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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惡으로 더 큰 惡을 이기면 미덕일까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입력2002-10-07 10: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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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惡으로 더 큰  惡을 이기면 미덕일까
    지난해 9·11 테러 이후 쏟아진 미국 관련 책들의 상당수는 ‘미국 다시 보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즉 슈퍼파워 미국의 패권주의를 견제하려는 비판적 지식인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존 쿨리의 ‘추악한 전쟁’, 노암 촘스키의 ‘불량국가’, 에드워드 사이드의 ‘도전받는 오리엔탈리즘’ 등이 미국 중심적 세계관을 교정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저널리스트인 로버트 D. 카플란이 쓴 ‘승자학(勝者學·원제 Warrior Politics)’은 정반대의 논리를 편다. 카플란의 주장은 “자기 희생을 내건 기독교 윤리는 위선에 불과하며 지도자는 자기 보존 본능을 추구하는 이교도의 윤리를 따라야 한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이 대목에서 그는 마키아벨리를 인용한다. “기독교가 복종적인 사람들을 실제 이상으로 미화했기 때문에 결국 사악한 사람들이 세상을 지배하도록 허용했다.” 지금은 그런 도덕적 위선 대신 “쳐들어가서 저들의 뼈를 부숴버려라”고 명령했던 라빈(이스라엘 국방장관으로 1987년 가자 지구에서 일어난 아랍인들의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의 현실 전략이 필요한 때라고 말한다.

    ‘애틀란틱 먼슬리’의 특파원으로 전 세계 분쟁지역을 취재한 카플란은 비관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다. 보라,미국을 한발자국만 벗어나면 곧바로 호전적이고 무질서한 세계가 펼쳐진다. 서부 아프리카의 살인적인 10대 군인들, 러시아와 알바니아의 마피아들, 라틴아메리카의 마약상, 이스라엘 웨스트뱅크의 자살폭탄병, 전자우편으로 연락하는 오사마 빈 라덴의 추종자들. 전쟁이라는 야만적인 즐거움을 쫓아다니는 이 전사들이 제2의 히틀러가 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더욱 무서운 일은 휴대전화와 폭발물 한 자루만 있다면 누구나 ‘권력자’가 될 수 있는 현실이다. 9·11 테러로도 입증됐듯이 이미 악의 세력은 미국의 안방을 위협하고 있다.(참고로 이 책은 9·11 테러 이전에 씌어졌다)

    저자는 군사적 우위나 외교, 공정한 게임의 규칙 따위로는 더 이상 악을 제어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인 이상, 불완전한 세상에 살면서 착한 척하기보다는 차라리 악한 행동으로 더 큰 악을 물리치는 쪽이 미덕이라고 주장한다.



    ‘승자학’의 시각에서 보면 공산주의를 포용하고 평화를 지키려 했던 카터보다 공산주의에 대한 강경책을 고수한 레이건과 대처가, 테러를 묵인한 클린턴보다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는 부시가 훨씬 도덕적이고 현실적인 지도자다. 나아가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리바이어던이 될 것을 요구한다. 세계 여러 국가들을 지배할 리바이어던이 존재하지 않는 한, 국제정치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권력투쟁은 계속될 수밖에 없고 세계시민사회는 요원해진다.

    이 책은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을 비롯해 뉴트 깅리치 공화당 의원,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로버트 맥팔레인 레이건 전 대통령 안보보좌관 등의 찬사를 받았다. 실제 전 세계를 긴장시켰던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도 “악의 무리와의 전쟁은 시민들의 희생을 감수하고 치러야 하는 도덕적 사명”이라고 한 카플란의 세계관에서 비롯됐다고 할 만큼, 미국 우파들에게 끼친 이 책의 영향력은 대단했다.(이 책을 놓고 부시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토론회를 열었다고 한다)

    카플란의 위험하리만치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노선을 따라가다 보면 지구 환경을 지키기 위한 전 세계적 합의인 교토의정서 파기, 소련과 체결한 요격미사일 제한협정 탈퇴, 북한과 이란 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몰아가기, 아프간 침공, 노골적인 이라크 공격 준비 등 국제무대에서 미국이 취해온 일련의 강경책이 어떤 맥락에서 결정된 것인지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냉혹한 국제정치의 현실에서 카플란이 던진 화두는 우리의 생존전략을 돌아보게 만든다. 국가의 본질에는 선악이 없다. 폭력은 미덕의 중요한 일부. 힘이 없는 가치는 쓸모없다. 본능과 이기심이 선(善)이다.

    승자학/ 로버트 D. 카플란 지음/ 이재규 옮김/ 300쪽/ 1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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