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앞 들판에서 막내 보천이와 이야기하고 있는 최승은씨. 최씨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학원 대신 집 근처에서 마음껏 논다.
최씨의 집은 경기 용인 명지대 캠퍼스 안에 있다. 남편인 명지대 김정명 교수(사회체육)와 함께 8년 전 겨울 이곳에 목조주택을 지었다. 경치 좋고 공기는 맑지만 몇 가구의 이웃을 제외하면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 땅벌떼와 뱀이 예사로 나타나고 밤이면 가로등도 켜지지 않아 칠흑처럼 깜깜하다. 최씨 부부는 이곳에서 중학교 3학년, 2학년인 보광, 보희, 그리고 막내 보천이와 함께 산다. 학원 하나 없는 외딴 동네에 살면 아이들 교육에 지장이 있지 않을까? 그러나 최씨는 이곳에 들어온 가장 큰 이유가 아이들 교육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거창하게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한다기보다는 아이들이 건강한 마음과 몸으로 자랄 수 있게 해주고 싶었어요. 아이들이 나중에 어른이 된 후에도 어린 시절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을 가지고 살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부모가 줄 수 있는 큰 선물일 것 같아서요.”
경치 좋은 외딴 동네 8년 전 이사와
아버지인 김정명 교수와 막내 보천이, 장남 보광이
그런데 이런 생활 속에서도 장남인 보광이는 올해 민족사관고 국제반에 합격했다. 미국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는 민사고 국제반은 토플 620점, 내신 상위 3% 이상(서울 및 신도시는 5%, 읍 단위는 1%)인 우수한 학생들에게만 응시 자격이 주어진다. 그 밖에 영어 에세이 시험과 수학 심층면접도 봐야 한다. 보광이는 지난 겨울 처음으로 두 달간 토플 학원을 다닌 뒤 토플 667점(CBT 290)을 받아 민사고에 합격했다.
보광이가 ‘민사고에 가고 싶다’고 말한 것은 중학교 2학년 2학기 때다. “아이 아빠와 저는 ‘네가 하고 싶으면 해라’고만 했어요. 사실 저희는 분당이나 강남 등의 학원에 보내줄 여건이 못 되는데다 보광이가 6학년 때 막내 보천이가 태어나 큰 아이들에게 거의 신경을 쓸 수가 없었어요. 아이들이 집에 오면 빨래 널어라, 아기 봐라 하고 심부름 시키기에 바빴죠.”
보광이는 혼자서 영어 에세이를 써 보고 대학 도서관에 다니며 시험 준비를 했다. 부모는 이런 아이를 곁에서 지켜볼 뿐, 가끔 컴퓨터 채팅이나 게임에 빠져서 밤을 새도, 가요를 듣느라 이어폰을 귀에 꽂고 살아도 별다른 잔소리 없이 놔두었다.
물론 심각한 위기도 없지 않았다. 소위 ‘사춘기’가 온 것이다. 학교 갈 때마다 늘 엄마에게 다정하게 뽀뽀하고 가던 아이가 성난 얼굴로 문을 쾅 닫고 나갈 때는 최씨도 가슴을 졸였다. 그러나 아버지인 김교수는 “아이를 믿고 놔두자. 우리도 저만 할 때 그랬다”며 아이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다. 결국 아이는 사춘기를 무사히 넘기고 평상으로 되돌아왔다.
최씨는 “부모는 아이들을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믿음은 무조건적인 믿음이 아니라 부모와 아이가 함께 공유하는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 “아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슨 문제가 있는지 말하지 않아도 부모가 느낄 수 있어야 해요. ‘아, 아이에게 지금 엄마가 필요하구나’ 하고 감지할 수 있어야죠. 그러기 위해서는 엄마와 아이가 함께 있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를 바로 다시 학원에 보내버리면 엄마는 아이를 관찰할 시간이 없죠.”
최씨가 고마워하는 것은 아이들이 공부 잘하는 것보다도 착하고 감성적인 청소년으로 커주었다는 점이다. “어느 날 저녁에 항상 하던 산책을 하는데 보광이가 불쑥 이런 말을 했어요. ‘엄마, 내가 나중에 커서 힘든 일이 생기면 어렸을 때 엄마랑 우리집에서 산책하면서 별 보던 생각을 할 거야. 그러면 어떤 어려운 일도 다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때 아이가 너무 믿음직스러웠어요.”
보광이의 동생 보희도 과천외고에서 열린 영어 말하기 대회에서 은상을 수상할 정도로 영어 실력이 탁월하다. 학원도 안 다니는 최씨의 아이들이 어떻게 영어 공부를 했을까. 아이들은 1998년 교환교수가 된 아버지를 따라 1년간 미국에서 생활하며 미국 학교에 다닌 일이 있다. 그러나 최씨의 생각으로는 이때의 경험보다는 어린 시절 디즈니 만화영화를 많이 본 것이 큰 도움이 된 것 같다고. “‘인어공주’나 ‘백설공주’ 같은 디즈니 만화 비디오를 아이들이 무척 좋아했어요. 그리고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었을 때, 동네 아이들, 엄마들과 함께 디즈니 만화영화의 대본을 구해 역할놀이를 한 것도 영어 공부에 도움이 되었다고 봐요.”
흥미를 느낄 때만 배우게 한다
‘엄마는 항상 아이 곁에 있는 사람.’ 최씨의 교육철학은 평범하지만 분명 남다르다