으로 실시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 올해 60여억원의 예산이 책정돼 있다. 하지만 대구 지하철 참사로 인해 이번 일도 결국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셈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