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맥주를 잔에 잘 담는 것도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이들은 음흉하지 않고 잔재주를 부리는 일도 없다. 기분이 나면 어디서나 합창을 하고, 토론하다가 싸우고, 그러다 또 퍼브(pub)에서 술을 마시며 웃고 떠들고…. 다음 날 아침,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일터로 향한다.
아일랜드인의 사랑방인 퍼브는 아일랜드 문학이 꽃피고 그들만의 문화가 생성돼온 장소다. 제2의 가정이라 불릴 만큼 아일랜드인이 많은 시간을 보내는 퍼브. 이곳은 사교장이자 토론장이며 때론 가족모임 장소이기도 했다.
원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거나 유치해 보이는 그림을 정성껏 그려놓은 가게문을 열고 퍼브 안으로 들어서면 어슴푸레한 조명 속에 100년은 됐음직한 침침한 색조의 벽지가 눈에 들어온다. 팔꿈치가 서로 닿을 만큼 가득 차 있는 손님들은 삼삼오오 서서 웃고 떠들며 술을 마신다. 이런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눈에 들어오는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이들이 마시는 술, 기네스다.
240년 역사의 대표적 흑맥주
맥주통을 이용한 실내장식으로 퍼브 안의 분위기를 한껏 살렸다.
흑맥주의 대표격인 기네스(알코올 함량 5.6%)는 정통 아일랜드 흑맥주로 크림 같은 거품과 검은색의 불투명함이 특징이다. 구수한 향이 입 안에 오래 남으며 거품 또한 고소하여 거품째 함께 마시면 더욱 깊은 맛을 즐길 수 있다. 기네스는 주로 추운 지방, 특히 북부 유럽에서 즐겨 마신다. 칼로리가 높아 겨울에 마시기 좋기 때문이다. 비가 오는 스산한 날이 많은 아일랜드에서 라거류의 시원한 맥주보다 진하고 걸쭉한 맛의 몸을 데워주는 기네스가 인기 있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아일랜드의 전설, 기네스 맥주의 아버지는 아서 기네스. 18세기 무렵 맥주를 만들던 그는 맥아를 불 위에 올려놓고 깜빡 잠이 들었다가 정신을 차려 부랴부랴 불에서 내려놓고 보니 그윽한 초콜릿 향을 풍기고 흑단처럼 검은빛을 띠는 게 오히려 좋아 보였다. 이것을 이용해 그는 지금의 아일랜드 스타우트 맥주, 즉 기네스 맥주를 만들어내게 되었다.
기네스 맥주가 다른 여러 종류의 맥주와 달리 ‘액체 빵’의 근원이라는 평을 받는 까닭은 칼로리가 높고 맛이 진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일랜드는 극심한 기근에 시달릴 때 배고픈 민중에게 ‘영양가 높은 액체 빵’, 즉 기네스를 줬었다.
사실 맥주의 역사는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 역사가에 따르면 이집트인이 맥주를 처음 만들었다고 하는데, 문명의 신 오시리스가 파라오의 아들에게 맥주를 선물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의 맥주 제조법은 보리나 밀의 싹을 틔워 혼합하거나 각각 발효시켜 빵으로 만든 후 그것에 물을 붓고 발효시키는 것이었다. 발효시킨 빵에 다시 물을 부어 발효시킨 뒤 반죽하여 항아리 위에 얹어놓은 다음 걸러지는 액체를 먹었는데, 이것을 ‘액체 빵’이라고 불렀다. 말하자면 인류 최초의 맥주는 영양가 높은 걸쭉한 강장 음료였던 셈이다. 그리고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법전인 함무라비 법전에도 맥주 제조법이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맥주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 기네스 맥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브랜드다.<br>▲기네스 맥주 공장에서 예전에 사용했던 맥주 저장통.<br>▶ 거품으로 아일랜드의 상징인 네 잎 클로버를 만들어 내놓은 기네스 맥주.
이런 연금술사의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아일랜드에서는 기네스 맥주 생산 과정을 관광 코스로 개발해두었다. 견학 코스에서는 공장 시설 견학과 함께 상점에서 기네스 캐릭터 상품을 살 수 있으며, 공장에 딸려 있는 퍼브에서 갓 나온 기네스도 맛볼 수 있다. 기네스 캐릭터 상품들로 장식된 퍼브에서는 맥주 한 잔을 줄 때마다 거품을 이용해 아일랜드의 상징인 네 잎 클로버를 만들어주는데, 모양이 너무 예뻐 홀짝 마셔버리기 아까울 정도다.
아일랜드인은 겉으로는 차가워 보이지만 따뜻하고, 발끈하는 성격이어서 흥분도 잘 한다. 그러나 옳다고 믿는 일에서는 물러서지 않는 사람들이다. 어쩌면 퍼브 문화와 기네스가 그들의 고단한 삶을 위로해주는 유일한 즐거움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