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5일 전교조 주최로 열린 ‘초등 3학년 전집형 평가 중단 촉구 기자회견’. 전교조는 10월3일 전국 교사대회와 시험업무 거부 등 강경 저지를 선언했다.
이번만큼은 교육감들도 교사들과 뜻을 같이했다. 9월24일 전국 16개 시·도 교육감들이 모여 “시행 방법과 진단평가 결과 활용은 시·도 교육청에 위임하라”고 교육부에 건의했다. 여기에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서울지역학교운영위원협의회,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 등 학부모단체와 시민단체 등도 한목소리로 전집평가 반대를 주장하고 나섰다.
한편 이상주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은 25일 직접 기자간담회를 열고 “기초학력이 모자라는 학생을 조기에 발견해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지도하기 위한 교육적 배려 차원으로 교사들이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다”며 10월15일 전국 초3 학생 70만명을 대상으로 평가를 강행할 의사를 분명히 했다.
현재 ‘초3 기초학력진단평가’를 둘러싼 논란은, “국가 수준의 평가란 학교와 학생, 교원의 경쟁과 서열화를 가져오는 시대착오적 발상”이라고 반대하는 교사들과 일부 시민단체, 각 시·도 교육청과 “기초학력 국가책임제하에서 전집평가는 불가피하다”고 주장하는 교육부가 팽팽히 맞선 상태다.
논쟁의 핵심은 평가대상을 전국의 모든 초등학교(전집)로 하느냐 일부 학생(표집)으로 하느냐에 있다. 반대론자들은 이 평가의 목적이 교육부가 밝힌 대로 학습부진아 판별과 지원정책 마련에 있다면 1% 수준의 표집형 평가로도 충분하다는 입장. 이에 대해 이부총리는 “신체검사를 하는데 누구는 하고 누구는 안 할 수 있나. 표집만으로는 개개인의 능력을 파악할 수 없다. 각자 아픈 정도를 알아야 치료도 할 것 아닌가”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반대론자들은 ‘부진아 판별’을 위한 전집평가라면 더더욱 예산낭비라고 지적한다. 정부는 1996년 11월 ‘학습부진아 지도대책’을 발표하고 막대한 예산을 들여 단위학교 차원에서 부진아 판별과 지도를 해왔기 때문이다.
교육청은 양쪽 사이에서 어정쩡
이번 평가가 교육개혁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전국단위평가는 어쩔 수 없이 단답형 지필고사가 될 수밖에 없는데, 이는 어렵게 자리잡아가는 수행평가(학업의 성취도를 결과로만 판별하지 않고 학급목표에 도달해가는 과정을 관찰하고 성취 수준을 판별하는 평가) 중심의 현 교육과정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교사들은 “생활기록부와 통지표상의 서열화가 사라지면서 아이들이 각종 시험으로부터 해방됐는데 다시 획일적 일제고사 시대로 돌아가겠다는 것이냐”며 우려를 표시했다.
하지만 현단계에서 ‘전집평가 반대’의 한목소리도 미묘한 입장차를 보인다. 교육청은 원칙적으로 교원단체 입장을 지지하면서도 “상급기관인 교육부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다”며 한발 뺀 상태.
시·도 교육감들의 이런 ‘어정쩡한’ 입장은 한편으로는 교육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기초학력진단평가’가 실시될 경우 시험문제 인쇄와 평가관리 등 실질적인 업무와 비용까지 시·도교육청이 도맡아야 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평가 강행이냐 저지냐를 놓고 양측의 여론전이 뜨거워질수록 일선 학교와 학부모들은 평가 준비를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어 갈팡질팡하고 있다. 3학년 자녀를 둔 한 학부모는 “처음에는 교육부 말대로 이번 평가가 기초학력을 진단하는 수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 아이는 시험 보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 그러나 다른 아이들이 학원을 다니며 준비하고 있다는 언론보도를 접하고 불안해졌다. 오늘이라도 당장 문제집을 사러 갈 생각”이라고 했다.
미동초등학교 3학년 교실. 교사들은 학교 교육과정과 이번 평가의 내용이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부 학교들이 본격적으로 평가 준비에 나서고 그 여파가 인근 학교로 이어지면서 애초의 ‘기초학력진단’이라는 의미보다 학교간 경쟁 쪽으로 변질되고 있다. 학교마다 기초학력 진단평가 준비를 당부하는 가정통신문을 돌리고 일일쪽지시험을 치르거나 월말고사 기말고사 등 지필고사 횟수를 늘리고 있으며, 각종 경시대회 참가 및 특정 문제집 구매 권유, 학교 차원의 문제풀이 연습 실시 등 과열 양상이 뚜렷하다.
그러나 활동 중심의 학교 교육과정에서 단답형 평가를 대비하는 것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학부모들은 학원과 학습지로 몰리고 있다. 현재 시중에서 팔리고 있는 기초학력평가 대비 예상 문제집은 5~6종. 버젓이 ‘교육평가원이 출제한 방향과 일치하는 기초학력 진단평가’라는 광고 문구를 내걸고 ‘예상문제 5회, 모의고사 2회 OMR카드를 제공한다’는 등 하며 답답한 학부모들을 유혹한다.
일부 발 빠른 학원들은 일찌감치 6월부터 ‘평가대비반’에 관한 전단지를 뿌리고 학생들을 모집해왔다. 초3, 중2 남매를 둔 한 학부모는 “초등학교 때부터 수영, 태권도, 영어, 수학, 과학, 심지어 노는 법까지 따로 배우는 아이들에게 평가 대비 과외까지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그러나 시험은 문제를 많이 풀어볼수록 유리한 게 사실”이라며 “앞으로 전 학년으로 평가가 확대된다면 계속 보낼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학습지·학원 때아닌 학력평가 특수
9월 한 인터넷 학습지 회사에서 전 학년을 대상으로 기초학력 진단평가를 무료로 실시하자 2주 만에 4300여명이 참가하는 등 열기가 뜨겁다. 학습지 회사 마케팅담당자는 “무료제공이기도 하지만 부모들은 내 아이가 전국에서 몇 % 안에 드는지를 알고 싶어한다. 10월 평균점수와 전체 석차를 공개할 방침”이라고 했다. 이처럼 이번 평가로 인해 학습지 의존도가 다시 높아지면서 연간 3조원에 달하는 초등학교 학습지 시장(참고로 유아 8000억원, 대입수능 800억원)의 배만 불리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잇따른다.
전교조 서울지부 김학한 정책실장은 “교육부는 지역별, 학교별 성적을 발표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평가 결과가 나오면 그것을 토대로 시·도 교육청 평가로 다시 시·군·구 교육청 평가, 학교평가, 교장평가, 교사평가로 이어질 게 뻔하다. 교사들은 어쩔 수 없이 학생들의 수월성 경쟁을 부추기게 된다”고 했다.
‘초3 기초학력 진단평가’를 둘러싼 논란은 우리 교육계 안에 만연한 ‘불신’의 문제를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교육부총리가 “평가를 반대하는 것은 교육자의 본분을 저버리는 행위”라며 교사들을 정면으로 비난하고 나선 데다, 교육부가 평가 결과를 점수화·서열화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교사들은 믿기 어렵다는 태도다. 학부모들은 “점수나 등수가 기록되지 않는 통지표로 아이의 학력을 가늠하기 어렵다. 교사들이 부모에게 듣기 좋은 말만 써준다”며 사교육에 의지한다. 지역 교육청들은 교육부가 말로는 교육자치를 강조하면서도 결국 하급기관과 단위 학교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이번 평가를 강행하고 있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한 지역교육청의 장학사는 “이제 교육부가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교사나 학부모들이 믿지 않는다. 평가의 취지가 아무리 좋다 해도 교육 주체들이 공감하지 못한 상태라면 교육부가 너무 서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경력 15년의 한 초등교사는 “솔직히 초등학생들의 학력 결손은 심각한 수준이다. 그러나 교사가 부진아를 판별하지 못해서 생긴 문제가 아니라 알고도 어쩔 수 없기 때문에 생긴 문제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도 바쁜 학부모들이 이번 시험 결과를 놓고 새삼 아이들의 공부에 관심을 가질까. 결국 지역간, 빈부간 학력 격차만 확인하는 평가가 될 것”이라고 씁쓸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